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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일(현지시각) 다시 대규모 시위가 벌어진 칠레의 수도 산티아고 이탈리아광장 옆 지하철 입구가 시위대의 방화로 불타고 있다. 산티아고/김순배 칠레센트랄대학교 비교한국학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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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흘 맞은 ‘칠레 시위’ 르포
냄비·프라이팬 두드리며…
‘굶주림’이 이들을 거리로 불렀다
“물가 너무 비싸” “대통령 퇴진을”
시민들 광장·거리로…일상은 마비
대통령이 장관 8명 교체했지만
“늘 해먹던 그놈들…바뀐 것 없다”
“이 나라는 케이크가 잘못 잘렸다”
국민 50% ‘월 소득 64만원 이하’인데
서울과 다를 바 없는 물가에 놀라
극심한 ‘소득 불평등’ 일상 무너져
“30페소가 아니라 30년” 분노 가득
칠레 신자유주의 ‘실패한 실험’
“죽고 났더니 수술하라 부를 지경”
시장은 물론 의료 등 공공도 붕괴
대통령 “진정한 오아시스” 외치지만
“현재 발전모델로는 한계” 개혁 요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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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일(현지시각) 다시 대규모 시위가 벌어진 칠레의 수도 산티아고 이탈리아광장 옆 지하철 입구가 시위대의 방화로 불타고 있다. 산티아고/김순배 칠레센트랄대학교 비교한국학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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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건 불꽃이 타올랐다. 시커먼 연기가 치솟았다. “펑!” 화염 속에서 뭔가 터지는 소리가 광장을 울렸다. 매캐한 연기에 찡그린 얼굴로 눈물을 흘리다가, 물 스프레이를 맞고서야 눈을 떴다.
칠레 수도 산티아고는 28일 오후 다시 불길 속에 휘말렸다. 지난 25일, 칠레 역사상 최대인 100만명 넘는 시위대가 모였던 이탈리아광장(플라사 이탈리아) 일대는 분노한 시위대로 넘쳤다. 대통령궁으로 가는 길의 대형 상가가 불타며 검은 연기가 산티아고 시내를 덮었다.
“칠레는 깨어났다!” “칠레는 깨어났다!” 칠레 국기와 축구팀 깃발을 등에 두른 시위대는 펄쩍펄쩍 뛰었다. 광장 위로 경찰 헬기가 날자, “살인마” “살인마” 야유가 쏟아졌다. 대통령궁을 향하는 시위대는 외쳤다. “퇴진하라!” “퇴진하라!” 시위 현장에서 만난 다니엘라 사에스(30)는 “광장의 폭력은 맨날 말만 하고 지키는 게 없는 정부를 움직이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주장했다.
세바스티안 피녜라 대통령은 이날 내무·경제·재무·노동부 등 8명의 장관을 교체했지만, 시위는 다시 타올랐다. “늘 해먹던 그놈들이다. 바뀐 게 뭐가 있나?” 발렌티나 우루투비아(25)는 쓴웃음을 지었다. 거의 열흘 만에 국가비상사태가 해제된 이날, 이틀 전부터 드라마를 다시 내보내던 지상파는 시위 뉴스 속보를 쏟아냈다.
지난 18일 이후, 지하철 요금 인상으로 촉발된 대규모 시위가 열흘 가까이 이어지면서 일상은 무너졌다. 13살 딸아이의 학교도, 대학도 1주일간 문을 닫았다. 동네 앞 슈퍼마켓은 5일간 아예 문을 열지 않았다. 기름을 넣으려는 차들은 며칠간 도로까지 이어졌다. 하필 지난 20일 서울에서 온 손님은 “지진이 나도, 쓰나미가 와도 연다”는 페루 식당이 오후 5시에 문을 닫기 전 늦은 점심 겸 저녁을 먹었다. 동네 앞 지하철역에선 군사독재 뒤 첫 통행금지가 내려진 칠레에서 총을 든 군인들이 며칠간 경계를 섰고, 일부는 계단에서 지쳐 잠들었다.
“살기가 너무 힘들다. 기다리는 게 지겹다.”(호세 라미레스) “생활비가 너무 비싸다.”(알레한드라 페라리) 교사와 엔지니어라는 49살 동갑내기 부부는 “중산층인데도 살기가 힘들다”며 냄비를 주걱으로 두드렸다. 냄비와 프라이팬을 두드리는 시위 ‘카세롤라소’는 먹고사는 문제의 절박함을 상징한다. 지하철 요금이 800페소(약 1300원)에서 ‘기껏’ 30페소(약 50원)가 오른 게 아니라, 물가는 “전부 다 올랐다”. 그래서 지하철 요금은 산티아고에서 올랐지만, 시위는 전국으로 번졌다.
국민의 50%가 40만페소(약 64만원) 이하를 버는데, 한국에서 막 오면 “서울이랑 똑같은” 물가에 놀란다. 지하철 카드를 충전할 때, 앞사람이 두번도 못 타는 1천페소만 겨우 충전하는 것을 수없이 봤다. 생일날 콜라와 감자칩, 피자 한판이면 밤새 떠들며 ‘파티’를 하는 칠레 사람들. 그들은 낙천적인 게 아니라, 그렇게 위안을 삼고 현실을 받아들였던 것일까?
시위의 중심지 이탈리아광장은 산티아고를 동서로 가르는 분기점이다. 이곳을 기점으로, 안데스산맥을 향해 동북쪽 “윗동네”에 부유층이 산다. 그래서 이번 시위대는 통상 시위가 벌어지는 이탈리아광장과 대통령궁 부근을 벗어나, 윗동네까지 행진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6개국 가운데 멕시코와 소득 불평등 1~2위를 오가는 나라, 상위 1%가 국가 전체 자산의 25%를 갖고 있는 칠레. 그래서 사람들은, “이 나라는 케이크가 (똑같지 않고) 잘못 잘렸다”고 말해왔다.
“돈 있는 사람만 잘산다”(다니엘 센테노·29)고 불평하는데, 갑부 출신의 지도자 피녜라 대통령은 시위대가 “전쟁을 하고 있다”며 주먹을 쥔다. 대통령 부인은 친구와 “우리 특권을 줄이고 다른 사람들과 나눌 수밖에 없겠다”고 통화한 게 들통이 났다.
27일 발표된 조사에서 1990년 민주화 뒤 대통령 지지율로는 최저인 14%를 기록한 피녜라 대통령은 10월8일 방송에서 주변국과 비교해 칠레를 “안정적 민주주의를 누리는 진정한 오아시스”라고 치켜세웠다. 지하철이 없는 나라가 수두룩한 중남미에서, 새로 놓인 지하철 3호선과 6호선이 한국에 크게 뒤질 게 없는 건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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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일(현지시각) 칠레 수도 산티아고의 이탈리아광장에서 얼굴을 가린 시위대가 반정부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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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제 거리에서도, 티브이 토론에서도, 칠레의 “모델을 바꿔야 된다”고 말한다. 1973년 쿠데타로 살바도르 아옌데 사회주의 정권을 무너뜨린 아우구스토 피노체트 대통령은 시카고학파를 앞세워 칠레를 ‘신자유주의의 실험실’로 만들었다. 구리로 먹고산다는 칠레에서 구리광산 민영화를 필두로, 전기와 가스, 수도 등 공공서비스조차 경쟁과 효율의 이름으로 시장에 내맡겼다.
민주화 이후 중도좌파연합 ‘콘세르타시온’ 20년 등 30년이 지났지만, 소득불평등 해소와 같은 제대로 된 경제 민주화를 이루지 못했다. 그래서 시내 곳곳의 벽에는 “30페소가 아니라, 30년이다”라는 구호가 넘친다. 시위대가 개혁을 요구하는 부분도 모두 공공 분야다. 의료보험은 사립보험(ISAPRE)과 공공보험(FONASA)으로 나뉘고, 공공보험에 가입한 약 80%는 ‘죽고 났더니 수술하라고 통지가 왔다’는 서글픈 농담을 주고받는다. “평생을 일했는데, 정말 너무 적다”(세르헤 프랑수아·78)는 국민연금은 6개 회사가 경쟁한다. 이른바 ‘인 서울’ 대학교 입학이 보장되는 순수 사립학교의 학비는 40만페소가 보통이다.
결국 한 티브이 토론자의 말대로 “지금의 모델은 칠레의 사회적 안정을 해치고” 있다. 이제 티브이에서는 과감한 부자 증세와 세제 개편을 통해, 복지 확충에 필요한 재정을 어떻게 확보할 것인가 토론이 한창이다. 신자유주의 발전모델이 칠레를 오늘날까지 주변국과 다른 ‘오아시스’를 만들었든 아니든, ‘지금의 오아시스’는 조롱거리가 됐기 때문이다.
이날 오후 공보부 장관은 “폭력을 비난한다. 모두가 원하는 일상으로 돌아가도록 도와달라”고 호소했다. 하지만 칠레인들은 불평등하고 팍팍한 일상이 아니라, 좀 더 평등하고 정의로운 “새로운 일상”을 갈구한다. 29일은 연금, 30일은 세제, 31일은 통행료, 다음달 1일은 교육 개혁, 2일은 대통령 퇴진을 요구하는 시위가 예고됐다. 11월7일, ‘데스파시토’로 유명한 루이스 폰시의 대규모 콘서트는 티브이 광고대로 열릴 수 있을까? 칠레는 평온한 일상으로, 그들이 꿈꾸는 새로운 일상으로 언제 돌아갈 수 있을까?
산티아고(칠레)/글·사진 김순배 칠레센트랄대학교 비교한국학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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