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6.03.22 20:00
수정 : 2016.03.22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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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일 장 피에르 벰바(53·왼쪽) 전 콩고민주공화국 부통령이 네덜란드 헤이그의 국제형사재판소에서 열린 선고 공판에 들어서고 있다. 헤이그/AP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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벰바에 시민학살·성폭행 유죄판결
성범죄를 ‘전쟁 무기’로 규정하고
‘지휘 책임’ 의무 강조한 첫 사례
인권단체 “정의 향한 역사적 순간”
“민간인들은 전쟁에서 우연히 피해를 입은 것이 아니라, 가장 주요한 표적이었다. … 군인들은 고의적으로 성범죄를 저질렀으며, 피해자의 가족들은 총구 아래서 그 장면을 목격해야 했다.”
재판장이 판결문 요약본을 읽는 순간, 양복을 차려입은 채 법정의 뒤편에 앉아 있던 피고인은 낙담한 듯 고개를 흔들었다. 성공한 사업가이자 콩고민주공화국의 부통령으로서 부귀영화를 누렸던 권력자의 초라한 모습이었다.
국제형사재판소(ICC)는 21일 네덜란드 헤이그 법정에서 장 피에르 벰바(53) 전 콩고민주공화국 부통령의 전쟁 범죄와 반인도주의 범죄 혐의에 대해 유죄를 선고했다. 벰바는 중앙아프리카공화국의 앙주펠릭스 파타세 대통령에 대한 쿠데타 시도를 막기 위해 2002~2003년 자신이 이끌던 콩고해방운동(MLC) 군사 1500여명을 중앙아프리카공화국으로 보내 각종 범죄를 지시한 혐의로 기소됐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중앙아프리카공화국에서 수백명의 민간인 학살과 1000건 이상의 집단 성폭행, 약탈 등의 범죄 행위에 대해 벰바의 책임이 인정된다고 밝혔다.
이번 판결은 성범죄를 ‘전쟁으로 인한 부수적 피해’가 아닌 ‘전쟁 범죄’로 정의한 국제형사재판소의 첫 판결이라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또 성범죄를 ‘전쟁 무기’로 규정했다. 그간 유고슬라비아 내전이나 르완다 내전 등 개별 사안을 다뤘던 국제 임시재판소에서는 성범죄를 전쟁 범죄로 인정했었지만, 상설 전범 재판소인 국제형사재판소에서 이를 인정한 것은 처음이다.
본인이 직접 범죄에 가담하지 않았더라도, 범죄를 저지른 부하의 지도자에게 ‘지휘 책임’을 물은 것도 주목할 만하다. 벰바의 변호사는 마지막 변론에서 “벰바가 직접 명령을 내렸음을 보여주는 문서는 단 한 장도 없다”며 그가 1500명이나 되는 자신의 군대를 통제할 힘이 없었다고 변호했다. 그러나 재판부는 벰바가 이런 범죄를 막지 못했다는 점과, 이후 범죄를 처벌하기 위한 아무런 조치들을 취하지 않았다는 점을 들어 유죄를 인정했다. 국제형사재판소가 지도자의 지휘 책임 의무를 강조한 판결 역시 이번이 처음이다.
국제 인권단체들은 이번 판결에 대해 “정의를 향한 역사적인 순간”이라며 일제히 환영했다. 국제앰네스티의 사미라 다우드 서부중앙아프리카 국장은 “이번 판결은 군 사령관을 비롯한 지도자들이 부하들이 저지르는 전쟁 범죄를 막기 위해 필요한 모든 조처를 다해야 하며, 만약 실패했다면 그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을 분명히 했다”고 했다. ‘성폭력 방지 이니셔티브’(PSVI)의 공동 설립자이자 성폭력 반대 운동에 앞장서온 할리우드 배우 안젤리나 졸리 피트 역시 성명을 내 “이번 재판에서 용기있게 증언한 생존자들과 목격자들에게 존경을 표한다”며 “오랜 기다림 끝에 내려진 유죄 판결은 그간 얼마나 많은 희생자들이 정의를 보지 못했는지를 상기시킨다”고 했다.
최종 형량 선고를 앞두고 있는 벰바는 유죄 판결에 불복해 항소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이미 2008년부터 8년간 구금됐던 벰바는 전쟁 범죄 혐의가 인정되면서 최고 30년 형을 받게 된다.
황금비 기자
withb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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