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9.04.02 15:44
수정 : 2019.04.02 16:47
|
국제앰네스티와 프랑스 시민단체들이 파리에서 사형제 폐지를 주장하는 시위를 하는 모습. 위키미디어 코먼스
|
혈관종 앓는 사형수 “독극물 대신 가스로…”
위헌소송 5:4 패소…“헌법에 관련규정 없어”
9명 판사 중 보수-진보 성향 시각차 뚜렷
보수 판사는 “형집행 늦추려 꼼수” 지적도
소수의견 “법원이 수형자 최후 관심 가져야”
작년에만 미국서 25명 사형…23명에 독극물
|
국제앰네스티와 프랑스 시민단체들이 파리에서 사형제 폐지를 주장하는 시위를 하는 모습. 위키미디어 코먼스
|
미국 대법원이 사형수가 고통 없이 죽을 권리를 인정하지 않는 판결을 내놨다. 사형 집행 방식 뿐 아니라 사형제 자체를 둘러싼 논란이 다시 일 전망이다.
1일 미국 연방대법원은 미주리주의 사형수인 러셀 버클루(50)가 자신에 대한 형 집행을 독극물 주사 대신 독가스로 해달라며 낸 위헌소송에 대해 5대4로 원고 패소 판결을 했다고 <로이터> 통신이 보도했다.
버클루는 1996년 자신과 헤어진 여자 친구를 찾아가 성폭행하고 그와 함께 살던 남성을 총기로 살해한 뒤 그의 6살 아들과 현장에 출동한 경찰관에게도 총을 쏴 다치게 한 혐의로 사형이 확정됐다. 그는 그러나 자신이 얼굴과 목 부위에 선천성 혈관종을 앓고 있는데 독극물 주입 방식의 사형은 극심한 고통을 유발해 헌법에 위배된다며, 형 집행 방식의 변경을 요구하는 소송을 냈다. 미국 수정헌법 8조는 “과도한 보석금 또는 벌금을 부과하거나, 잔혹하고 이례적인 처벌을 해서는 안된다”고 규정하고 있다. 미주리주는 사형 수단으로 독극물과 독가스를 모두 인정하고 있으나 줄곧 독극물 주입 방식으로만 집행해왔다.
‘고통없는 죽음’을 요구한 사형수의 위헌 소송을 두고 연방대법원 9명의 종신직 판사들 중 공화당 집권 시절 임명된 보수 성향 5명과 민주당 행정부가 임명한 진보 성향 4명의 의견이 정반대로 갈렸다. 연방대법원은 다수 의견을 채택한 판결문에서, 버클루 쪽이 독가스 사형이 순조롭게 진행될 수 있다는 걸 증명하지 못했고 덜 고통스럽다는 증거도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
미국 워싱턴 소재 연방대법원 건물. 출처 위키미디어 코먼스
|
사형제를 옹호하는 보수 성향의 닐 고서치 판사는 의견서에 “미국 수정헌법 8조가 수형자의 고통 없는 죽음을 보장하는 것 아니며, 끔찍한 범죄에 희생된 많은 사람들도 고통 없이 죽는다는 보장이 없다”고 썼다. 2017년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임명한 고서치 판사는 “그(버클루)는 확정판결 이래 끊임없이 소송을 내면서 20여년 전에 저지른 범죄에 대한 형 집행을 미루려 술수를 쓰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날 판결은 2015년 오클라호마주에서 한 사형수가 독극물 주사가 아닌 다른 방식의 집행을 요구하며 위헌소송을 냈다가 패소한 판례의 연장선에 있다. 당시 재판부는 수형자가 사형 집행 방식의 교체를 요구할 경우엔 고통이 덜한 다른 대안을 함께 제시해야 한다고 판결했다. 이번 판결에서 역시 ‘다수’ 의견을 낸 새뮤얼 앨리토 판사는 오클라호마주 재판 당시 사형 방식을 법적으로 문제 삼은 것을 두고 “사형제에 대한 게릴라 전쟁”이라고 말한 바 있다.
이번 연방대법원 판결이 나온 직후 에릭 슈미트 미주리주 법무장관의 대변인은 “미주리주와 버클루의 범죄 피해자들은 정의롭고 합법적인 (사형) 판결이 집행되기를 23년째 기다리고 있다”며 “오늘 판결로 우리는 정의에 한 발짝 더 다가섰다”는 논평을 내놨다.
|
미국 캘리포니아주의 한 교도소 내 독극물 사형실. 출처 위키미디어 코먼스
|
반면 ‘소수’ 의견을 낸 진보 성향의 판사들은 헌법 정신과 인권에 방점을 찍었다. 소니아 소토마요르 판사는 의견서에 “사형수가 형 집행의 마지막 순간에 대한 뭔가를 추구할 때 법원은 각각의 사례를 판단해야 한다”며 “미국 사법(의 정신)은 오만이 아니라 경계와 관심(vigilance and care)이 되어야 한다”고 썼다.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이 임명한 소토마요르 판사는 특히 “다수 의견은 이번 소송 사건이 버클루의 사형 집행을 늦추려 사법 절차를 악용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을 내비친 것으로 보인다”고 짚었다.
역시 진보 성향으로 분류되는 스티븐 브라이어 판사는 “사형수들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고 신속히 형을 집행할 수 없다면, 이는 사형을 집행하기 위한 합헌적 방식이 없다는 뜻일 수 있다”는 의견을 내놨다. ‘잔혹하고 이례적인 처벌’을 금지한 수정헌법 8조를 근거로 사형제의 존속 자체에 이의를 밝힌 것으로 풀이된다.
미국에선 지난해에만 모두 25명의 사형수에 대한 형이 집행됐다. 이 중 23명은 독극물 주사로, 나머지 2명은 테네시주에서 2000년 이후 처음으로 전기의자에서 최후를 맞았다.
조일준 기자
iljun@hani.co.kr
광고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