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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4.02.26 20:12 수정 : 2014.02.27 17:27

이르쿠츠크에서 바이칼로 가는 도정의 시베리아 평원의 자작나무 숲.

[매거진 esc] 커버스토리 / 시베리아 횡단철도 체험기
사흘 밤낮을 한 방향으로 달리는 열차, 서울~부산도 한나절이면 도착하는 땅에 사는 우리에게는 짐작하기 힘든 질주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바이칼호까지 이어지는 유형자의 땅, 눈과 얼음과 자작나무숲이 초대하는 겨울의 시베리아를 다녀왔다.

“기차로 하루 종일 달렸는데도 산 하나 보이지 않더라.” 일제시대 때 학교를 다닌 외할아버지가 그 시절 만주로 수학여행 다녀온 얘기를 할 때 그러셨다. 어릴 적부터 뇌리에 박혀 있었다. 기차든 자동차든 몇 시간만 달리면 종착지에 가 닿는 땅, 게다가 북쪽 절반이 막혀 섬 같은 땅에서 나고 자란 내가 상상하기도 어려운 그 광대무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이르쿠츠크의 바이칼 호수까지 가는 4300여㎞의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사흘 밤낮 내리 달려가면서 비로소 그걸 체감했다. 지난 8~15일의 한겨레 테마여행 ‘겨울의 심장, 바이칼을 가다’. 그 여행은 바로 그 체험만으로도 경이였다.

겨울 시베리아. 미국 뉴욕에서 알래스카 앵커리지로 가는 비행기 창으로 눈 덮인 광대한 북미 대륙을 내려다봤고, 인천에서 영국 런던 가는 비행기에서도 얼어붙은 시베리아의 광막한 대지를 오랫동안 내려다본 적 있다. 하지만 고공에서 내려다보는 그 몇 시간의 원거리 조망과 사흘 밤낮 객차 철제문 손잡이가 손에 쩍쩍 들러붙는 섭씨 영하 20~40도의 혹한 속 대평원 풍경을 지근거리에서 보며 달리는 설국열차 체험은 차원이 달랐다. 저녁 7시 넘어 블라디보스토크를 떠나 북행하던 기차가 날을 넘겨 하바롭스크를 지나 서북행으로 방향을 바꾼 이틀째, 1921년 ‘자유시 참변’으로 1000명 가까운 조선독립군들이 희생당한 스보보드니를 지나 더 북쪽으로 달려갈 무렵일 텐데, 그때 바깥 온도는 섭씨 영하 41도라고 했다.

짧게는 몇분, 길게는 30분
정차하는 역들마다 차장들은
쇠막대기와 도끼를 들고 내려
기차 바퀴 주변에 잔뜩 달라붙은
얼음들을 탕탕 두들겨 떨어냈다

그야말로 광대무변. 우랄산맥 동쪽의 시베리아지역 면적은 약 1278만㎢. 거기에 사는 인구는 2941만 정도로 인구밀도는 1㎢당 2.3명. 극동연방관구는 약 617만㎢에 인구 646만명으로 밀도는 1.0명. 게다가 그 인구도 대부분 도시지역에 몰려 있다. 그러니까 시베리아 대부분은 사실상 텅텅 비어 있다. 나라를 찾겠다던 선조들은 왜 그 낯설고 먼 추운 땅까지 흘러가 피를 흘려야 했을까.

자작나무 숲은 정말 가도 가도 끝이 없었다. 그리고 처음부터 끝까지 그야말로 설국이었다. 야트막한 산들이 함께 달렸지만 그건 구릉에 가까웠다. 그런 구릉조차 없이 탁 트인 대지들이 아득히 멀리 지평선까지 눈을 덮어쓴 채 수시로 나타났다. 한반도를 찾는 철새들이 겨울에 시베리아를 떠나는 것은 추워서가 아니라 땅을 덮고 있는 저 눈과 얼음 때문이리라. 강과 들판과 호소들이 모두 하얗게 얼어붙은 대지에선 먹이 찾기가 쉽지 않겠지. 시속 80㎞ 또는 그 이상의 속도로 달리는 전철화된 시베리아 횡단철도의 4인이 함께 들어가는 침대칸 ‘쿠페’. 그 창가에 반쯤 드러누워 올려다본 시베리아 새벽 하늘의 그 총총했던 별들.

시베리아 횡단 기차.

짧게는 몇 분, 길게는 30분 정도 정차하는 역들에 기차가 도착하면, 차장들은 모두 쇠막대기와 긴 자루가 박힌 도끼를 들고 내렸다. 4인용 쿠페가 10개쯤 들어찬 객차마다 차장 2명이 배속돼 교대로 근무했다. 차장들은 거의 예외없이 여성이었다. 30, 40대로 보이는 그들은 기차가 역에 정차할 때마다 그 무거운 도구로 기차 바퀴 주변에 잔뜩 달라붙은 얼음들을 탕탕 두들겨 떨어냈다. 한국철도공사 기관사 이성계씨는 얼음들을 직접 만져보더니 브레이크용 압축공기가 방출될 때 그 주변에 얼음이 형성된다며, 그냥 두면 제동장치에 문제가 생긴다고 했다. 차장들은 허리를 구부리고 화장실 쪽 변기 아래의 더 두텁게 달라붙은 누르스름한 얼음들을 후려쳤다. 한 번 달리면 보통 몇 시간씩 쉬지 않고 달리는 기차의 화장실에서 철길로 바로 방사되는 오물들 일부가 겹겹이 얼어붙어 있었다. 차장들은 기차가 역에 정차하기 전과 역을 출발한 뒤 수십분간 화장실 문을 잠가버렸다. 묘하게도 정차 때마다 다수의 사람들이 그 타이밍을 조절하지 못해 안절부절못했다. 2~3평쯤 되는 좁다란 쿠페 양쪽 벽엔 아래위 2층으로 반접이식 침대가 붙어 있었다. 쿠페의 승객 배정에 남녀 구분은 없었다. 초대면의 남녀가 좁다란 쿠페 공간을 공유하며 달려가는 것, 그게 시베리아 횡단철도의 또다른 묘미라고 했다.

일어서서 얼어붙어버린 바이칼 호수 호보이 곶 앞 얼음 조각들.

섭씨 20도 안팎을 유지하는 쿠페에서 이부자리를 깔고 덮고 누우면 제법 아늑했다. 그렇게 눕거나 기대거나 다리 꼬고 앉아서 약간 흔들리며 달리는 기차 차창으로 바라보는 시베리아 풍경. 하루 이틀 지나면 변함없는 풍경에 질리고 긴장도 풀려 슬슬 딴생각 나기 시작한다고들 했지만, 사람마다 차이가 있는 건지, 이대로 그냥 모스크바까지 가버리지,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샤워시설이 없고, 세면대 물도 한 손으로 수도꼭지 아래의 돌출장치를 계속 누르고 있어야 나오는 구조여서 씻기가 불편한 게 흠이었지만, 따뜻한 물은 차장 방 앞에 설치된 전기로에서 24시간 마음대로 받아 쓸 수 있었다. 차장들에게 초코파이를 몇 개 안기면 엄청난 뇌물 효과를 발휘한다는 안내책자 조언은 적어도 내겐 아무 소용이 없었다. 간단한 쿠페 바닥 청소를 끝낸 40대로 보이는 거구의 차장에게 사들고 간 초코파이 몇 개를 슬쩍 들이밀었으나 받지 않았다. 무안했다.

철도 여정의 절반을 넘었을 때 체르니솁스크 역이 나타났다. 거기에서 유형을 산 니콜라이 체르니솁스키(1828~1889) 동상이 서 있었다. 볼셰비키 혁명의 주역 레닌의 <무엇을 할 것인가>는 바로 러시아 문학의 고전이 된 체르니솁스키의 소설 제목을 그대로 따 붙인 것이다. 시베리아 횡단철도 전체가 혁명가들의 피눈물이 배인 유형지들을 축으로 건설됐다. 이르쿠츠크 건설도 1825년의 데카브리스트(12월 혁명당) 반란과 그 주역들의 그 지역 유형을 빼놓고 얘기될 수 없다. 톨스토이 <전쟁과 평화>의 주인공 볼콘스키가 그때 이르쿠츠크로 유형 간 실제 인물을 모델로 삼았고, 그들을 후원한 문호 푸시킨, 그리고 도스토옙스키, 솔제니친 등이 모두 시베리아 유형자였다.
인천공항에서 비행기로 블라디보스토크로 가서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탄다. 기차로 이르쿠츠크까지 가서 바이칼 올혼 섬까지는 여름엔 정기노선 버스가 있고, 겨울엔 정기 노선버스가 선착장까지만 가며 올혼 섬까지는 현지 차를 빌려서 가야 한다. 인천~블라디보스토크 간은 거의 매일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이 운항한다. 여름엔 인천공항에서 이르쿠츠크로 가는 직항기가 있다. 시베리아-바이칼 전문 여행사로 비케이(BK)투어가 있다. 문의 (02)703-1373.

이르쿠츠크의 고려 공산당과 상하이 공산당의 알력이 얽혀 있는 스보보드니의 조선독립군 참사도 볼셰비키 혁명 뒤의 적군-백군 내전, 이를 빌미로 한 서방과 일본의 반동적인 러시아내전 개입, 일본군의 시베리아 출병, 봉오동과 청산리 전투 패배 뒤 일본군이 자행한 대대적인 조선항일세력 살륙전의 귀결인 간도 참변의 여파라 할 수 있다. 조선항일혁명가들을 그 먼 동토로 내몬 비극적인 역사는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우리가 서울 또는 목포, 부산에서 탄 열차 그대로 유럽까지 갈 수 있는 지름길을 버려두고 비행기로 먼 길을 돌아가야 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이르쿠츠크에 접근하면서 철도 연변의 숲도 바뀌었다. 자작나무 대신 쭉쭉 뻗은 소나무들이 주종을 이루기 시작했다. 숭례문 복원 부실 문제와 관련해 관심사가 됐던 바로 그 소나무였다. 그 소나무들이 잘려나가고 있었다. 아름드리 소나무를 잔뜩 실은 기나긴 화물기차들과 여러 차례 마주쳤다. 철로변의 중소 도시들 주택 거의 모두가 나무로 지어졌고, 나무 때는 난로 굴뚝에선 연기가 자욱하게 피어올랐다. 시베리아 철도가 마지막 남은 지구 허파들 중의 하나인 광대한 시베리아 삼림을 야금야금 파먹어가는 악마의 전초기지가 아니기를.

이르쿠츠크=글·사진 한승동 기자 sd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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