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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진] 촌석(寸石) |
옛 여인네들이 장식용 노리개를 지니고 살았다면 옛날 문인들은 작은 수석 한 점을 가까이 할 줄 알았다. 자연을 음미하는 풍류의 멋과 함께 그것을 매만지며 생의 의미를 되새겼다. 그런데 손안에 넣고 다니다보니 덤으로 지압효과도 있었던 것이다. 그런 돌들은 크기가 콩알만한 두석(豆石)에서부터 손바닥 안에 안기는 장석(掌石)까지 다양했다. 그렇지만 주로 손가락 한마디 크기의 촌석(寸石)을 애용했다. 너무 작은 것은 빠뜨리기 쉽고 너무 크면 거추장스럽기 때문이다.
그런 촌석들은 종류도 다양했다. 하지만 기호에 따라 윤기 자르르한 오석(烏石)에서부터 더러는 문양이 아름다운 돌, 주름이 잡힌 돌들을 좋아했다. 그런 돌을 지니고 다니면서 때로는 독서를 하며 책장이나 붓글씨를 쓸 때 용지를 누르는 문진(文鎭)으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그런 옛 문인들을 흉내낸 것은 아니지만, 나도 촌석을 아낀다. 워낙에 수석을 빠진 때문이기도 하지만 돌을 만지노라면 마음이 안정되고 편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옛 문인들처럼 항상 촌석을 몸에 지니고 다닌다. 그러면서 처음 탐석하던 때의 기분을 떠올리기도 하고 돌의 가르침을 새기기도 한다. 내가 애석생활을 하면서 모은 수석은 산수경석에서부터 물형석, 그리고 문양석, 색채석등 다양하다. 그리고 크기별로도 애무석에서 두석까지 편차가 있다.
그 중에서도 애무석은 옛 문인들이 서재 가까이 두고 매만져오던 돌이기에 좋아한다. 그리고 촌석은 손쉽게 손안에 쥐고서 다닐 수 있어 아낀다. 이런 애석생활의 연조는 저 북송시대의 미원장(米元章)이나 역시 동시대를 산 소식(蘇軾)의 행적에서 드러나고 있다. 이들은 모두 집안에다 석가산을 만들어 놓고 즐겼다. 그리고 손에는 촌석을 놓지 않았다.
우리나라만 해도 애석의 역사는 그 면면히 유장하게 흐르고 있다. 퇴계 이황 선생은 특히 문양석을 즐겼다고 하고, 강진 땅으로 유배를 내려온 다산선생은 적적하면 인근의 강가로 탐석을 나가기도 했다고 전해온다. 그런가 하면 강희안 선생은 그가 쓴 양화소록에서 '괴석은 굳고 곧은 덕을 지니고 있어서 군자의 벗됨이 마땅하다'고 기술해 놓기도 했다.
내가 아끼는 애무석은 전남 완도산이다. 내가 직접 탐석한 것은 아니고 물물교환 형태로 가져오게 되었다. 어느 날, 수석을 좋아하는 아는 분이 집을 방문했다. 그는 소장석을 감상하다 말고 절단석 하나를 발견하고는 욕심을 내었다. 자기한테 괜찮은 거북이형 물형석이 있는데 그것과 바꾸자는 것이었다.
그러자 하고 가져오게 됐는데, 그는 그 돌을 물형석으로 본 모양이었지만 내가 보니 애무석으로 그만이었다. 수마가 된 오석에다 크기도 우람했던 것이다. 나는 이것을 현관 문 앞에 놓아두고 들고나며 늘 매만지고 있다. 그렇지만 촌석은 한 두개가 아니다. 열 개도 넘는다. 그 중에는 여수 외곽 소치에서 주은 포도 알 촌석을 비롯해, 외딴섬 사도에서 탐석한 기도하는 소녀상도 있다. 그리고 항구미라는 곳에서 주은 학이 양각된 돌도 있다.
나는 이 돌들을 그 날의 기분에 따라 손에 쥐어든다. 예컨대 단순히 손맛을 느끼고 싶으면 포도알 석을, 그 날의 흥취에 젖으면 학이 새져진 돌을, 그리고 누군가가 그리워지고 간구할 일이 있으면 기도하는 소녀상을 집어든 것이다.
한데, 이런 돌들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비록 부피는 작지만 어떤 일정한 법칙이 있음을 알게된다. 즉, 앞면과 뒷면, 그리고 위와 아래의 구분이 지어져 있는 것이다. 그리고 형태도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변화의 과정을 살필 수가 있다.
뿐만 아니라 이것을 들여다보노라면 자연의 기운이 느껴지고, 어떤 인연 같은 것도 느낄 수가 있다. 이 돌들이 어떻게 해서 나한데 까지 오게되었을까. 그 많은 돌 중에서 우연히 내 손에 들어온 것도 신기한데, 또 수 억 년 동안 닳고닳아 이런 형상이 지어진 것도 신비하기만 한 것이다.
어떤 마음에 이끌려 가져오게 된 것이라면 이는 필연적인 인연말고 설명하기 어렵다. 사람이 옷깃한번 스친 것도 억겁의 인연이 쌓인 결과라 하듯이 우연한 인연의 결과는 점지된 운명적 결과라고 밖에는 달리 설명이 아니 되기 때문이다.
나는 촌석을 매만지며 옛 선인들의 마음을 헤아려 보는 것이 마냥 기쁘다. 이런 촌석을 몸에 늘 지니고 살았던 분들은 마음도 무척 고결했을 것 같다. 욕심도 내려놓고 자연을 벗삼아 유유자적하는 삶을 살았을 것 같다. 그 만큼 세속에 물들지 않았으니 때로 일어나는 구름을, 한 방울의 이슬에서도 인생을 성찰했을 것 같다.
나는 수석을 알기 전에는 돌은 그저 돌인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그냥 돌로만 보이지 않는다. 무슨 도가 트여서 그런 게 아니고 자꾸만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 것이다. 제 살을 깎아내어 형상을 갖춘 모습이나, 손에 느껴지는 온기에서도 인연 이상의 그 무엇이 느껴지는 것이다.
이런 마력 때문일까, 해서 나는 쉬 지금처럼 돌을 지니고 다니는 버릇이 그칠 것 같지 않다. 어쩌면 운명의 순간에도 나의 손에는 이 작은 촌석 한 점이 쥐어야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 기사는 네티즌, 전문필자, 기자가 참여한 <필진네트워크> 기사로 한겨레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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