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8.07.02 11:12
수정 : 2008.07.02 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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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이트 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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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인야화] C.H.베레스 리슬링 2006 임펄스
속을 알 수 없는 억척같은 여인의 향
수확 시기 따라 맛 다른 변신의 귀재
와인전문가 S가 자신이 가져온 화이트 와인 'C.H. 베레스 리슬링 2006 임펄스'(C.H. BERRES RIESLING 2006 iMPULSE)를 얼음이 가득 든 통 안에 담갔다. S는 "화이트 와인엔 탄닌이 거의 없다"며 "얼음통에 담가 마시면 더 맛이 있다"고 말했다. 리슬링은 포도품종의 이름이다. 같은 화이트 와인인 '소비뇽 블랑'과 맛이 어떻게 다를지 자못 궁금했다.
S 는 "화이트 와인을 감별하는 데는 신맛의 정도가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산도가 높은 것이 좋은 화이트 와인이라는 것. 물론 향도 맛만큼 중요하다. 와인 맛을 조금이라도 더 잘 느낄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잔의 모양도 레드 와인용과 화이트 와인용이 각각 다르다고 한다. 화이트 와인 잔은 볼이 좁고, 레드 와인 잔은 상대적으로 넓다.
"화이트 와인 잔은 공기와 접하는 면이 작지요. 공기와 많이 접할수록 산화가 빨리 진행되어 향이 달아나기 때문입니다. 넓은 레드 잔은 화이트 잔보다 첫맛이 입안에 닿는 영역이 넓지요. 와인 잔으로 유명한 리델사는 포도 품종에 따라 잔을 개발합니다. 와인 잔에도 과학이 담겨 있는 셈이지요."
포도 품종 따라 ‘제맛’ 위해 잔 모양도 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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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이트 와인 잔은 레드 와인 잔보다 볼이 상대적으로 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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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가워진 리슬링 와인을 한 잔 마셨다. 같은 화이트 와인이지만 좀 전에 마셨던 소비뇽 블랑과는 완전히 다른 향과 맛이다.
- 소비뇽 블랑은 알프스 소녀 하이디 같은 옷을 입고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푸른 들판을 뛰어다니고 있는 처녀 같고, 리슬링은 삶에 집착하면서 끈끈하게 삶을 지탱해가는, 속을 알 수 없는 여인 같아요.
= 사람마다 맛에 대해 느끼는 것은 다르지만 독일 리슬링의 맛을 두고 '첫사랑의 와인'이라고 합니다. 첫맛은 꿀처럼 달지만 끝맛은 쓸쓸하기 그지없다고들 하죠.
- 마지막 끝 맛에 제가 느끼는 허무감이 그것이군요. 하지만 인생의 열정이 느껴져서 리슬링 더 좋네요. 저는.
툭 터진 와인바 밖으로 시커먼 구름이 몰려온다. 어느덧 오후의 창살이 노란 저녁 햇빛으로 변했다. 다시 한 모금 목을 적셨다.
달콤하다. 세포가 톡톡 튀어나올 만큼 달콤하다. 그의 말처럼 첫사랑의 파르르한 떨림과 흥분, 불편한 혼돈이 내 안 깊숙이 전해져 오는 듯하다.
독일은 냉랭한 기온 때문에 산도가 뛰어난 화이트 와인의 생산지로 유명하다. 향도 우수한 평가를 받는다. 대표적인 품종이 리슬링이다. 우수한 신맛과 단맛을 가진 리슬링은 와인 초보자나 전문가 모두 좋아하는 와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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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이트 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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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매가 작은 편인 리슬링은 독일 모젤강이나 라인강 지역에 많이 자라고 10월에서 11월까지 익혀 늦게 수확한다. 풍부한 과실의 향, 하늘이 내려준 신맛과 사람이 익힌 단맛이 적절히 어우러진다. 단맛은 독일 와인에서 중요하다. 독일은 와인 등급을 정할 때 당도를 기준으로 한다.
"리슬링은 변신의 귀재입니다. 포도 수확을 언제 하느냐에 따라 가벼운 와인, 드라이한 와인, 아이스 와인으로 변합니다. 정말 좋은 리슬링은 휘발유 같은 냄새가 납니다. 역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향이 그만큼 강합니다."
행여 스쳐가는 얼굴이라도 볼 수 있을까 서성이는 마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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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 베레스 리슬링 2006 임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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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가져온 'C.H. 베레스 리슬링 2006 임펄스'는 목 부문이 길고 잘록하다. 짙은 초록색 병에 라벨은 샤갈의 그림을 닮았다. 대부분의 독일 와인은 이런 병 모양이라고 한다. 병 아래에 '모젤-자르-루베르'라고 적혀 있다. 프랑스에서 시작하는 모젤강을 끼고 있는 모젤 지역의 포도 농장은 강 양쪽 경사가 심한 곳에 만들어져 있다. 그 정도가 심해서 농부들이 로프로 몸을 고정시켜 놓고 작업할 정도라고 한다. 초록색 병은 모젤 와인의 특징이다. 다른 지역은 갈색이라고 한다. 자르강, 루베르강 주변지역까지 포함하는 '모젤-자르-루베르' 벨트는 독일의 대표적인 화이트 와인산지다.
= 이 와인은 우리나라에는 없습니다. 몇 달전 독일상공회의소 주최 독일와인박람회에 참석했다가 뒤풀이에서 만난 독일의 한 농부가 제게 준 겁니다.
- (와!) 사연이 궁금하네요.
= 그 독일 농부는 평생 공부만 한 듯한 얼굴인데 서울처럼 큰 도시는 처음이라고 하더군요. 순박한 사람이었습니다. 외국의 와이너리 주인들 만나면 대부분 순박한 농부들이 많아요.
오늘 마신 와인 이름 앞의 'C.H. 베레스'가 바로 생산자 이름으로 추정된다. 화가 샤갈의 그림 같은 와인의 라벨은 그가 "샤갈을 추구하기" 때문이라고 S가 말한다.
리슬링은 와인 초보자에게 잘 어울린다고 한다. 와인을 마시는 동안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겨울 경춘선처럼 쓸쓸한 첫사랑의 끝 맛이 느껴지더라도, 창 틈 사이로 낮은 기침 소리라도 들릴세라, 아니면 행여 골목 전봇대에서 스쳐가는 얼굴이라도 한 뼘 볼 수 있을까 싶어 서성이는 첫사랑의 첫맛을 위해 리슬링을 잔에 붓는다.
글 사진 박미향 기자 m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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