등록 : 2019.03.11 15:18
수정 : 2019.03.11 2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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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라 오마르. 1980년대에 소련군과 싸우다 한쪽 눈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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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신 함께한 측근, 네덜란드 언론인과 인터뷰
“미군이 집 수색했으나 밀실 숨어 피한 적도”
1000만달러 현상금 걸렸으나 번번이 허탕
2013년 병사…“아들과 형제가 파묘해 주검 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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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라 오마르. 1980년대에 소련군과 싸우다 한쪽 눈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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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이 1000만달러(약 113억원)의 현상금을 내건 탈레반 최고지도자 물라 오마르가 병사하기 전까지 미군기지 근처에서 살았으며, 미군이 은신처를 뒤지고도 체포에 실패했다는 증언이 나왔다. 파키스탄 육군사관학교 근처에서 숨어살다 사살당한 알카에다 최고지도자 오사마 빈라덴처럼 등잔 밑이 어두웠던 셈이다.
2006년부터 아프간을 취재한 네덜란드 언론인 베터 담은 오마르 전기의 영문 요약본을 10일 공개했다. 베일에 가려 있던 도피 생활을 측근 인터뷰를 토대로 공개한 게 눈길을 끈다.
요약본을 보면, 2001년 9·11테러 뒤 미군이 아프간을 침공하자 오마르는 남부 자불주 주도 칼라트의 주지사 공관 근처에서 은신에 들어갔다. 탈레반 통치 때 주지사를 지낸 자바르 오마리가 자신의 운전사의 흙벽돌 집에 4년간 오마르를 숨겨줬다. 지금은 아프간 정부가 신병을 확보하고 있는 오마리는 인터뷰에서, 한번은 오마르와 함께 뜰에 있는데 미군이 지나가 장작더미 뒤에 숨었다고 말했다. 미군이 집 내부를 수색해 아찔한 순간도 있었다. 오마르는 찬장처럼 위장한 문 뒤의 밀실에 숨어 발각되지 않았다.
은신처 주변의 주정부 시설이 미군기지로 바뀌자 오마르는 칼라트 동남쪽에 지은 판잣집으로 대피했다. 오마르는 이곳에서도 불과 5㎞ 떨어진 곳에 미군 1천여명이 주둔하는 전진기지가 들어서자 놀랐지만 다시 은신처를 옮기지는 않았다. 탈레반에 호의적인 주민들은 아픈 탈레반 간부가 있다는 정도로만 알았으며, 음식과 옷을 대줬다고 한다.
오마리는 오마르가 <비비시>(BBC)의 현지어 라디오를 매일 청취했고, 겨울에는 햇볕을 쬐러 집밖으로 나오기도 했다고 말했다. 오마르는 매우 과묵해서 현안과 정세에 대해 거의 말을 안 했고, 9·11테러로 탈레반 정권까지 붕괴하게 만든 빈라덴이 2011년 사살당했다는 소식에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오마리는 “이곳 생활도 아주 위험했다”며 “어떤 때는 외국 군대와 우리 사이의 거리가 테이블 하나 정도밖에 떨어지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는 오마르가 2001년 작전 명령권을 부하들에게 위임한 뒤로는 정신적 지도자 역할을 주로 했다고 밝혔다. 처음에는 오마르의 말을 카세트에 녹음해 파키스탄 케타에 있는 탈레반 지도부에 전달했지만, 연락책이 파키스탄 정보 당국에 붙잡혀 심문당한 뒤로는 구두로만 메시지를 전달했다고 했다. 그는 오마르가 2013년 들어 기침, 구토, 식욕 상실 증상을 보였으나 치료를 거부하다 그해 4월23일 사망했으며, 오마르의 아들과 형제가 무덤을 파고 주검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오마르의 사망 사실은 2년 뒤에나 공개됐다.
이본영 기자
eb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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