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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2.03.14 17:31 수정 : 2012.03.14 17:31

합스부르크 왕가의 정궁인 호프부르크.

[매거진 esc]
전통과 현대가 행복하게 공존하는 오스트리아 빈 산책

“이래도 되나요? 직원들이 얼굴도 쳐다보지 않던걸요. 그냥 여권에 스탬프만 꾹 찍더라고요.” 여행 전문지 기자였던 그에게도 그곳의 입국 수속은 놀라움이었던가 보다.

빈(비엔나)엔 비엔나커피가 없다. 다른 이름의 커피가 있다면 프랑스 말로 섞는다는 뜻을 지닌 멜랑제뿐이다. 특별한 게 아니다. 초콜릿이나 코코아 가루 등을 첨가해 휘휘 젓는다. 커피가 유명하다지만, 사실 커피는 두 차례나 빈을 포위 공격했던 오스만튀르크에서 전해져 왔다. 심지어 원수의 기호까지 수용한다. 비엔나아이스크림도 유명하지만, 실은 이탈리아산 아이스크림 두세 가지를 한 스푼씩 올린 게 고작이다. 빈엔 빈만의 것이 별로 없지만, 사람들은 거기서 먹고 마시는 것에 비엔나 브랜드를 붙인다. 그리고 좀더 비싼 값을 요구한다. 기이하게도 손님들은 흔쾌히 돈을 낸다.

카를 킨스키 백작 저택에선
지금도 300여년 전
무도회가 이어진다

오스트리아는 8개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다. 이탈리아·스위스·리히텐슈타인·독일·체코·슬로바키아·헝가리·슬로베니아 등. 유럽의 중앙에 위치해 있고, 빈은 동서남북 유럽의 중앙역이다. 가톨릭과 정교, 기독교와 이슬람이 충돌하며 문화가 섞였고, 혈통적으로는 게르만·슬라브·프랑크·라틴의 피가 섞였다. 합스부르크 왕조는 400여년 동안 신성로마제국의 제위를 차지했다. 그 영토는 에스파냐부터 독일에, 네덜란드에서 헝가리·체코에 이르렀는데, 정복이 아니라 결혼정책에 의한 것이었다. “힘센 자들이여, 전쟁을 하라. 행복한 오스트리아는 결혼할지니. 그들에게는 마르스가, 우리에게는 비너스가 있다.”

빈은 23개 구역으로 이뤄졌다. 링슈트라세(순환도로)로 둘러싸인 1구역이 그 중심이다. 사과의 씨방 같다. 14세기에 지어지기 시작한 고딕 양식의 슈테판 성당부터 19세기 후반 네오고딕 시청사까지 고딕, 로코코, 바로크, 네오고딕 양식이 도열해 있다. 그 자체로 시간사 박물관이다. 건물의 80% 이상이 100년 이상 되었으니, 링슈트라세의 안과 밖은 차원이 다르다. 밖이 현대라면 안은 근대, 절대왕정, 중세로 깊어진다.

중심가인 슈테판 광장 거리 풍경. 악사가 연주하고 있다.
순환도로 4차로를 서둘러 건너지 말고, 순환 트램에 올라 경계에서 그 속살을 일별한 뒤 진입하기를 요청하는 까닭은 여기에 있다. 빈에서 공간 이동은 시간 이동을 수반하고, 100년, 200년 전으로의 급격한 시간이동은 멀미를 동반할 수 있다. 여긴 공화정이야 왕조야? 순환노선은 고작 5㎞ 안팎이니 길어야 40분이다. 시간 걱정할 일이 아니다.

호이리거에서는
직접 경작한 포도로 해포도주를
전통음식과 함께 즐긴다

응시하면 알겠지만, 안과 밖은 먼저 속도에서 현저한 차이가 난다. 길 건너 1구역의 속도는 전근대다. 유모차를 끌거나 개를 데리고 산책하는 사람들, 혹은 구두부터 핸드백까지 색깔과 무늬를 코디한 멋쟁이 노인, 심지어 개들까지 소걸음이다. 자동차도 행인이 건널 조짐만 보이면 일찌감치 멈춰서 기다린다. 합스부르크 왕조 시절의 케른트너 거리를 오가는 마차에 맞춰져 있다. 공간은 시간을 그렇게 규정한다. 빈 대학에서 강의했던 아인슈타인이 시간과 공간의 상호의존성을 간파할 수 있었던 것은 우연이 아니다.

빈에서 시간은 공간에 머물며, 공간은 시간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생명을 얻는다. 신성로마제국의 궁전 호프부르크에 딸린 수백년 전 마구간은 지금 근대의 탐욕과 광기를 비판한 에곤 실레 등 아르누보의 보금자리가 되었다. 황제가 집무했던 곳은 유럽연합과 오스트리아 정부의 행정청이 들어가 있고, 가장 오래된 건물은 역사적 시간을 담아두는 국립도서관으로 쓰인다. 정원이 유럽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쇤브룬 궁전의 별채는 장기투숙용 호텔로 이용되고 있으며, 아름다운 경관이라는 뜻의 벨베데레 궁전은 원 소유자 오이겐 왕자의 이름보다는 구스타프 클림트의 걸작 <키스>로 더 유명하다. 왕이 후원을 감상하던 곳이었을 법한 방에는 고뇌하는 지식인, 하층민들의 비참, 죽음의 몰골을 보여주는 에곤 실레의 그림이 전시되어 있다. 시간은 이렇게 공간의 성격을 바꾸어 놓았다. 왕가의 화려한 처소는 지배층의 허위의식과 탐욕을 고발하는 곳이 되었다.

슈테판 광장에 있는 군밤가게.
그러나 두 요소는 충돌하지 않는다. 어색하지도 않다. 300여년이 흐른 카를 킨스키 백작의 저택 안에선 지금도 그때의 음악회와 무도회가 이어진다. 10m 앞에서 실내악을 연주하고, 왈츠를 추는 사람들과 호흡하다 보면 100년, 200년 전을 넘나드는 건 순식간이다. 아이젠슈타트에 있는 에스터하지 궁전의 주인공은 에스터하지 가문이 아니라 궁정 악사였던 하이든이다. 주인의 흔적은 유품으로만 남아 있고, 살아서 숨쉬고 노래하고 춤추는 것은 하이든이다. 1760년대 파리에서 수입했다는 괘종시계의 바늘은 지금도 그 시절을 향해 거꾸로 돌아간다.

시간이 소걸음으로 가도 황혼은 깔리는 법. 공간을 따라가는 시간여행이 아무리 신기해도, 해 질 무렵엔 그 어느 공간 혹은 시간에 정주하고 싶다. 그렇다면 호이리거를 찾아갈 일이다. 직접 경작한 포도로 담근 해포도주를 슈니첼 등 전통음식과 함께 제공하는 포도농원이다. 해포도주가 있는 곳엔 소나무 가지를 입구에 걸쳐놓았으니 찾기 어렵지 않다. 특히 베토벤이 머물렀던 그린칭 마을은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음식점 호이리거 내부.
통나무 식탁과 의자에 앉아 각종 빵과 살라미, 슈니첼 등 전통음식과 함께 해포도주를 마시다 보면, 전통악단이 테이블 사이를 누비며 왈츠나 포크송을 들려준다. 100~400년 전 빈 농가의 작은 축제가 그랬을까. 350여년 된 헹글 가문의 레스토랑 대들보엔 1683년 새긴 이런 글귀가 상량문을 대신한다. “여기에서 한 평등하고 자유로운 사람이 먹다.”

밤이 깊다. 중앙묘지의 기억을 더듬는다. 산 자와 죽은 자가 만나고 대화하는 곳. 살아있는 사람 170만명에 묻힌 자 300여만명인 곳이 빈이다. 누구나 그곳에 묻힌다. 주검엔 차별이 없다. 핍박당했던 유대인, 무슬림을 위한 묘지가 특별구역으로 지정돼 있다. 화해와 용서에 대한 마음이 간절하다. 11월2일은 모든 영혼의 날. 산 자와 죽은 자가 이 아름다운 곳에서 해후하고 즐긴다.

11구역은 음악가 묘지. 슈트라우스 부자가 있고, 베토벤이 잠들어 있다. 슈베르트는 생전의 소원대로 베토벤 곁에 누웠다. 주검을 찾지 못한 모차르트는 묘석으로만 남아 있다. 괴테는 이런 헌사를 남겼다. ‘천사, 세상에 음악을 주고 하늘로 날아간 이여.’ 빈은 시간을 넘어 그렇게 아름답게만 기억되길 꿈꾼다.

travel tip

빈 카드 18.50유로로 사흘 동안 15살 미만의 자녀와 함께 버스·전차·지하철을 이용할 수 있다. 210곳 이상의 박물관·극장·커피숍·레스토랑에서 할인 혜택도 받을 수 있다.

카페 빈 문화와 지식의 요람이 카페다. 작가 슈니츨러, 호프만스탈은 물론 러시아 혁명가 트로츠키도 고객이었던 카페 첸트랄, 작곡가 프란츠 레하르가 찾던 카페 슈페를, 음악가 구스타프 말러의 단골 카페 임페리알, 화가 구스타프 클림트, 작곡가 알반 베르크가 즐겨 찾던 카페 무제움 등이 있다. 1873년 프란츠 란트만이 시청사 앞 왕립극장 옆에 연 카페 란트만은 극작가 페터 알텐베르크, 심리학자 지그문트 프로이트, 힐러리 클린턴, 폴 매카트니 등이 즐겨 찾던 명소다. 시청사의 음악필름페스티벌이 열리는 여름밤, 노천카페에서 마시는 커피나 맥주 한잔은 빈 최고의 호사다.

음식점 그린칭은 마을 전체가 포도농장과 호이리거(해포도로 만든 와인 또는 그 와인을 파는 집)로 유명하다. 세계문화유산 지정을 추진할 정도로 유서가 깊다. 생태적 삶과 전통을 존중하는 이들에겐 명예주민증도 수여한다. 바흐 헹글(43 1 320 2439). 라트슈트라세에는 400년 전통의 볼프(43 1 440 3727)가 있다. 빈엔 성공한 한식당도 있다. 김치(43 1 713 3734) 아카키고(43 1512 9775) 이가(43 1 403 4603).


빈=글·사진 곽병찬 논설위원 chankb@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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