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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6.08.17 15:04 수정 : 2006.08.18 16:25

청계 고가도로의 흔적으로 청계천과 성북천이 만나는 지점에 있는 교각 3개를 남겨놓았다. 어떤 사람은 이것을 개발시대의 유적으로, 또는 청계천 복원사업의 상징물로 해석하겠지만 내게는 청계고가도로 위를 달리고 싶었던 꿈이 이뤄진 기념탑이다.

3월27일 ‘터널 첫통과’ 6월19일 ‘약수 고가 통과’ 한달 만에 터널급 라이더 승급 뿌듯한데
넉달여 만에 최고 경지 고가도로급 오르다니 여러부분, 저 검은띠 매어 주세요
터널이 무서운 이유가 인공 어둠속 좁은 곳에서 오는 협착감 때문이라면


홍은택의 ‘서울 자전거 여행’ ⑦

나는 차도급 라이더가 된 지 얼마 안 돼 바로 터널급 라이더로 올라섰다. 내 자전거 일지를 보면 3월27일 ‘터널 첫 통과’라고 기록돼 있다. 일기에 간단하게, 아니, 거의 적는 게 없는 나로서는 ‘터널을 통과하는 위업을 달성하다’고 표현한 것과 같다.

사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집에서 나와 첫번째 신호등에서 좌회전하자마자 일원터널이 버티고 있기 때문이다. 안장에 올라타 불과 200m도 못 가서 인도로 새는 것은 차도급의 스타일을 구기는 일이다.

그런데 다행히 일원터널은 터널급 라이더 양성 기초과정이 있다면 일부러라도 설치할 만큼 좋은 연습용 터널이다. 터널 안이 넓고 쌍굴이어서 공기도 그렇게 나쁘지 않고 무엇보다 260m로 짧다. 터널은 한 지역의 생태계를 바꿔버리는 폭발적인 파괴력이 있다. 내가 사는 수서는 대모산 산자락에 숨은 동리여서 한국 전쟁 때도 인민군이 안 들어왔다고 하는데 일원터널이 뚫림으로써 천년의 고립에서 벗어나 강남에 복속됐다. 그 배후에는 6공화국의 2백만호 주택 건설이 있었다는 점에서 일원터널을 뚫고 간 것은 정치경제적 동력이었다고 할 수 있다.

내게는 다른 의미가 있다. 아침에는 여행을 떠나는 첫 관문, 밤에는 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귀환하는 마지막 관문이 된다. ‘통과의례’의 이중적인 통로인 것이다. 살짝 북쪽으로 내리막이어서 아침에는 내달릴 수 있고 밤에는 결승점에 골인하는 마라토너의 기분을 느낄 수 있다. 귀가하기 위해서 이렇게 안간힘을 쓰는 가장은 많지 않을 것이다.

내부순환도로 하루만 내준다면


동호대교를 타고 광화문으로 진입하는 코스에는 옥수와 금호터널 두 개가 더 있다. 금호터널을 빠져나오면 갑자기 도심이다. 약수 고가도로가 있고 너머로 장충체육관과 한 백만년 전부터 그 자리에 있는 것 같은 태극당 제과점이 있다. 분명 어릴 적 이곳에 태극당과 함께 무슨 피부과가 있었는데 기억이 안 난다. 금호터널은 가슴이 뻥 뚫리는 것처럼 시원하게 강북을 열어보인다.

터널에도 서열이 있어 내가 통과하는 터널 3개 모두 1종 터널이다. 1종 터널이 되려면 길이가 1천m가 넘거나 폭이 편도 3차선 이상이어야 한다. 3개의 터널은 길이는 짧지만 폭이 넓어 1종들이 됐다. 그렇다고 내가 1종 터널급 라이더라고 생각지 않는다. 1천m가 넘는 남산 터널들과 같은 것들을 아직 시도조차 해보지 못했다.

서울에서 가장 긴 터널은 남산 터널들이 아니라 내부순환로에 있는 홍지문 터널(1890m)이다. 이 터널을 들어갈 때는 서대문구(홍은동)인데 나올 때는 종로구(평창동)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정릉터널로 이어지는데 이것 역시 1650m로 서울에서 두번째로 길다. 이 터널들을 연속 통과하는 사람에 한해 최상급 터널 라이더 또는 터널 라이더 지존의 칭호를 줄 수 있을 것 같다.

근데 갈 수는 없다. 나는 내부순환로만큼 자전거 타면서 강북을 완상할 수 있는 도로가 없다고 생각한다. 총 연장 40㎞나 된다. 서울의 아파트들은 저마다 파스텔톤의 옷을 입고 있어 전체적으로 화사함을 풍긴다. 빨간 아파트나 파란 아파트도 한 두 채 정도는 있어도 무방할 것 같다. 그 아파트들이 아름다운 산들에 둘러싸여 있는 모습을 살펴보고 싶은데 내부순환도로는 자동차 전용도로여서 라이더로서는 침만 삼키고 손가락만 빨아야 한다. 내 꿈은 꼭 한번만이라도 차 안 다니는 날로 해줘서 내부순환로를 타고 서울을 관통해 보는 것이다. 많은 라이더들이 동시에 탄다면 장관일 것이고 사진을 찍어서 웹사이트에 띄우면 외국인 관광객들이 마구 서울로 몰려들지 않을까. 서울시청에서도 혹시 이 글 보시는 분 계신가요?

내가 달리기를 열심히 하던 시절, 나는 청계고가도로 위를 달려서 출근하는 꿈을 꿨다. 가장 도시적인 달리기는 숲 속을 달리는 게 아니라 고가도로의 아스팔트를 질주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 꿈이 이뤄졌는데 그 사연이 가슴 아프다. 서울시는 철거되기 직전 청계고가도로에서 단축 마라톤 대회를 개최했다. 그날 비가 내렸다. 흠뻑 젖어 달리는데 발 아래로 고가도로가 출렁거린다고 느꼈다. 높은 건물들이 낮아보이고 때로는 옥상도 훤히 들여다 보였다. 그리고 광화문 동아일보 신 사옥 앞에 있는 결승선. 고가도로를 치달아 내려가면서 나는 왠지 내 등 뒤로 청계고가도로가 차례로 허물어지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나는 미래를 향해 달리고 고가도로는 역사 저편으로 퇴장한다. 결국 운명을 다하는 순간에서야 청계고가도로는 나를 받아들인 것이다. 나는 지금도 청계천 위 지금은 허공이 된 고가도로를 달리고 있는 모습을 되새겨보곤 한다.

아직도 청계고가 허공 달리는 꿈

성수대교로 진입하는 남단 고가차도가 은하철도999처럼 휘돌아간다. 도시 라이더를 유혹하는 콘크리트 조형물이다.
터널이 무서운 또 다른 이유는 가슴을 조여오는 협착감에 있다. 인도로 올라설 가능성이 쇠울타리로 차단돼 있어 유사시 피할 곳이 없다. 인공의 어둠은 좁은 공간을 더욱 좁힌다. 그와 정반대로 탁 트여 있는데 오히려 협착감을 주는 도시의 구성요소가 있다. 한강 다리다.

그것은, 아니, 막막함이 맞는 표현일 것이다. 가도가도 끝이 없는 길. 나는 처음에 자전거로 다리의 차도를 건너는 게 불법인 줄 알았다. 그런데 그런 규정이 없고 차도와 인도가 있을 경우 자전거는 차도로 가야 한다는 규정을 한강 다리라고 해서 안 따를 이유가 없다는 걸 알고 한동안 망설였다. 그러다 중앙대학교에 갔다가 제 1 한강대교를 타고 시내로 들어오는 길에 결단을 내렸다.

다리 주행이 일반 도로 주행과 다른 점은 추락의 공포에 있다. 차에 받혀서 몇십m 물 아래로 처박히는 악몽. 그런데 물 속으로 떨어지려면 상당한 노력과 기술이 따라줘야 한다. 차도와 인도 사이에 있는 쇠울타리를 훌쩍 뛰어넘을 정도로 받혀야 하고 이어서 이중 점프로 한강 다리 난간을 뛰어 넘어야 물 속에 빠질 수 있다. 너무 위로 받히면 다리의 아치에 튕겨져 나올 수도 있다. 그렇게 물에 빠지기 어렵다면 일반 도로 주행과 다를 바 없다는 뜻인데 이것은 어디까지나 책상 앞에서 생각할 때의 경우고 실제 물을 보면 광장공포증과 같은 아찔한 느낌에 사로잡히게 된다. 다리 양쪽 끝에는 강변도로나 올림픽대로로 내려가기 위해 차선을 바꾸는 자동차들에 걸리적거리고.

그러나 가장 큰 위협은 한강 다리에 있지 않고 다리가 끝날 때부터 시작된다. 한강 다리가 끝나면 다리의 차도보다 더 넓은 도로가 기다리고 있다. 차선을 여러 차례 오른쪽으로 변경해야 도로의 가장자리 차선에 이를 수 있다. 자동차들은 ‘저기 자전거가 가는데 우리 모두 조심해서 운전하자’고 서행할 리가 없다. 정확히 먼바다까지 헤엄쳐 갔다가 물가로 돌아오는 것과 똑 같다. 물살은 종종 내 편이 아니다. 나를 덮칠 듯이 달려는 자동차들의 흐름-그것도 내 양 옆 차선에서 두 갈래로 몰아닥친다-을 요리조리 피해 길가에 도착하면 그냥 안장에 내려서 자전거를 밀고 가고 싶은 심정이다.

교통 물살 내편 아니지만 그래도

그래도 탄다. 먼 바다를 다녀오면 더 먼 바다로 가고 싶듯이 그게 자전거의 매력이고, 내 몸으로 교통의 흐름을 타고 때로는 뚫고 가는 게 재미 있다. 그래서 차례로 한강 다리를 건너보고 있는데 지금까지 영동대교, 한강대교, 마포대교, 동호대교 네 다리를 차도로 건넜다.

차선을 바꾸는 게 역시 난이도 높은 기술이다. 그래서 나는 다차선급 라이더를 한강다리급보다 높게 친다. 장충체육관에서 동대문을 향해 우회전을 하면 동대문 운동장 앞길은 왕복 8차선으로 넓어진다. 여기서 청계천로로 좌회전하려면 차선을 세 번 옮겨야 한다. 도로교통법에 따르면 차선 변경시 신호를 보내야 한다. 깜박이등이 없는 라이더의 경우 수신호를 해야 하는데 위험한 일이다. 신호를 보냈다고 해서 모든 운전자들이 틈을 내주리라고 생각하기 어렵고 손을 들다가 균형을 잃을 수 있다.

가장 보편적인 방법은 차선을 변경하지 않는 것이다. 교차로를 직진해서 건넌 뒤 90도로 자전거를 돌려 파란 신호등을 기다렸다가 건너는 것이다. 안전한 방법이어서 누구에게나 권하고 있다. 하지만 정작 나는 종종 그렇게 안 한다. 자동차랑 맞먹고 싶은 도시 라이더의 자만심 때문이다. 특히 빨간 신호등에 막혀 차들이 서 있을 경우, 이리저리 헤집고 가서 ‘딸딸이’들과 나란히 차량 행렬의 선두를 차지하고 직진과 좌회전 동시 신호가 켜지면 재빨리 좌회전해버리는 것이다. (오토바이를 ‘딸딸이’라고 택시운전사들은 부른다) 이 때 자전거의 위치는 반드시 1차선에 있는 자동차의 좌측이어야 한다. 직진하는 차량의 통행을 방해하지 않고 그래서 충돌의 소지를 줄일 수 있다.

이 정도로 다차선급 라이더가 됐다고는 할 수 없다. 다차선급은 차들이 주행하는 흐름 속에서도 차선을 바꿀 수 있는 담력과 기량을 갖고 있어야 한다. 나는 차들이 움직일 때 수신호로 좌회전하겠다는 의사를 표현한 뒤 차례로 차선을 바꿔 좌회전에 성공한 적은 한번밖에 없다. 워싱턴 DC에서 본 메신저 보이들은 자유자재로 차선을 바꾼다.

도시 라이더의 최고 경지인 고가도로급은 기량보다는 정신력의 문제다. 이미 앞의 단계들을 거쳤으면 기량은 충분하다. 고가도로가 다리, 터널과 다른 점은 인도가 없다는 것이다. 정말 피할 곳이 없다. 추락하면 물이 아니라 아스팔트 바닥이어서 훨씬 아플 것 같다. 진입할 때의 어려움도 있다. 고가도로로 진입하려면 차선을 여러 차레 왼쪽으로 변경해야 한다. 고가도로를 통과한 뒤에는 다시 우측 차선으로 붙기 위해 차선을 오른쪽으로 바꿔야 한다. 그러니 고가도로까지 주행을 마친 라이더들에게 검은 띠라도 줘야 한다는 얘기다.

홍은택/오마이뉴스 인터내셔널 편집국장
그런데 한강다리나 터널 심지어 일반 도로에 이르기까지 차도라고 하면 피할 데가 없는 것은 마찬가지다. 사고는 순식간에 일어나는 것이어서 그 위험을 감지했다고 해서 인도로 자전거를 끌고 올라갈 시간은 없다. 심리적인 문제지, 실제 고가도로가 더 위험한 것은 아니다. 낭떠러지로 떨어지고 싶지 않은 심정은 운전자들도 마찬가지여서 대체로 우측 가장자리보다는 차선 왼쪽으로 운전하는 경향이 있다. 라이더들에게 내주는 우측 공간이 커진다는 뜻이다. 나는 자전거 통근 4개월20여일만인 6월19일 처음으로 퇴근길에 약수 고가도로를 넘었다. 이건 아메리카 자전거여행에서 높이 3463m의 후지어 패스를 넘은 것과 마찬가지다. 아울러 내친 김에 금호와 옥수 터널, 동호대교까지 다 차도로 건너버렸다. 도시 라이더양성 과정을 월반해서 통과한 기분이었다.

홍은택/오마이뉴스 인터내셔널 편집국장 hongdongzi@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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