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6.08.16 18:38
수정 : 2006.09.05 15:34
비긋다 마주친, 변함없는 맛의 고향
갑자기 비가 내렸다. 2004년 어느 여름날, 압구정동의 골목길을 걷고 있던 나와 ㅂ와 ㄱ은 갑작스런 비를 피하기 위해 주변을 둘러봤지만 어디에도 숨을 곳이 없었다. 그냥 맞으면서 가요, 대머리 된다는데 ……, 부슬부슬 잘도 내리네, 벌써 장마철인가?, 이런 대화를 주고받다가 그냥 걷기로 했다. 생각보다는 보슬비였고, 함께 걷다 보니 제법 운치도 있었다. 밤 9시 무렵이어서 하늘은 어두웠지만 상가의 불빛들이 모두 길가에 나와 빗줄기를 세고 있었다.
그렇게 골목길을 걷다가 개화옥이라는 식당을 발견했다. “여기 이런 식당이 있었네?” ㄱ이 말했다. “그러게, 처음 보는 식당인데 생긴 건 무지 오래돼 보이네?” 내가 대답했다. “야, 출출한데 들어가서 뭐라도 좀 먹고 가자.” 1시간 전에 공깃밥 한 그릇 이상을 비운 ㅂ이 우리를 꼬드겼다. 아마도 그는 ‘김치말이 국수’라는 메뉴를 보고 이성을 잃었을 것이다. 새로운 면요리가 있다면 지금까지 먹은 걸 모두 토해내고서라도 식탁 앞으로 덤벼드는 사람이 그였다. 우리는 비도 피할 겸 개화옥으로 들어갔다.
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그림 한 점을 보았다. 하얀 눈밭 위에 집 한 채 서 있는 그림이었다. 그림 속의 집에서는 불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그림을 보는 순간, 마음속 어딘가에서 후끈한 열기가 올라왔다. 그게 가게의 따뜻한 기운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그 그림 때문이었는지는 정확하지 않지만 젖었던 옷이 급속히 건조되는 느낌이었다. 어쩌면 그건 고향의 느낌인지도 몰랐다.
우리는 김치말이 국수를 먹었다. 먹으면서 우리는 거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면의 상태는 여태껏 먹어본 국수 중 거의 최고였고, 국물 역시 정성을 쏟은 흔적이 역력했다. 시원했고, 아련했고, 구수했고, 정겨웠고, 감미로웠다. 잠깐 어머니를 생각했던 것 같기도 하다. 우리는 국수를 다 먹고 주인장이 내주는 에스프레소를 마셨다. 창밖에는 여전히 보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가게 앞마당에는 화분 몇 개와 나무 의자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그때 개화옥은 문을 연지 한 달이 지났을 즈음이었다.
그 후 자주 개화옥을 들렀다. 몇 번을 가고 나서야 그 집의 대표 음식이 불고기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간판에도 ‘불고기집 개화옥’이라고 적혀 있었다. 불고기 맛 역시 대단했다. (취향의 문제이고, 약간 다른 스타일이긴 하지만) 불고기로는 가장 유명하다는 우래옥보다도 더 낫게 느껴졌다. 양도 더 많다. 내가 개화옥의 불고기를 높게 치는 이유는 고기의 질과 양념 때문이다. 단맛은 거의 없고, 약간 심심한 듯한 불고기의 맛은 먹을수록 입안에 사무친다. 고기의 숨결이 느껴질 정도다.
그리고 2년이 넘게 흘렀다. 아무것도 변한 게 없다. 변하지 않아서 좋다. 개화옥에 가서 처음 자리를 잡고 앉았을 때 고구마와 옥수수와 마늘이 놋그릇에 나왔다. 지금도 여전하다. 똑같은 양의 고구마와 옥수수와 마늘이 놋그릇에 나온다. 시간이 흐르지 않은 것 같다. 김치말이 국수와 불고기 맛 역시 똑같다. 메뉴가 조금 늘었고 가게가 조금 넓어졌을 뿐이다.
내 식당도 아닌데 개화옥만 생각하면 자랑스럽다. 힘든 시간을 이기고 살아남은 식당이 자랑스럽고, 언제나 똑같은 맛의 음식이 자랑스럽고, 불고기 맛을 제대로 내기 위해 방짜를 직접 주문 제작한 주인장이 자랑스럽다. 그건 어쩌면 비가 부슬부슬 내리던 2004년 여름 그날의 기억을 잊고 싶지 않은 내 마음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갤러리아백화점 앞 로데오 입구, 청담동 맥도날드 뒷골목. (02)549-1459.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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