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충진 교수 세번째 반론 기고
“학회 장악 의도? 이해 안돼”
“ ‘가독성’ 표현은 명예훼손 아냐”
“백종현은 기고문 철회로 사과해야”
1.
지난 6월23일 한겨레신문 기고문에서 백종현은 한국칸트학회가 기획하여 출간한 <칸트전집>의 번역자 일동에게 5개의 요구사항을, 6월4일 기자회견장에 참석한 5인에게 학회 탈퇴 및 공개적 사과를 요구했다. 지난 5일 한국칸트학회는 총회를 열어서 ‘5개 요구사항’에 대한 학회의 입장을 결정했으며 또 ‘5인은 백종현의 2개 요구사항을 들어줄 이유가 없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이로써 언론을 통해 제기된 백종현의 요구사항과 관련된 문제는 ― 그의 문제 제기가 반복되지 않는 한 ― 공식적으로 마무리된 셈이다.
그런데 학회의 공식적 결정만으로는 해소될 수 없는 문제가 아직 남아 있다. 백종현의 요구가 언론이라는 매체를 통해 제기되었으되, 그 내용은 언론에 등장하기에 부적절한 것을 많이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고문에서 백종현은 한국칸트학회가 기획한 <칸트전집>에 “불순한 의도”와 “불법적 홍보”라는 딱지를 붙였다. 그의 인식에 따르면 <칸트전집> 번역의 기획은 불순한 의도에서 시작되었으며 기획의 결과물은 불법적인 방식으로 자신의 탄생을 세상에 알린 셈이다.
2.
백종현이 말하는 ‘불순한 의도’란 “학회 집행부를 장악하고 학회를 권력기구로 만들어” “자신들과 다른 해석을 말살하려는” 의도를 말한다. 이러한 의도의 배후에는 “백종현의 칸트 번역서의 확산을 막(아야 한다)”라는 기획자들의 또 다른 의도가 있다고 그는 생각한다. 그리고 그 모두를 그는 ‘불순하다’라고 평가한다.
번역사업의 기획자 중 몇몇은 분명 백종현의 번역서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다. 번역어 선택과 가독성은 가장 자주 지적된 문제였다. 15년 전 그의 번역서가 처음 출간되었을 때부터 등장한 지적이었으니 기획자들에겐 전혀 새로울 것이 없었다. 이러한 문제의식을 가진 학자들이 새로운 칸트전집을 출간하여 문제를 바로잡으려는 것은 너무도 당연했다.
그런데 ‘잘못된 번역어와 번역서를 개선하자’라는 학자들의 생각을 백종현은 “백종현의 번역서 확산을 막자”라는 것으로 받아들인다. 어떻게 이러한 이해가 가능한지 나로서는 도무지 알 수 없다. 번역어와 번역서의 좋고 나쁨을 번역서의 판매 부수와 동일시할 수는 없지 않은가? 출판사 판매원도 그렇게는 하지 않는다.
‘번역 사업을 기회 삼아 소수의 기획자가 “학문권력”을 장악하려 한다’라는 백종현의 말도 이해할 수 없기는 마찬가지이다. 그의 말은 명백히 소수 기획자에 대한 모독이다. 기획자 5명은 출신 대학도 다르고 고향도 다르고 부모형제도 다르다. 심지어 그들 중 몇몇은 학술대회에 잘 나타나지도 않는다. 그런 그들이 “집행부를 장악”하기 위해 의기투합했다는 것인가? 그뿐만이 아니다. 백종현의 말은 다수 회원에 대한 노골적인 조롱이기도 하다. 그의 말은 한국칸트학회 회원들이 학회를 장악한 소수에게 아무 소리 못 하고 끌려다니고 있다는 말에 다름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도대체 왜? 몇 푼 번역료 때문에?
나의 독일인 지도교수가 가장 기뻐했던 순간은 자신이 편집한 <학술원판 칸트전집>이 출간되었을 때였다. 평생 백 편이 넘는 논문과 수십 권의 저술을 출간한 그였지만, 나는 그가 <학술원판 칸트전집>을 자신의 대표 업적으로 생각할 것이라고 확신한다. 내가 아는 칸트연구자는 그러하며 내가 아는 철학자는 그러하다. 한국칸트학회가 기획한 <칸트전집> 번역 사업에 참여한 34명의 번역자 역시 그럴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3.
학자들이 자신의 연구 성과를 기자들 앞에서 소개하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다. 그러니 백종현이 말하는 ‘불법적 홍보’는 분명 기자회견이라는 방식 자체가 아니라 회견의 내용과 연관되어 있을 것이다. 그가 생각하는, 기자회견장에서 있었던 불법적 행위는 크게 두 가지이다.
첫째, 기자회견장에 있던 5인은 ‘기존의 번역서 중 어느 것은 중역이며 어느 것은 가독성이 떨어진다’라고 말했다. 이러한 언급은 기존 번역서와 번역자에 대한 “중상모략”이며 “기존의 번역서를 폄하 비방”하는 불법적 행위이다. “번역서의 흠을 지적”하는 그들의 언급은 “악용의 소지”가 있는 행위이며, 불법이다.
기자회견장에 있었던 사람들의 “행실을 사회 법규에 의해 바로잡(겠다)”고 호언장담하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백종현이 말하는 불법은 ‘현행법에 어긋남’을 의미하는 듯하다. 하지만 학자가 공개적인 자리에서 기존 연구와 연구자를 부정적으로 언급하는 것이 과연 현행법의 판단을 받아야 하는 그런 것인가? ‘중역’이든 ‘가독성’이든 학자들의 세계에서 흔하게 사용되는 말이 기자들 앞에서는 불법이 된다는 말인가?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게다가 몇 마디 말로 인해 “심각하게 훼손”되는 “학자의 명예”라면 과연 법이 보호할 만한 가치가 있는 명예인지조차 의심스럽다.
둘째, 기자회견장에 있던 5인은 한국칸트학회가 기획하여 출간한 <칸트전집>을 언급할 때 ‘정본’, ‘공인’, ‘기준’ 등의 부적절한 용어를 사용했다. 이러한 용어 사용은 그 자체로든 아니면 그것의 결과에 있어서든 불법이다.
그와 같은 부적절함에 대해서는 학회의 공식 입장이 나왔으니, 개인적으로 더는 이야기할 것이 없다. 하지만 부적절한 언급들로부터 발언자들의 “기만적 술책”을 읽어내는 백종현의 시각을 나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 어떻게 번역서의 발간을 통해서 “지금의 한국칸트학회의 집행부”가 “철학용어 사용을 일반인에게도 강제”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지, 참으로 놀랍기만 하다. 또한 부적절한 몇 개의 발언을 이유로 5명의 발언자를 “자신들의 학설을 강제적으로 유포하고 학계를 전제하려는 폭거”를 일삼는 사람으로 매도하는 것도 나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 “비루하고 책략적인 언동”이라니? 언론을 통한 인신공격이야말로 중대한 불법 아닌가?
4.
불순한 기획과 불법적 홍보, 사이비 회원들, 거짓 권위, 기존의 책 비방, 자신의 책 허위 과장 광고, 독자(소비자) 오도, 상거래 법규 저촉, 범법 행위, 신상품 출시, 경쟁 상품에 대한 비방, 사욕의 도구, 전략적 제휴의 산물, 칸트전집의 불행한 탄생, 반문명적 등등. 이와 같은 표현들을 사용하여 백종현은 한국칸트학회 기획 <칸트전집>과 6월5일 기자간담회를 이야기하고 있다. 이른바 “핵심 문제”(7월2일 기고문)를 대하는 그의 시각과 인식이 나에게는 너무도 충격적이다.
5.
지난 한 달 동안 지속된 “분란”이 학회의 공식적인 입장 표명으로 말끔하게 끝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 “분란”으로 인해 상처를 받은 사람들이 학회장이나 연구책임자나 칸트연구자일 뿐만 아니라 ‘홍길동’ ‘성춘향’ 같은 구체적인 이름을 가진 개인이며 인격체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나는 6월23일 기고문의 철회를 백종현에게 요구한다. 그가 그렇게 한다면 나는 그의 행위를 5인의 기획자와 34인의 번역자와 5인의 기자회견 참가자에 대한 사과로 받아들일 것이다. 다른 사람은 어떨지 몰라도 나 개인은 분명 그렇게 할 것이다. 지금의 “분란”이 누구에 의해 시작되었든 그 “분란”을 끝맺을 사람이 누구인지는 분명하다.
※ 이충진은 성균관대학교에서 헤겔 철학 연구로 석사, 독일 마르부르크 대학교에서 칸트 법철학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지금은 한성대학교에서 철학을 가르친다. 철학을 삶의 유일한 방식으로 삼은 후 사회철학, 윤리학, 환경철학 등 실천철학적인 문제에 관심을 쏟고 있다. 세월호 참사 이후 세월호 문제는 그의 또 다른 지적 도전이 되었다. 지은 책으로는 <세월호는 우리에게 무엇인가>, <독일 철학자들과의 대화>, <이성과 권리>가 있고 옮긴 책으로는 <법이론>, <쉽게 읽는 칸트: 정언명령>, <헤겔 정신현상학>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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