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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6.05.07 19:54 수정 : 2006.05.09 13:40

당신은 과연 얼마나 놀 줄 아는가? 호이징하는 <호모 루덴스>에서 현대인에게 이런 질문을 던진다. 사진은 마을 주민들이 한데 어울려 윷놀이를 즐기고 있는 모습. <한겨레> 자료사진

김용석의 고전으로 철학하기

-호이징하의 <호모 루덴스>-

요한 호이징하의 <호모 루덴스>(1938년)는 20세기 문화사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는 고전이다. 호이징하는 ‘놀이하는 인간’이라는 주제로 인간 문화의 다양한 분야를 역사적으로 고찰한다. 이는 놀이와 법률, 놀이와 지식 등의 소주제를 보아도 알 수 있다. 그는 “인간 문화가 얼마나 놀이적 성격을 지니고 있는지”를 탐구하는 것이다. 그의 학술적 업적은 바로 이렇게 문화의 다양한 분야를 관찰하고 분석함으로써 놀이의 특성을 밝혀냈다는 데에 있다.

놀이의 첫 번째 중요한 특성은 ‘자발적 행위’라는 것이다. 누가 하라고 해서 하는 놀이는 이미 놀이가 아니다. “자유라는 본질에 의해서만 놀이는 자연의 필연적 진행 과정과 구분된다.” 즉 문화가 되는 것이다.

놀이의 두 번째 특성은 ‘비일상적’이라는 것이다. 놀이는 일상적 삶을 벗어나 매우 자유롭고 일시적인 활동의 영역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렇지만 여가로서의 놀이는 “우리 삶의 반려자이자 보완자가 되어 사실상 삶 전체의 불가결한 요소가 된다. 그러므로 놀이는 삶을 가꾸어 주고 삶을 확대시킨다.”

비일상성과 연관한 놀이의 세 번째 특성은 장소의 격리성과 시간의 한계성이다. “놀이는 제한된 시간과 장소에서만 ‘놀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으로써 놀이는 “놀이 고유의 과정과 의미를 갖게” 된다. 시·공간의 한계에서 놀이는 스스로 질서를 창조하며, 그렇게 창조한 “질서 그 자체가 된다.” 이러한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 정해놓는 것이 놀이의 규칙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놀이(play)’는 그 자체로 ‘공정한 놀이(fair play)’여야 한다. 즉 ‘페어 플레이’는 높은 수준의 성취를 이룬 놀이가 아니라, 놀이가 놀이이기 위한 기본 조건인 것이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호이징하가 페어 플레이 정신을 각종 경연이나 스포츠에 한정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전쟁과 과학 분야에서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그는 전쟁이 동등한 권리를 가진 경쟁자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인간으로서 인정받지 못한 집단, 즉 야만인, 악마, 이교도 등으로 규정되는 상대에 대해 수행될 때”, 전쟁은 놀이의 특성을 완전히 잃게 되고 참혹한 사태가 될 뿐이라고 지적한다. 즉 전쟁에서도 상대를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과학적 탐구 행위도 놀이와 흡사한데, 어떻게든 남보다 먼저 연구 성과를 내고 논증으로 상대방을 ‘말살’시키려 할 때, 놀이의 성격을 잃어버린다. 그러므로 “진정한 문화는 반드시 페어 플레이를 요구한다”는 것이다.

놀이와 질서의 내적 결합은 또한 놀이의 상당 부분이 미학적 영역에 속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질서 잡힌 형식을 창조하고자 하는 충동”은 곧 “아름다워지려는 경향”과 일치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페어 플레이는 아름답다.

이런 놀이의 특성들을 아울러 보건대, 자발적으로 조화로운 질서의 세계를 창조하는 미학적 성취와 함께 생동하는 삶, 그것이 놀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이 지점에서 ‘자유’와 ‘질서라는 한계’는 충돌하는 게 아니라 역설적인 결합을 이루어낸다. 그래서 놀이는 즐겁고 아름답고 기쁨을 주는 문화활동이 된다.

그런데 바로 여기서 ‘우리는 얼마나 놀 줄 아는가?’ 하고 자문하게 된다. 사실 호이징하는 ‘놀이하는 인간’을 논하면서, ‘놀지 않는 인간’을 비판하고 있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는 ‘놀 줄 모르는 현대인’에 경종을 울리고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문명은 어느 정도까지 놀이 형식을 유지하고 있는가?” 우리는 자유롭게 놀기보다는 문명의 산물에 둘러싸여 ‘놀아나고’ 있지는 않은가? 비일상적 활력제로서 여가 활용이 일상적 의무가 되어 가고 있지는 않은가? 수많은 경쟁적 놀이에서 승부와 성취가 페어 플레이보다 우선함으로써 놀이 그 자체를 잃어버리고 있지는 않은가?

<호모 루덴스>는 이런 질문들을 계속 던지고 있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이 점이 더욱 중요하다- 우리 각자가 이 질문들을 회피하지 않고 이들과 투사적 자세로서 ‘경기’하도록 초청하고 있다. 즉 근원적인 질문과 진지하게 ‘놀자고’ 하는 것이다. 이것이 또한 이 독특한 책의 저자가 ‘철학과 놀이 형식’의 장에서 주장했던 바이다. 영산대 교수 anemos@ys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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