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6.07.19 21:10
수정 : 2006.07.20 17:25
꿈틀대는 면발은 ‘평양면옥’
슴슴한 육수 ‘을지면옥’ 최고
시원한 냉면으로 ‘눅눅해진 마음’ 샤워
온 세상이 축축합니다. 비는 그칠 기미를 보이지 않고 몸도 마음도 끈적끈적합니다. 더워도 좋으니 이제 그만 맑은 하늘을 보고 싶습니다. 그만 떠내려가고 그만 잠겼으면 좋겠습니다. 비가 그치면 시원한 냉면을 먹으러 가야겠습니다. 눅눅해진 내장을 냉면으로 샤워시켜 주고 싶습니다. 그런데 고민입니다. 어디 가서 먹을까. 결정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음식 잡지사에 다닐 때 냉면 특집을 한 적이 있습니다. 이맘때였을 것입니다. 서울의 모든 냉면을 맛본 다음 별점으로 순위를 매기리라는 각오로 일을 시작했지만, 어림 반푼어치도 없는 생각이었습니다. 유명하다는 냉면집만 서른 곳이 넘습니다. 전통 냉면의 맛과는 사뭇 다르다는, 이른바 비주류 냉면집의 수도 만만치 않습니다. 거의 매끼 냉면을 먹었고, 하루에 네다섯 그릇의 냉면을 먹은 날도 있었습니다. 내장에 쭈글쭈글한 면발이 차곡차곡 채워지는 느낌이었습니다. 냉동인간이 될 것 같았습니다. 그때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도대체 맛있는 냉면이란 어떤 것인가. 무슨 근거로 별점을 매길 것인가. 그때 정한 저만의 기준은 이런 것들이었습니다.
면발이 우선입니다. 일단 입안에다 국수를 한가득 우겨 넣습니다. 입안이 가득 차면 면을 앞니로 툭 끊어냅니다. 가위는 사절입니다. 가위를 대면 기다란 면의 질감을 제대로 느낄 수 없습니다. 이제 입안 가득 들어차 있는 면을 우물거려봅니다. 꺼칠꺼칠하고 몰랑몰랑한 면이 입안에서 꿈틀댑니다. 생명체처럼 느껴집니다. 어느 순간 메밀 향이 코끝으로 스며듭니다. 그리고 묵직하게 엉킨 국숫다발을 좁은 목구멍 안으로 밀어 넣습니다. 목이 메면서 시원합니다. 이 쾌감에 냉면 먹습니다. 면발이 꿈틀대지 않으면 감점입니다. 메밀 향이 코끝에 스미지 않아도 감점입니다. 면발은 장충동의 평양면옥(사진, 02-2267-7784)이 최고였습니다. 면발은 뽑는 날에 따라, 뽑는 사람에 따라 달라지기 마련이고, 날씨에 따라 계절에 따라 메밀 함량을 달리하는 집도 있으니 말 그대로 그때그때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평양면옥의 면은 언제나 평균 이상의 수준을 유지합니다.
둘째는 육수입니다. 우선 육수에다 얼음을 띄워주는 집은 경계대상 1호입니다. 너무 시원하거나 너무 뜨거우면 맛을 느낄 수 없는 법입니다. 그리고 조금은 슴슴해야 합니다. 달거나 시거나 짜거나 매운 맛보다는 슴슴한 맛이 메밀 향과 잘 어울립니다. 육수만 놓고 따지자면 을지면옥(02-2266-7052)이 매혹적입니다. 그 시원함이 심장을 관통합니다. 심장을 냉동시킨 다음 시원한 마음으로 뜨끈뜨끈한 여름과 맞서 싸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맛에는 절대적인 기준이란 게 있을 수 없습니다. 저마다 좋아하는 냉면이 다를 테고, 그 이유도 다를 것입니다. 기준도 다를 것입니다. 평양면옥과 을지면옥이 뭐가 맛있어라고 해도 할 말 없습니다. 그래서 재미있습니다. 매콤한 맛으로 냉면을 먹는 사람도 있을 테고, 질긴 국수를 앞니로 쥐어뜯는 맛에 냉면을 먹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소설가 김훈 선생은 인생관을 바꿔준다는 구파발의 만포면옥(02-359-3917) 냉면을 높이 평가합니다. 이탈리아 요리사 박찬일씨는 어린 시절의 추억이 담겨 있는 남대문 시장통의 부원집을 최고로 칩니다. 이유 없는 무덤 없듯 이유 없는 맛집도 없습니다. 그 이유가 있어야 한끼가 달콤해집니다. 빨리 비가 그쳤으면 좋겠습니다.
광고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