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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6.08.03 15:22 수정 : 2006.08.04 14:25

터널은 고장난 앰프와 같은 것이다. 모든 소리들을 증폭시켜 자동차와 나의 거리 그리고 차종에 대한 내 감청력을 무력화시킨다. 터널을 차도로 통과할 수 있다면 도시 라이더로서 한 등급이 올라간다는 뜻이다. 내 분류에 따르면.

난이도 따라 라이더 등급을 매긴다면 6등급 인도→차도→터널→한강→다차선→고가도로급
처음 차도 내려올 땐 욕탕서 뛰쳐나온 느낌 질주하는 쇳덩어리를 맨몸뚱아리로 막아내야 하는
도시 굉음의 증감을 들으면 차종은 물론 운전자 성격 파악 트럭은 트롬본


홍은택의 ‘서울 자전거 여행’ ⑥

자전거 출퇴근 경력이 일천한 내가 등급을 매겨도 되는지 모르지만 대략 라이더들을 이렇게 분류할 수 있다. 인도급, 차도급, 터널급, 한강급, 다차선급, 고가도로급. 도심 주행의 난이도에 따른 6등급이다. 다시 내게 그럴 권한이라도 있다면 고가도로급 라이더들에게는 태권도의 검은 띠 또는 특전사 요원들의 공중 낙하 기장이라도 수여하고 싶다.

인도급은 새삼 설명이 필요 없다. 인도로만 가는 라이더들이다. 신속보다는 안전 주행을 생각하는 라이더들이다. 어떻게 보면 가장 참을성이 많은 라이더들이기도 하다. 그 다양한 장애물들, 인파와 공존할 줄 아는 사람들이다. 이 단계에 머물러 있어도 뭐라고 할 사람은 없다.

도심 주행의 속도감과 긴장감을 누리고 싶다면 곧 차도로 내려서게 된다. 차도급 라이더가 되는 것이다. 처음 차도로 내려 선 사람들은 그 기분을 알 것이다. 마치 목욕탕에서 바로 거리에 뛰쳐나온듯한 벌거벗은 느낌. 맨 몸뚱아리로 질주하는 육중한 쇳덩어리들을 막아내야 할 것 같은 아찔한 막막함.

특히 뒤에서 자동차가 들이박을까봐 간질간질하다. 아니 뒷골이 당긴다고나 할까. 인간 미사일 발사 실험을 하듯 일부러 자전거를 들이박아 내가 자전거에서 멀리 튕겨져 나가는 모습을 즐기는 운전자들의 모습이 떠오른다. 이성적으로 생각해보면 실제 그런 사람이 있을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나를 봤을 때는 이미 나를 친 뒤라든지, “죄송해요, 사실 오늘이 운전은 처음이거든요” 또는 “아, 술이 확 깨네요. 그런데 아저씨, 왜 누워 있어요?” 이런 얘기를 길바닥에 피를 흘리며 누워서 들을 개연성은 있지 않을까. 이런 얘기도 들을 수 있다. “제 차가 그렇게 큰 지 몰랐어요. 얼마 전 산타페로 바꿨거든요. 그냥 옆으로 피해간다고 생각했는데 받아버렸네요. 많이 아프죠?” 또는 “분명히 아저씨 보고 핸들을 왼쪽으로 틀었거든요. 근데 차가 오른쪽으로 가버렸어요.” 그런 얘기들이 귀로 들린다면 그래도 다행이다. 목숨은 붙어 있다는 뜻이니까.

'Miles From Nowhere'라는 자전거 여행기가 있다. 의역하면 ‘정처없이 달리다’라는 뜻일 텐데 남편과 함께 세계일주를 한 바바라 새비지의 작품이다. 조마조마하며 때로는 낄낄거리며 즐겁게 이 책을 읽던 나는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는 순간 눈이 멈췄다. 책은 2년여의 세계일주를 마치고 로스앤젤레스 공항에 도착하는 것으로 끝이 났다. 그런데 그 옆에 ‘추모하며’라는 심상치 않은 제목이 있고 책 출판이 진행되는 동안 바바라가 캘리포니아주 산타 바바라의 집 근처에서 자전거 사고로 머리를 다쳐 숨졌다고 적혀 있었다. 수많은 위기와 위험을 이겨내고 세계를 일주한 라이더가 집 근처에서 당하다니. 허탈해서 그가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남편과 친지들은 세찬 바람결에 날아가버린 꽃잎 같은 그의 생애를 기리기 위해 매년 좋은 여행기를 골라 바바라 새비지 상을 주고 있다.

나중에 알아보니 바바라는 트럭에 당했다. 그 이상의 정황은 모르지만 라이더가 자동차에 당한 가장 극명한 경우로 내 기억 속에 남아 있다. 이 기억은 엉뚱하게 그들 여행의 폭과 역경에 비할 바 아닌 내게 불길한 예감을 불러일으켰다. ‘6400㎞를 달려 미국을 횡단한 라이더, 서울 양재대로에서 새벽 만취 차량에 가다.’ 그런 상상을 하는 걸 보면, 내면의 번다함을 청소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던 80일의 여행에도 불구하고 지독한 자기연민증은 살아남은 듯하다.


그런데 한가지 위안이 되는 통계를 찾았다. 도시 자전거 주행의 대부인 존 포레스터의 <효과적인 사이클링>을 읽던 중 1974년 미국 캘리포니아주 교통안전국의 의뢰를 받아 케네스 크로스라는 사람이 조사한 사고통계가 눈에 들어왔다. 이 조사에 따르면 자동차와 자전거가 부딪힌 사고 중 자동차가 뒤에서 자전거를 들이받은 경우는 불과 10%밖에 안 됐다. 이중에서도 자전거가 뒤에서 오는 자동차 앞으로 갑자기 뛰어들어서 난 사고가 6%이고 불과 4%만이 운전자의 과실이었다. 요약하면 자동차와 자전거가 부딪힌 사고 중 불과 4%만이 뒤에서 오는 자동차의 잘못에 의해 일어났다는 뜻이다. 그걸 자전거 관련 사고의 전체 숫자에 비해보면 겨우 0.3%다. 자전거와 자동차 충돌 사고의 절대다수는 자전거든, 자동차든 우회전 또는 좌회전 하다가 일어난다. 뒤에서가 아니라 눈 앞에서 사고가 난다는 뜻이며 똑바로 앞만 보고 가도 사고가 날 확률이 극히 적다는 말이다.

참을 수 없는 뒷골의 간지러움

세종문화회관 앞에 전시된 이 작품을 보면서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도시 라이더들은 금속 말을 타고 다니는 돈키호테와 같은 존재다.
물론 이것은 미국 얘기고, 그것도 30여년 전 조사니까 우리 상황에 안 맞을 수 있다. 내가 아는 바로는 한국에서 이런 조사가 실시된 적이 없다. 자전거는 안중에 없는 사회니까. 그리고 불과 0.3%라고 해도 내가 그 천 명 중 세 명의 한 명이면 그걸로 끝인 것도 사실이다. 그래도 왠지 마음이 놓였다. 뒤에서 누가 칠까봐 괜한 걱정을 하다 오히려 전방 경계를 소홀히 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차도급 라이더가 되기 위해서는 뒤에 대한 참을 수 없는 간지러움에서 벗어나는 게 중요하다.

그렇다고 뒤를 무시할 수는 없다. 교통의 선행지수이기 때문이다. 보통은 백미러를 헬멧이나 선글라스 또는 핸들 바에 달고 다니는데 자동차도 그렇듯 사각지대가 있다. 안심할 수 없다. 그렇다고 고개를 뒤로 돌리다가는 앞의 위험을 놓칠 수 있다. 앞만 보다가는 뒤를 놓치고 뒤를 보다가는 앞을 놓친다. 차도급 라이더가 풀어야 할 딜레마다.

무엇보다 고개를 왼쪽으로 돌리면 핸들도 따라 돌아간다. 자전거를 타본 사람이면 누구나 경험하듯이 길 오른쪽에 도랑이 있어 그것을 피하려고 도랑을 쳐다보고 가면 꼭 자전거는 도랑에 처박히게 된다. 눈과 손의 동조현상 때문인 것 같다. 눈이 가는 방향으로 자전거는 간다. 고개를 왼쪽으로 돌리면 자전거가 차선 중앙으로 방향이 꺾이게 되고 직진하는 추월 자동차에 받히기 십상이다.

여기서 45도 이론이 나온다. 존 포레스터의 뒤를 잇는 도시 주행의 아티스트인 로버트 허스트가 <도시주행의 미학>이라는 책에서 제창한 것으로 고개를 45도만 돌려서 뒤를 관찰하라는 것이다. 사람의 시계는 생각보다 넓어서 고개를 45도만 돌려도 90도의 시야를 확보할 수 있다. 45도는 과거 교련시간에 열병도중 “본부석을 향해 좌로 봣!”했을 때만큼만 고개를 비트는 각도다. 하지만 본부석을 통과할 때까지 계속 좌로 보고 있으면 안 되고 바로 고개를 원위치해야 한다. 한없이 45도를 유지하다간 운명하는 수가 있다.

45도 시선이 공간지각에 최고

최고 경지 차도급 라이더들은 불과 0.5초의 45도 고갯짓만으로도 예전 6백만불 사나이처럼 순간적으로 다양한 정보를 처리할 능력을 갖고 있을 것 같다. 10.5m 후방의 2차선로에서 BMW(베엠베)가 시속 63㎞로 달려오고 있다든지 그 뒤로 SM(에스엠)5가 시속 65㎞로 추월을 시도하고 있는데 운전자가 옆에 앉은 여성의 어깨 위에 손을 올리고 있다든지 하는 정보를 한눈에 처리할 능력이 있을 수 있다.

그런 수준은 아니더라도 뒤의 시공간적 정보를 신속히 처리해내는 연습을 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결코 보는 게 아니다. 쬐는 것이다. 눈빛을 쭉 한번 광선처럼 쬐고 난 뒤 걸려든 조각 정보들을 머릿속에서 빨리 재구성해야 한다. 그러고 보면 차도 주행은 퍼즐 맞추기, 나아가 공간지각력에 대한 훌륭한 훈련이다.

차도급 라이더라고 해서 항상 차도로만 가는 것은 아니다. 전술적 유연성을 발휘해서 위험구간은 살짝 인도급 라이더로 전환할 수 있다. 도심 주행의 위험 요소는 많지만 큰 것만 골라보면 터널, 다리 (특히 한강 다리), 다차선 도로에서의 차선변경 그리고 고가도로로 구분할 수 있다.

먼저 터널. 터널을 차도로 통과하는 사람은 보통 강심장이 아니다. 터널이 주는 일차적 공포는 소리에 있다. 사실 나는 뒤에서 오는 굉음을 듣고 차종은 물론 운전자의 성격 정도는 파악할 수 있다. 생존 본능이 키운 차량 감별력 덕분이다. 가속 페달을 자주 끊어서 살살 밟는 운전자는 소심한 듯하고 브레이크를 자주 밟는 운전자는 성격이 급해 보인다. 가속 페달을 주욱 밟는 운전자는 성격이 무사태평이거나 또는 너무 대범해서 자전거 한대 치는 것 정도는 눈깜짝 안 할 인물인 듯하다. 그게 다 소리로 표현되면서 엔진소음이 진도에 안 맞게 커지면 나는 본능적으로 자전거를 우측 백색 선으로 붙인다. 소리의 증감은 속도를 감지할 수 있는 핵심 데이터다. 굉음이 빠르게 커진다면 위험도 커진다. 급가속하면서 내가 피할 수 있는 최소한 2초의 여유를 주지 않고 훑고 갈지 모른다.

사실 우리가 느끼는 굉음은 엔진소음과 타이어의 아스팔트 마찰음이 결합한 것이다. 가까이 있을 때는 엔진소음이지만 멀리서는 마찰음이 더 크게 들린다. 차가 클수록 폭이 넓은 타이어를 쓰고 굉음도 크다. 버스와 트럭은 3m에서 3.5m 간격의 차선을 독차지하기 때문에 자전거가 설 공간이 없다. 그래서 항상 요주의 대상이다. 그 중에서도 보통 바깥 차선으로 가는 버스의 동태가 중요하다.

타이어의 크기가 같더라도 음색은 다르다. 트럭은 차체가 높은 탓인지 소리가 높고 날리는 반면 버스는 차체가 바퀴를 덮고 있지만 소리통이 커서 소리가 묵직하면서도 울림이 있다. 트럭이 트럼본이라면 버스는 섹소폰인데 그 악기들을 가장 악의적으로 또는 현대음악적으로 사용했을 때의 소리들일 것이다. 오토바이는 타이어가 작은 데서 오는 열등감을 만회하기라도 하듯 엔진소음이 크다.

홍은택/오마이뉴스 인터내셔널 편집국장
일부러 머플러를 떼는 사람도 있다. 오토바이의 엔진소음이 아무리 커도 아이가 괴성을 지르는 것과 같아서 쉽게 분별이 된다. 타이어의 마찰음이 받쳐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수렵시대에는 시각, 후각뿐 아니라 소리로 사냥감을 판별하곤 했다. 도시문명의, 기계의 일상적 소음에 둔감해진 내 귀가, 용불용설에 따르면, 토끼 귀처럼 되는 것은 시간 문제다.

문제는 터널에 들어오면 굉음 감청법이 무의미해진다는 것이다. 모든 소리가 뒤죽박죽 된다. 터널은 도시의 고장 난 앰프와 같은 곳이다. 뒤에서 오는 악기가 어떤 종류인지 그리고 나와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 가리지 않고 모든 소리를 증폭시켜버린다. 만약 지옥이 있다면 소리 지옥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면 그것은 아무리 달리고 달려도 끝나지 않는 터널의 모습을 띠고 있을 것이다.

홍은택/오마이뉴스 인터내셔널 편집국장 hongdongzi@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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