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수교 밑을 흐르는 청계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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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석같이 박혀 있는 칼국숫집이며 시장이며…
그러다 강추위 몰아친 밤, 수변을 슬며시 내달렸다
참호속인 듯 안온했는데 그만 순찰대원이… 그런데 그렇지 않다. 우리 기억 속에 아직도 서울의 중심은 강북에 있고 우리는 멀리 떠나와 있다. 서울 하면 광화문과 종로다. 거길 중심으로 신촌과 이태원, 삼청동, 강남이 머릿속에 재배치된다. 내게는 청계천이다. 나는 서울 직장생활의 마감을 기념하기 위해 마지막 2개월 간 청계천을 작심하고 다녔다. <청계천에서 뭘하지?>라는 책을 들고서 종로 3가 찬양집의 칼국수부터 청계천 8가 대중옥의 해장국까지 두루 섭렵했다. 자전거로도 가장 많이 다닌 구간이었다. 청계천 자체는 아직 주위 경관과 어울리지 못하다. 물과 기름과 같다. 정원처럼 잘 정돈된 인공하천에 서울에서 보기 힘든 깨끗한 물이 흐르지만 천변 풍경은 어수선하고 시끄럽다. 따라 걷다가 천 밖으로 올라오면 주위 건물들이 살풍경해 보인다. 태평로에서 청계천 2가 삼일교까지는 이런 하천과는 안 어울리는, 초고층인 빌딩들이 양쪽으로 즐비하고 삼일교 동쪽으로는 퇴색한 슬라브 건물들과 다닥다닥 붙은 상점들이 옹색해 보인다. 복원된 청계천과 주위 환경이 팀웍을 이루려면 시간이 좀 필요한 듯하다. 만약 청계천 근처에 타워 팰리스의 부자들이 살았다면 프랑스 센 강변급의 카페 거리가 금방 생겨나면서 청계천의 미관을 받쳐줬을 텐데. 청계천과 주위 거리가 도로로 단절돼 있어 그것도 힘들지 모르지만. 청계천로로 출퇴근할 때는 청계천을 보지 못했다. 청계천로는 아직도 버스, 승용차, 오토바이에서부터 리어카, 지게까지 다니는 다목적용 도로다. 만약 우마차가 다녀도 으레 그러려니 했을 것이다. 자전거 타면서 한 눈 팔 수 없다. 상점 앞에 불법 정차한 차들은 길의 폭을 좁히고 청계천 위에 설치된 22개의 다리로부터 교통의 흐름이 수시로 합류하고 있어 순간적 혼돈이 자주 발생한다.
사고의 위험을 느껴도 사고가 자주 일어나지는 않는다. 보이지 않는 어떤 합의가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신호등이나 도로교통법의 준수가 아니다. 그것은 서로를 의식해야 한다는 것이다. 서로가 서로를 보고 있다는 전제 하에서 사람들은 움직인다. 보행자들이 떼를 지어 무단횡단하고 오토바이들이 역주행한다. 이것은 청계천 시장의 논리와 일맥상통한다. 시장의 논리는 원칙의 준수가 아니라 협상이다. 그 결과 가격은 변동한다. 청계천로의 교통은 힘의 행사와 타협의 결과로 유지된다. 가장 무질서한 질서가 잘 유지되는 곳. 나도 가장 ‘유연하게’ 청계천로를 이용한 사람들 중 한 명이었다고 고백한다. 이 말뜻은 신호등을 무시하고 달리곤 했다는 뜻이다. 교통의 흐름을 정확히 이해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숙련된 테크닉이라고 자부하다가 어느 날 나를 알아본 일조각의 김범우씨한테 들킨 뒤로는 되도록 자제하기는 했다. 조선시대 생활천-명당수 논쟁 청계천 자체는 두 번의 경험이 있다. 지난해 2월 강추위가 몰아친 날 슬그머니 청계천으로 내려가 천변으로 자전거 타고 퇴근한 적이 있다. 중간에 포석이 울퉁불퉁 튀어나와 있어 자전거가 몹시 흔들렸지만 그래도 밤 11시 반께 아무도 없는 청계천을 혼자 달리는 기분이 삼삼했다. 자전거 통행 금지라는 서울시의 명령을 거스르는 것이어서 더 은밀한 느낌이었다. 원래 내가 꿈꾸던 청계천 통근 라이딩은 바로 이렇게 수변을 달리는 것이었다. 마장동 우시장 부근만 지나면 자전거 진입이 합법화되고 중랑천으로 이어지는데 거기 못 미처 공익요원 두 명과 나이 드신 순찰대원 한 명에게 차례로 걸려 야단을 맞았다. 여기서 멈출 내가 아니다. 몇 일 뒤 밤 12시에 재시도했다. 바람 부는 날 청계천은 참호 속을 달리는 듯 안온하구나 하면서 달리는데 순찰대원에게 또다시 걸렸다. 이 정도의 경비 태세라면 거의 38선 철책선 수준이다. 그 뒤로는 수변을 침범한 적이 없다. 청계천로와 청계천이 아직 합일되지는 않았지만 각자는 괜찮다. 청계천로 주변의 시장은 언제나 북적댄다. 청계천 주위에는 세종로나 광화문 쪽에 없는 오랜 맛집들이 보석처럼 군데군데 박혀있다. 여긴 사람들의 거리인 것이다. 1905년에 한성부로부터 허가 받아 세워진 최초의 근대 시장인 광장시장의 좌판에는 아직도 순대와 파전, 오징어, 생선, 심지어 갈비까지 구워지고 있다. 마장동 우시장에서부터 보면 서쪽으로 황학동의 벼룩시장, 의류와 신발의 동평화, 청평화시장, 혼수의 동대문시장, 인쇄와 포장, 제빵용품의 방산시장, 포목과 주단의 광장시장이 청계천로 양쪽으로 펼쳐진다. 청계천로 주변 시장의 역사는 조선 태종 때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 때부터 청계천은 생활하수가 배출되는 하수도로 기능했다. 박태원의 <천변풍경>을 읽어보면 1930년대 후반에는 천변에 빨래터도 있었던 모양인데 그 때가 예외인 듯하다. 아니면 덜 깨끗한 물로라도 빨래를 했던 것인지. 청계천은 원래 한양으로의 도읍 이전에 기여한 창건공신이다. 풍수지리상 배산임수의 명당수였다. 명당수는 깨끗해야 한다. 그러나 인구가 늘면서 금방 오염됐다. 더구나 토사가 쌓여 자주 범람해 집들이 떠내려가자 태종 때 처음으로 강바닥을 깊게 하고 둑을 쌓는 공사를 한 뒤 이 하천을 개천(開川)이라고 불렀다. 일부러 파낸 인공하천이라는 보통명사로서의 개천은 그 뒤 고유명사로 굳어졌다. 청계천이라는 이름은 일제 때부터 붙었다. 대형시장 진격 차단하는 세운상가 청계천의 역사에서 보면 가장 극적인 장면은 세종과 집현전 교리 어효첨의 상소를 통한 대화. 조광권 선생의 <청계천에서 역사와 정치를 본다>에 따르면 영의정 황희 우의정 신개 등은 백성들이 오물을 버리지 못하게 해서 청계천을 명당수로 깨끗이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깨끗이 유지할 필요성은 알겠는데 그 방안이 묘연했다. 어효첨은 풍수설이 중국의 ‘삼대(三代)’에 없었던 사설(邪說)이라면서 청계천을 생활하천으로 허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세종은 조상들도 신봉한 풍수설을 내치지 않으면서 청계천을 생활하천으로 인정하는 중용의 지혜를 발휘했다. 그 뒤로 청계천은 삶의 결과를 배출하는 통로가 됐다.
건축가 김수근이 설계한, 1967년 당시로는 기념비적인 작품 세운상가의 내부. 공유면적이 넓고 아래층까지 채광이 잘 되도록 가운데를 뻥 뚫어놓고 지붕을 유리로 처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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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사형선고 기다리는 불혹을 맞았다
욕망이 번창시킨 자리에 또 어떤 기념비적 건물 서려나 세운상가는 주위 건물들이 다 도로에 면해 있는데 혼자 삐딱하게 옆 모습으로 서 있다. 이 최초의 주상 복합 아파트는 종로에서부터 퇴계로까지 남북방향으로 세운상가, 대림상가, 삼풍상가, 신성상가(진양상가)로 이어진다. 남향의 한국 건축양식에서 이렇게 동과 서를 쳐다보면서 1㎞ 가량 늘어선 아파트는 드물다. 원래 4동의 상가가 모두 육교로 연결되도록 설계됐다고 한다. 어렸을 때 어디가 무슨 상가인지 항상 헤맸던 기억이 난다. 서울 도심에서 도로는 동서방향으로 넓고 남북으로는 좁다. 청계천의 진행방향을 따라 대로가, 청계천에 흘러들어오는 지류들을 따라서 남북으로 중로 또는 소로가 생겼기 때문이다. 대로를 따라 발달한 건물들이나 시장의 흐름에 또 다른 예외가 있다면 영화관들이다. 충무로의 대한극장에서 조금 서쪽으로 돈화문길이 북으로 올라가는데 이 길을 따라 명보, 서울, 피카디리, 단성사의 극장 건물들이 남북으로 발달해 있다. 세운상가는 돈화문길을 마주보고 있다. 돈화문길에서 영화를 보고 세운상가에서 보다 말초적인 ‘문화영화’를 구해 보고 자란 유하는 96년 김수영문학상에 빛나는 <세운상가 키드의 사랑3>을 썼고 <말죽거리 잔혹사>와 같은 성장영화를 감독, 헐리우드 키드로서의 꿈도 이뤘다. 그에게 세운상가는 “욕망의 이름으로 나를 찍어낸 곳”이며 자신의 “욕망이 세운상가를 번창시켰”으며 결국 “나는 부유하는 육체의 세운상가”라며 세운상가와 하나가 된다. 건축가 김수근씨는 자신이 설계한 이 작품이 이렇게 냉소적 허무주의의 대상으로 전락하기 전 이미 자신의 작품 연보에서 세운상가를 지웠다. 67년 건립 당시 현대성의 상징이었던 불운의 세운상가는 올해 불혹을 맞아 사형 선고를 기다리고 있다.
홍은택/〈아메리카 자전거 여행〉〈블루 아메리카를 찾아서〉의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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