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9.07.23 17:28
수정 : 2019.07.23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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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령 푸에르토리코의 수도 산후안에서 22일 ‘단톡방’ 막말 파문을 일으킨 리카르도 로세요 주지사의 퇴진을 요구하는 시위대가 주지사 관저로 가는 것을 막기 위해 경찰들이 길을 막아서고 있다. 산후안/AFP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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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차별·동성애 혐오 막말 대화 들통
주지사 사과에도 50만명 “퇴진” 외쳐
긴축정책 등 겹쳐 “더는 못참아” 폭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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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령 푸에르토리코의 수도 산후안에서 22일 ‘단톡방’ 막말 파문을 일으킨 리카르도 로세요 주지사의 퇴진을 요구하는 시위대가 주지사 관저로 가는 것을 막기 위해 경찰들이 길을 막아서고 있다. 산후안/AFP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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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키, 레눈시아, 엘 푸에블로 떼 레푸디아!“(리키는 물러나라, 국민들이 당신을 거부한다.)
미국령 푸에르토리코의 수도 산후안에서 22일 수십만명의 시민들이 리카르도 로세요 주지사의 퇴진을 요구하는 집회에 참가했다. 버스를 타고 지방에서 올라온 이들은 물론 미국 본토에서 비행기로 날아온 이들까지 시위에 가세하면서, 산후안 도심은 사실상 마비되다시피 했다. 현지 최대 일간지 <엘 누에보 디아>는 지리학자의 말을 인용해 이날 시위에 참여한 이들의 숫자가 50만명이 넘는다고 보도했다. 푸에르토리코의 전체 인구가 365만명이니, 국민 7명 중 1명꼴로 시위에 참가한 셈이다. 푸에르토리코 역사상 최대 규모의 시위 중 하나라고 외신들은 전했다.
이번 시위는 지난 13일 로세요 주지사가 측근 11명과 텔레그램 ‘단톡방’(단체 채팅방)에서 나눈 ‘막말 대화’가 공개되면서 불붙기 시작했다. 푸에르토리코 탐사저널리즘 센터가 공개한 900쪽 분량의 단톡방 대화에는 야당 정치인은 물론 지지자와 2017년 ‘허리케인 마리아’의 희생자들에 대한 성차별적이며 동성애 혐오적인 내용들이 담겨 있다. 인기 가수인 리키 마틴에 대해 “맹목적 남성우월주의자”인데 동성애자라며 비아냥거린 것 등이 한 예다. 허리케인 마리아 강타 당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설전을 벌이며 전세계적 이목을 받았던 야당 소속 카르멘 율린 크루스 산후안 시장에 대해 정부 재무책임자인 크리스티안 소브리노가 “(총으로) 쏴버리고 싶다”고 하자, 로세요 주지사가 “그래 주면 고맙지”라고 답하는 대목도 나온다.
며칠째 시위가 이어지자, 로세요 주지사는 지난 21일 부적절한 발언에 대해 사과하며 내년 주지사 선거에 재출마하지 않겠다는 뜻을 밝혔지만, 시위대는 ‘즉각 퇴진’만이 답이라며 물러설 기세를 보이지 않고 있다. 단톡방 막말 대화가 시위에 불을 댕기긴 했지만, 그동안 쌓일 대로 쌓인 불만이 한꺼번에 터져 나오면서 ‘이참에 바꿔보자’는 분위기로 가고 있다는 게 외신들의 분석이다.
푸에르토리코인들 사이에는 1898년 미국 영토로 편입돼 미국 시민권자인데도 대통령 선거 등에는 참여할 수 없게 돼 있어 ‘2등 국민’ 취급을 받고 있다는 불만이 자리잡고 있다. 몇 년째 파산보호 신청에 따른 가혹한 긴축 조처가 이어지고 있는데다, 허리케인 마리아 피해 복구는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 이런 가운데 고위층의 부정부패가 잇따라 폭로되면서 사회지도층이 끼리끼리 다 해먹고 있다는 불만까지 쌓이면서, 푸에르토리코 민심이 요동치고 있는 상황이다. 이날 시위에 참가하기 위해 동부 야부코아에서 온 애슐리 산티아고(28)는 <뉴욕 타임스> 인터뷰에서 “국민들은 이미 지칠대로 지쳤다. 더는 못 참아주겠다”고 말했다. 그가 사는 야부코아에선 허리케인 마리아 강타 이후 9개월 넘게 전기가 끊겼고, 부채 위기의 여파로 아들의 이웃 학교는 폐교됐다.
전문가들은 아직까지 대규모 시위가 ‘주지사 퇴진’ 요구에 초점이 맞춰져 있지만, 신진보당과 대중민주당 양당 체제로 굳어진 푸에르토리코 국내 정치 지형에 격변을 가져오는 상황으로까지 이어질 수도 있다고 전망했다.
이정애 기자
hongbyu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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