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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6.04.09 16:30 수정 : 2006.04.10 14:04

렘브란트의 동판화 <서재의 파우스트>(1652).

학교에서 논술끝내기

문학 속 철학산책/‘파우스트’를 통해 본 구원의 의미 1

<파우스트>는 서구문학이 낳은 위대한 작품들 가운데 하나이며, 독일어로 쓰인 가장 중요한 작품으로 평가 받고 있다. 당대를 풍미하던 시인이자 석학답게 괴테(J. W. Goethe, 1749~1832)는 이 작품 안에 신학적, 역사적, 심리학적, 그리고 과학적 지식들을 강렬한 힘과 서정이 넘치는 시들과 함께 소복이 담아놓았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전 세계에 번역되어 책으로 출판되고, 연극으로 공연되며, 음악으로 작곡되고, 교과서로 읽히며, 다양한 해석서가 나오고, 수없이 인용되며, 심심치 않게 패러디되기도 한다.

그런데 이 위대한 작품에는 떨쳐버릴 수 없는 한 가지 의문이 시종 따라다닌다. 자신의 욕망을 쫓아 쾌락을 탐닉하다 살인까지 한 인간이 어떻게 구원받을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1부에서는 여주인공 그레트헨이, 2부에서는 파우스트 자신이 구원을 받는다. 이들의 구원은 실로 감격적이지만, 거의 돌발적이다. 구원받는 자에게 그럴만한 정당한 근거가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우선 1부를 보자! 평생을 학문에 바친 것을 뒤늦게 후회하며 향락적인 삶을 갈망하던 파우스트는 악마 메피스토펠레스와 계약한다. 그 뒤 메피스토펠레스의 도움으로 30년이나 젊게 변해, 순결하고 아름다운 처녀 그레트헨을 유혹하여 쾌락적인 사랑을 나눈다. 그 도중에 그레트헨은 어머니와 오빠를 죽게 만들고 결국에는 파우스트와의 사이에서 난 아기마저 물에 빠뜨려 죽게 한다. 그녀는 곧바로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지만 감옥에 갇혀 참수형을 당하게 된다. 파우스트가 구하러 와 함께 달아나자고 하지만 “양심의 가책” 때문에 거절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심판을! 저는 하나님께 몸을 맡겼나이다.”라고 기도한다. 그러자 메피스토펠레스는 “저 여자는 심판 받았다!”라고 승리를 외친다. 그때 하늘에서 “구원 받았느니라!”라는 목소리가 들린다.

그레트헨의 구원은 우선 종교적으로 해석할 수 있다. 기독교의 가르침에 의하면, 구원은 인간의 선한 행위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오직 믿음으로 이루어진다. 그레트헨은 비록 악한 일을 했지만 신과 그의 구원을 믿었기 때문에 구원받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매우 난처한 문제를 안고 있다. 누구든 자신의 욕망을 쫓아 살며 마냥 악한 행위들을 하고서도 신을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을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만일 그렇다면 세상에 어느 누가 선하게 살려고 애쓰겠는가! 신학자들도 꺼려하는 이 곤란한 문제에 대해, 철학자 키에르케고르(S. A. Kierkegaard, 1813~1855)가 가차 없는 답변을 주었다.

소위 ‘실존의 3단계 설’이라고 불리는 주장들에서 그는 인간의 성숙단계를 심미적 단계, 도덕적 단계, 종교적 단계로 나누었다. “심미적 단계”란 인간이 감각적 쾌락과 욕망을 따르는 원초적 단계이다. 사람은 누구나 이 단계에서 생을 시작한다. 때문에 자연적 인간은 모두 심미적 인간이며 동시에 “순결의 상태”이자 “무지의 상태”에 놓여 있다. 이 단계에서의 인간은 순간에서 순간으로, 향락에서 향락으로, 육체적인 것이든 아니면 정신적인 것이든, 행복을 위해서라면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다.”는 식으로 찾아 몰두한다. <파우스트>에서 남자와 즐기기 위해 어머니에게 약을 먹이는 그레트헨이 바로 이렇게 순결하고 그토록 무지했다.

그러나 인간은 무절제한 욕망으로 허덕이는 “지하실 속의 삶”에 절망을 느끼고 이내 “도덕적 단계”에 이르게 된다. 그때부터 그는 자신의 내면으로부터 “윤리적 소리”를 듣게 되며, “이것이냐, 저것이냐?”, 즉 선과 악이라는 양자택일의 기로에 서게 된다. 그레트헨도 분명 이런 단계에 도달했다. 그녀는 파우스트에게 종교와 세례에 대해서, 그리고 신에 대해서 물으며 메피스토펠레스를 멀리하고 싶다고 말한다.


도덕이란 원래 악을 버리고 선을 따라야만 한다는 엄숙한 요구이다. 그런데 이 요구에 따르지 못할 때, 인간은 “뉘우침”을 통해서 다시 “절망”에 빠지게 된다. 이때의 절망은 자기 내면의 소리조차 따르지 못하는 자신의 “나약함”에서 나오는 절망이기 때문에 이전의 절망보다 더욱 깊다. 그리고 ‘그 탓이 나에게 있다.’라는 “죄의식”으로 이어진다. 그레트헨이 “괴롭다! 괴롭다! / 나를 책망하려고 / 오락가락하는 생각에서 / 빠져나갈 수만 있다면 / 여기에서 빠져나갈 수만 있다면!”이라고 외치는 것이 그래서이다.

키에르케고르는 “죄의식이 나타나자마자 도덕은 뉘우침에서 좌절한다. 왜냐하면 뉘우침은 최고의 도덕적 표현이지만, 동시에 최고의 자기부정이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그리고 이 “최고의 자기부정”을 “무한한 자기체념”이라는 말로도 표현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바로 이것이 인간을 ‘종교적 단계’로 이끈다는 것이다. 그레트헨의 “무한한 자기 체념”은 사랑하는 사람을 따라 가는 것을 포기하는 것, 단두대에 죄 된 몸을 내맡기는 것으로 나타나기에 너무 안타깝지만 말이다. 그러나 그것이 그레트헨이 ‘종교적 단계’에 도달한 증거이자, 구원받을 수 있는 근거가 된 것이다!

김용규/자유저술가, <도덕을 위한 철학 통조림> 저자
따라서 마음껏 쾌락을 즐기며 악한 일을 하고도 신을 믿는다고만 하면, 구원받을 수 있다는 생각은 가당치도 않다. 구원의 문제는 믿음의 문제이지 선악의 문제가 아니지만, 그 믿음 앞에는 “뉘우침”에서 나온 “최고의 자기부정”, “무한한 자기 체념”이 필히 전제되어 있다는 말이다. 이것이 ‘신을 믿는다.’라는 말의 진정한 의미이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믿음, 오직 이러한 믿음을 통해서만 “자기 자신마저도 용납할 수 없는 자기”를 용납 받는 구원에 이르게 된다. 그레트헨은 그렇게 해서 구원 받았다! 그런데 파우스트도 그럴까? 두번째 글에서 살펴 보자!


한국문화예술위원회에서 운영하는 청소년 문학 사이트 ‘글틴’(teen.munjang.or.kr)의 ‘문학을 위한 철학 통조림’ 게시판에 서 글 전체를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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