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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11.11 09:48 수정 : 2019.11.11 19:55

에보 모랄레스 볼리비아 대통령이 10일 엘알토의 군기지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있다. 그는 이 회견을 가진 뒤 몇 시간 만에 사임을 발표했다. AP 연합뉴스

국제감시단의 선거조작 나오자 백기
중남미 좌파 부흥에 찬물
세계적 시위 사태 속 레바논 총리 이어 낙마

에보 모랄레스 볼리비아 대통령이 10일 엘알토의 군기지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있다. 그는 이 회견을 가진 뒤 몇 시간 만에 사임을 발표했다. AP 연합뉴스

지난 14년간 집권해온 남미 좌파 지도자 에보 모랄레스(60) 볼리비아 대통령이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반정부 시위 앞에서 결국 무릎을 꿇었다. 모랄레스 대통령은 10일 대통령 선거 무효를 촉구하는 국제감시단의 발표가 나오자 즉각 사임을 발표했다.

미주 지역의 민주주의·안보·경제·문화 협력을 추진하는 미주기구(OAS)는 지난 10월2일 치러진 볼리비아 대통령 선거와 관련해 “명백한 조작”을 발견했다며 이날 선거결과 무효를 촉구했다. 모랄레스 대통령은 미주기구의 견해에 동의하고, 새로운 선거를 치르겠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군 및 경찰 총수 등이 포함된 정치권이 사퇴를 촉구하자 이를 수용했다. 모랄레스는 이날 텔레비전으로 중계된 연설에서 자신은 대통령직에서 사임한다고 밝히고, 시위대에게 “방화와 형제자매들에 대한 공격을 중단하라”고 촉구했다. 모랄레스는 지난 2006년 1월 볼리비아 첫 원주민 대통령으로 집권했고, 이후 14년을 집권해온 남미 좌파 지도자 중 한명이었다.

모랄레스 대통령은 지난달 2일 대선에서 40%를 득표하고 2위보다 10%포인트 앞섰다고 발표한 뒤 승리를 선언했다. 하지만, 투표 당일 처음 나온 중간개표 결과에선 1·2위 격차가 크지 않아 결선투표가 유력한 상황이었는데도, 선관위는 개표 결과 공개를 중단한 뒤 24시간 만에 모랄레스가 10%포인트 앞선다는 선거결과를 내놓았다. 결선투표 없이 그의 승리를 선언한 것이다. 야권은 즉각 반발했고 국제사회도 우려를 나타냈다.

개표 직후부터 벌어진 3주간의 선거부정 규탄시위로 적어도 3명이 숨지고, 지난 주말부터는 경찰관도 부정선거 규탄시위에 가담하면서 모랄레스의 장기 재집권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군부도 반정부 시위 진압에 동원되지 않겠다며, 엄정중립을 선포해 사실상 모랄레스에게 등을 돌렸다.

이번 선거를 감시한 중남미 국가들의 단체인 미주기구는 이날 광범위한 데이터 조작의 증거를 발견했다며, 발표된 선거결과를 인증할 수 없다고 밝혔다. 이에 모랄레스를 지지하던 정치인들 일부가 사임하면서 그에 대한 퇴진 압력이 점증했다. 윌리엄스 칼리만 육군 사령관은 “평화와 안정 유지를 위해” 모랄레스가 사임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군은 또 시위대를 공격하는 어떠한 무장세력도 무력화시키는 작전을 실시할 것이라고 말해, 시위대를 진압하는 경찰을 무장해제할 수 있음을 시사했다.’

모랄레스 대통령은 최근 중동과 중남미 등 세계 전역에서 일고 있는 반정부 시위 사태로 인해 사임한 두번째 대통령이 됐다. 레바논에서는 생활고에 항의하는 시위 사태로 지난 10월29일 사드 하리리 총리가 전격 사임했다.

중남미 좌파 연대의 일원인 모랄레스의 퇴진이 아르헨티나의 좌파 정부 재등장, 칠레 우파 정부에 대한 반정부 시위 사태, 브라질에서 룰라 전 대통령 석방 등으로 고조되는 좌파 재부상에 어떤 영향을 줄지도 주목된다. 모랄레스의 사임에 브라질 등 중남미의 우파 정부들은 일제히 환영했으나, 쿠바 등 좌파 정부들은 ’쿠데타’라고 비난했다. 미구엘 디아즈 카넬 쿠바 대통령은 민주주의에 대한 “폭력적이고 비겁한” 시도라고 비난했고, 니콜라스 마두로 베네수엘라 대통령은 트위터에서 “우리는 형제 대통령에 대해 이뤄진 쿠데타를 절대적으로 비난한다”고 말했다.

‘볼리비아 첫 원주민 지도자’인 모랄레스는 중남미 현역 최장수 지도자로, 성공적인 사회주의 지도자로 평가받아왔다. 아이마라족 원주민인 그는 온갖 노동일을 전전하다가 코카인 재배를 시작해 코카인 재배농 이익단체를 이끌면서 원주민 단체를 대표하는 인물로 부상했다. 좌파 사회주의운동(MAS) 소속으로 1997년 의회에 입성한 그는 대선에 출마하는 등 거물 정치인으로 부상한 뒤 반정부 시위를 주도하며 현직 대통령을 사임하게 만들었다. 2005년 말에 대선에 다시 출마해 당선됐다. 그는 주요 기간산업 국유화 등으로 빈곤 해소와 경제성장을 이뤄내 2013년에는 압도적인 표차로 대통령 3선에 이르렀다.

하지만, 그는 2016년 자신의 4선 출마를 허용하는 개헌을 시도하다 국민투표에서 이것이 좌절되자 헌법재판소 판결을 통해 ‘대통령 연임 제한은 위헌’이라는 무리한 판결을 받아냈다. 이런 무리한 장기집권 시도로 여론이 악화된 상태에서 지난 10월2일 대선을 치러 결국 투개표 조작과, 이어진 광범위한 반정부 시위에 봉착해 사임하게 됐다.

한편, 마이크 폼페이오 미국 국무장관은 이날 성명을 내고 “이번 미주기구의 볼리비아 선거조작 결정과 볼리비아에서 새 대선이 자유롭고 공정하게 치러져야 한다는 볼리비아 국민의 요구를 지지한다”며 “미국은 미주기구가 다가올 새 대선 과정을 감시할 미션단을 볼리비아에 파견하고, 독립적인 선거관리위원단을 새로 구성할 것을 촉구한다”고 밝혔다.

정의길 선임기자 Egi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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