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권오영의 ‘21세기 고대사’
②해상 실크로드와 고대 한국
신라·백제 유적지에서 쏟아지는
유리구슬 뿌리 찾아 베트남 답사
고대 해상왕국 부남의 ‘오크에오’
공방 유적지에서 찾은 유리구슬
화학분석 결과 “한반도 출토와 동일”
백제·신라가 왜에 동남아 물품 보낸
고대 기록을 실증적으로 확인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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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와 백제 무덤에서는 많은 양의 유리구슬이 나오고 있다. 한반도에서 나오는 유리구슬은 대부분 인도·태평양 지역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당시의 활발한 교역을 잘 보여준다. 사진은 영산강 유역에서 발견된 유리구슬 등 유물들. 권오영 교수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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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찌민시를 출발한 지 6시간이 되어 가지만 아직도 목적지는 나타나지 않았다. 6명분의 트렁크를 싣고, 현지 가이드와 기사를 포함하여 총 8명이 탄 차는 너무 좁아서 옆사람의 존재가 점점 부담스러워졌다. 교량에 올라 메콩강의 물줄기를 여러 번 건넜지만 또다시 나타난 커다란 물줄기 앞에서 우리 차 기사는 화물선에 올라타기 위한 긴 차량 대열에 합류한다. 저녁식사 시간을 훨씬 넘긴 늦은 밤이 되어서야 끼엔장성의 성도인 락자에 도착하여 짐을 풀 수 있었다. 이튿날 아침 일찍, 답사단은 다시 출발하였다. 한국을 떠난 지 3일째 되는 날이지만 아직까지 이룬 성과는 아무것도 없다. 답사의 유일한 목적지인 오크에오는 7세기까지 존속하였던 고대 해상왕국 부남(扶南, Punan)의 거점도시 중 하나이며, 고대 해상 실크로드의 중요 항구이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543년 백제의 성왕은 부남의 물자와 생구(노예)를 왜에 보냈고 다음 해에는 인도 북부에서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양탄자를 보내주었다. 553년에 왜는 약물을 보내달라고 백제에 요청하는데, 아마도 동남아시아산 약재를 원했던 것 같다. 598년에는 신라가 동남아시아산 공작을 왜에 보내주었다. 641년에는 백제 사신이 동남아시아의 모처에서 온 사신을 물에 빠뜨리는 사고가 일본에서 발생했다. 6~7세기에 백제와 신라가 동남아시아와 남아시아의 진기한 물품을 여러차례 일본에 공급해준 셈이지만 더 이상은 알 수 없었다. 부남에 대한 국내의 정보 자체가 매우 제한적이어서 “캄보디아에 소재하던 고대 왕국”, “코친차이나에 있던 왕국” 정도의 설명이 전부였다.
20세기 전반기에 프랑스 학자들은 오크에오에서 조사를 진행했다. 그 결과 로마 황제의 이름이 새겨진 금화, 불교와 힌두교의 신상, 중국 거울 등이 발견되었고, 이곳이 동양과 서양을 잇는 고대 해상 실크로드의 중요한 항구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세계적으로 중요한 유적이지만 우리에게는 너무도 생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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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월 유리구슬을 찾아 나선 한국 답사단이 현지에서 우연히 만난 베트남 학자들과 기념사진을 찍었다. 왼쪽 넷째가 권오영 교수. 최종택(오른쪽 끝) 고려대 교수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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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를 넘어 온 유리구슬
필자의 흥미를 끈 또 하나의 주제는 유리구슬이다. 한반도의 고대 무덤에서는 좁쌀만한 유리구슬이 엄청나게 발견된다. 출토량의 추산은 엄두도 낼 수 없다. 경기도 오산의 한 유적에서만 7만5천점이 발견되었고, 충남 아산의 무덤 1기에서 2281점이 발견될 정도로 많은 양이 매장되어 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한반도에서 발견된 고대의 유리구슬은 수십만점에 이를 것이고, 전체 매장량은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이다. 그런데 이 유리구슬 중 절대다수는 한반도 외부에서 제작된 뒤 수입된 것이다. 인도-태평양 유리구슬이라고 불리는 이런 부류의 유리구슬은 명칭 그대로 인도와 태평양 일대의 여러 공방에서 제작된 뒤 바다를 통해 광범위하게 유통되었는데 최근에는 아프리카에서도 발견되고 있다. 최대 생산지는 아리카메두 등 인도의 동해안 일대, 말레이반도와 타이, 베트남이며 한반도는 주요 수입국 중의 하나였다.
우리는 흔히 실크로드라고 하면 낙타와 오아시스, 카라반이라고 불리는 대상을 떠올린다. 사막과 오아시스의 길을 통한 동서교섭, 그리고 그 북방에서 이루어진 초원길의 교섭이 유라시아의 동과 서를 엮는 데에 중요한 구실을 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못지않게 중요한 구실을 한 것이 바닷길이다. 기원 1세기에 그리스 상인이 작성한 에트루리아해 항해기, 중국의 <한서>를 종합해 보면 이미 이 시기에 유럽과 아라비아, 인도와 벵골만, 동남아시아와 중국을 잇는 바닷길이 개통되어 사람과 물자, 정보와 지식이 이동하였다. 벵골만을 거쳐 말레이반도에 도달한 인도 상인과 선원들은 좀 더 안전하고 경비가 적게 드는 방법을 개발했다. 말레이반도를 따라 남하하여 말라카해협을 우회하는 항로가 아니라 좁고 긴 반도가 더욱 잘록해진 끄라 지협(육지가 좁게 형성된 곳)을 이용해 반도의 동해안과 서해안을 육로로 연결하는 방법이었다. 그 결과 끄라 지협의 동과 서에서 수많은 항구도시가 번성하였다. 끄라 지협을 이용하여 중국으로 가려면 반드시 경유해야 하는 항구가 오크에오였다. 항로의 사정이 이렇다 보니 오크에오는 고대 바닷길에서 가장 중요한 항구로 부각되었고, 이 항구를 장악한 부남은 해상왕국으로 성장하였다. 오크에오는 당시 최고로 번성한 국제항구이자 유리구슬의 집결지, 그리고 생산지였다.
이곳에서 생산된 유리구슬이 한반도로 들어왔을 것이란 가설을 세운 필자는 오크에오 답사를 준비했다. 우여곡절 끝에 최종적으로 고고학자 2인, 미술사학자 2인, 그리고 필자의 지도를 받는 대학원생 1인과 필자를 포함한 6인은 2015년 1월 인천공항을 출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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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남아시아의 고대 해상왕국이었던 부남의 항구도시 오크에오에서 출토된 유리구슬들. 신라와 백제에서 나온 것들과 성분이 같은 것으로 확인됐다. 최종택 고려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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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베트남 학자의 공동 발굴
답사 3일째 되는 날 오후가 되어서야 오크에오에 도착하였지만, 사전 준비와 정보의 부족으로 무엇을 찾고 무엇을 보아야 할지 막막하기만 하였다. 필자만 믿고 답사에 동행한 단원들의 불만에 초조해진 필자의 눈에 저 멀리 가건물의 지붕이 보였다. 가 보니 벽돌로 만든 고대 건축물의 하부구조를 전시하는 야외전시관이었다. 지붕 아래 건너편 모퉁이에서는 아낙 몇몇이 모여 있었는데, 그중 한명은 선 채로 다른 여성들을 감독하고 있었다. 성공적인 답사를 위한 일념으로 그곳으로 향하니 출토된 토기편을 세척하는 작업이 한창이었다. 감독하는 여성에게 영어로 말을 걸었다. “우리는 한국에서 왔습니다. 우리는 오크에오 유적을 공부하려고 합니다. 우리는 한국에서 출토된 유리구슬이 오크에오에서 온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답이 왔다. “저는 호찌민대학교의 고고학 전공자입니다. 오크에오 유적을 발굴조사하고 있습니다. 그저께 우리는 이 근처에서 유리구슬을 만들던 공방을 발견하였습니다.” 흥분한 필자가 말을 이었다. “우리를 그곳으로 안내할 수 있는지요?” “네. 같이 가시지요.”
그가 안내한 곳은 바나나밭 한가운데였고 울창한 밀림과 잡초, 그리고 물웅덩이로 뒤덮인 곳이었다. 후퇴할 여유가 없던 우리는 지표면을 뒤져서 유리구슬을 찾기로 했다. 과연 10분도 안 되어 알록달록한 유리구슬 8점과 푸른색 유리 파편 1점을 찾을 수 있었다. 방안지에 유리구슬을 올려놓고 사진을 찍어대던 필자는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에서 말을 이었다. “이 구슬을 한국에 가져가서 과학적 분석을 하고 공동으로 논문을 씁시다.” “네. 좋습니다.” 필자와 공동연구를 진행하고 있던 공주대학교의 김규호 교수에게 즉시 전화를 걸었다. “오크에오에서 유리구슬 샘플을 확보했습니다. 분석해주실 거지요? 물론 공짜로요.” “네. 좋습니다.” 오크에오 유적 관리를 책임진 현지 공무원의 허가증을 받고 반출된 작은 유리편 9점은 한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공주대학교에 유물을 보낸 지 며칠 뒤. “권 교수님, 어떡하죠? 제대로 분석하려면 유리구슬을 부수어서 가루로 내야 하겠는데요?” 남의 나라 유물을 가루로 만들 수는 없기에 포기하려고 했지만 결국 정확한 분석을 위해서는 피치 못하게 유리를 파괴해야 한다는 내용의 메일을 보냈다. 곧 답신이 도착하였다. “당연히 그리해야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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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월 오크에오 유리구슬 공방 유적지에서 한국 답사단이 찾은 유리구슬. 베트남 당국의 허가를 얻어 한국으로 가져온 뒤 화학적 분석 결과 한반도에서 출토된 것과 성분이 같음을 알아냈다. 권오영 교수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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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오크에오 유적지에서 가져온 유리구슬의 형태적 특징. 권오영 교수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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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유리는 주제(산화규소, 즉 실리카(SiO₂)가 주성분), 융제(용융점을 낮추기 위해 첨가되는 물질), 안정제, 착색제로 구성되어 있다. 모든 유리에서 주제는 큰 차이가 없으나 융제, 안정제, 착색제의 화학조성은 원료의 산지에 따라 차이를 보인다. 신라 고분에서 자주 발견되는 유리 용기는 형태만으로 로만 글라스인지 사산조 페르시아 글라스인지 구분할 수 있으나, 작은 유리구슬 연구는 화학적인 분석 없이는 한 걸음도 나갈 수 없다. 한반도와 일본열도에서 발견된 인도 태평양 유리구슬 중 가장 많은 부류는 안정제로서 산화알루미늄(Al₂O₃)의 비율이 5%를 넘고, 산화칼슘(CaO)의 비율은 그 이하인 고(高)알루미나 소다유리이다. 특히 백제고분에서 발견된 유리구슬은 대부분 이 부류에 속한다.
분석 결과, 오크에오에서 채집한 유리구슬의 성분은 이와 정확히 일치하였다. 한번의 분석만으로 속단할 수는 없으나 동일한 화학조성이 의미하는 바는 한반도와 일본열도에서 출토되는 인도-태평양 유리구슬이 오크에오에서 제작되었거나 아니면 제3의 장소에서 제작된 뒤 오크에오와 한반도, 일본열도에 공급되었음을 의미한다. 백제 성왕이 일본에 보낸 물품 중에 유리구슬이 섞여 있을 가능성이 높아졌음은 물론이고, 고대의 한반도가 섬처럼 고립된 곳이 아니라 바닷길을 통하여 동남아시아와 인도, 아라비아와 연결되었음을 새삼 인식하게 되었다. 중국 동해안까지 연결된 바닷길이 백제와 신라인들의 해상활동에 의해 한반도와 일본열도로 확장된 점이 밝혀짐으로써, 훗날 등장할 장보고의 해상활동을 그려볼 수 있었다. 그 뒤 베트남의 학자(응우옌티하)와 수차례의 논의와 상호 방문을 거친 결과 오크에오 유적은 우리 앞에 성큼 다가왔다. 올해 12월26일부터 한국과 베트남 공동조사단이 1개월간 발굴조사를 하기로 전격 합의한 것이다. 국내의 문화재 조사 기관(대한문화재연구원)과 호찌민대학교, 오크에오 유적관리소, 서울대학교가 함께하기로 했다. 유라시아 동서교섭의 상징적인 유적을 우리 손으로 직접 조사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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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도 사용되는 오크에오 주변의 운하. 권오영 교수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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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크에오를 넘어 말레이반도로
2016년 1월 필자는 낭아수국(狼牙脩國·랑카수카) 조사단을 조직하여 말레이반도 답사에 나섰다. 중국 양나라의 천재 화가 소역(훗날의 원제)이 자국에 온 세계 각지의 사신들을 그리고 기록한 <양직공도>에는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사신과 함께 낭아수국의 사신이 등장한다. 낭아수국은 말레이반도에 소재한 해상왕국이지만 국내에서 더 이상의 정보는 얻을 수 없었다. 1년 전의 오크에오 답사와 동일한 난항(조직 구성, 경비 조달, 답사지역 결정)을 딛고, 답사단은 싱가포르와 페낭섬을 경유하여 말레이반도 서안의 숭아이바투로 향하였다. 최근 이곳에서 말레이시아 고고학 최고의 발견이 이루어졌다는 막연한 정보만 지닌 상태였다.
답사 4일째 되는 날, 드디어 숭아이바투에 도착하였지만 막막할 뿐이었다. 밀림 사이로 난 도로를 따라 달리던 필자의 눈에 우연히 간판 하나가 지나쳤다. 로마자를 이용하여 말레이시아어를 표기하였는데 숭아이바투, 고고학 등의 의미인 것 같았다. 차를 돌려 접근하였다. 철망 사이로 히잡을 쓴 여성 한명이 보였다. 큰 소리로 말을 걸었다. “우리는 한국에서 왔습니다. 우리는 숭아이바투 유적을 공부하려고 합니다. 우리는 한국에서 출토된 유리구슬이 숭아이바투에서 온 것이 아닌가 생각하고 있습니다.” 답이 왔다. “저는 말레이시아 과학대학의 고고학 전공자입니다. 숭아이바투 유적을 발굴조사하고 있는 중입니다. 저의 전공은 인도-태평양 유리구슬입니다.” 1년 전 오크에오의 데자뷔였다. 대한민국이 동북아시아에 웅크린 외톨이가 아니라 동남아시아에 여러 이웃을 둔 해상실크로드의 일원이었음을 밝히려는 큰 그림의 한 조각이 맞춰지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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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오영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 직접 유적을 발굴하는 고대사 학자로, 역사학과 고고학의 경계를 넘나드는 연구 활동을 하고 있다. 자연과학과 공학적 연구를 역사 탐구에 활용하는 학제 간 융복합 연구에 관심이 많다. 최근 연구 성과를 토대로 고대 한반도가 주변국들과 얼마나 긴밀히 연결돼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고대사 이야기를 격주로 연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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