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초에 칸트 전집 발간과 관련하여 진행된 학자들 간의 논쟁을 보면서, 독일철학에 관심을 가지고 특히 헤겔철학을 연구하고 피히테와 칸트를 공부하고 있는 학자로서 소감을 밝히고자 한다. 이 논쟁은 이미 칸트의 저작 가운데 상당수를 번역한 바 있는 백종현 교수와 다른 한편으로는 칸트전집 발간에 참여한 학자 그리고 각각 이들 양편의 입장에 동조하는 학자들 간의 논쟁으로 이어지고 있는 가운데 감정싸움으로 흐르는 양상도 띠고 있는 실정이다. 필자는 독일 근대철학을 전공하는 학자로서, 이 논쟁의 핵심사항들과 관련된 입장을 개진하고자 한다. 그런데 각 편의 주장에는 각각 타당하고 일리 있는 측면이 있는 동시에 문제점도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백 교수가 제기한 ‘정본’(定本)[혹은 ‘정본’(正本)]의 문제와 ‘공인’(公認)의 문제는 이미 칸트 전집 번역위원회가 의견을 철회하는 입장을 표명했기 때문에 논의하지 않기로 하고 다른 문제에 대한 견해를 밝히도록 하겠다.
1. 학자의 전집은 학회를 통해서 이루어져서는 안 되는가?
백 교수는 전집의 번역이 학회 차원에서 이루어져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는데, 이 문제에 관해서는 백 교수 주장이 지나치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인간 개인이 가진 능력의 한계가 있고, 관심의 방향 및 정도도 각각 다르므로 20~30편에 이르는 방대한 저작을 개인이 번역하기에는 많은 무리가 따른다. 서양의 경우 플라톤 전집을 아펠트(Apelt)나 슐라이어마허(Schleiermacher)가 한 경우가 있으나, 전문 번역가도 아니고 대학교수로서 연구와 강의 그리고 사회봉사의 책무를 감당하면서 이 일을 혼자 해낸다는 것은 상상하기에 어려운 과업이다. 따라서 이런 대규모의 번역사업을 국가의 지원을 받아 해당 분야의 전문가들이 모인 학회의 주도로 수행하는 것은 어쩌면 바람직하다고 할 수 있다.
다만 이를 위해서는 번역사업 전반에 관한 학회원들의 동의가 필요하다. 학회의 회원이 아니지만, 해당 분야의 권위자나 전문가들이 있을 수 있는데, 그런 경우에 이들을 포함하여 번역작업이 진행되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 일을 수행하면서 필요한 일 가운데 하나는 바로 ‘번역용어의 확정 및 통일’이다. 이것은 개인적으로 번역사업을 수행하는 경우에도 똑같이 적용되는 기준이다. 그런데 이번에 기획되고 출간된 칸트전집의 경우 이 점에서 중대한 문제점을 드러내고 있다(이 점에 관해서는 뒤에 상론한다).
2. 번역어는 반드시 한국어로 이루어져야 하는가?
이 문제에 관해서는 ‘원칙적으로‘ 백 교수의 의견에 동의한다. ‘한국철학’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어떤 문제를 다루든 간에 우리말(한국어)로 하는 철학을 가리킨다. 물론 조선의 퇴계나 율곡의 철학은 한자로 표현되어 있는데, 한자 역시 ― 우리민족의 조상인 동이족(東夷族)이 만들었다는 점을 인정한다면, 그리고 이미 우리말처럼 사용되고 있다는 점을 인정한다면 ― 우리말의 범주에 포함된다. 번역어는 가능한 범위 내에서는 우리말로 옮겨야 한다. 만약 원어에 해당하는, 현재 사용하고 있는 우리말이 없는 경우에는 우리의 옛말을 살려서 사용하든가 아니면 새로운 말을 만들든가 ― 하이데거(M. Heidegger)가 그렇게 한 것처럼 ― 하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이런 노력을 하지도 않고 그냥 원어를 사용하는 것은 무책임한 태도라 할 수 있다. 물론, 새로운 말을 만드는 경우에도 원어의 의미를 최대한 살리는 노력을 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이런 과정에서 하이데거가 범한 문제점이라고 생각하는 바를 아도르노(Th. Adorno)는 Jagon der Eigentlichkeit (<본래성이라는 특수용어>)라는 책에서 비판한 바 있다.
백 교수가 제기한 대표적인 번역어 문제가 바로 ‘a priori’와 ‘transzendental’의 번역 문제다. 칸트학회는 이번 칸트 전집에서 ‘a priori’를 ‘아프리오리‘로, ― 이것도, 원어대로 ‘아 프리오리’도 아니고 ‘아프리오리’로 ― 그리고 ‘transzendental’을 ‘선험적’으로 번역했다. 이 용어 문제를 위해 두 차례의 학술대회를 개최하고 용어조정위원회의를 열어 논의했다고 밝혔는데, 그 결과에는 매우 실망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원어를 자국어로 옮기지 못하고 원어 그대로 표기할 수밖에 없는 경우는, 위와 같은 일 ― 현행어나 고어 및 신조어의 사용 등 ― 이 불가능한 경우다. 보다 더 급진적으로 말하자면 원어의 다의성을 번역어로 모두 담을 수 없는 경우도 이에 해당한다고 주장할 수도 있겠으나, 이렇게 되면 우리말로 번역할 수 있는 용어는 극히 제한되어 번역 자체가 불가능하게 되는 처지에 이르게 될 수도 있다.
예컨대 헤겔의 핵심용어 가운데 하나인 ‘Aufheben’은 ‘폐지하다’, ‘보존하다’, ‘고양하다’라는 세 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다. 물론 문맥에 따라서는 이 세 가지 의미가 동시에 포함되지 않는 경우도 있지만, 많은 경우에는 이들 의미를 함께 가리키고 있다. 그래서 일제 후 우리말로 철학을 한 제1세대의 경우 이것을 ‘없애(폐지) 높혀(고양) 가짐(보존)’이라고 번역하기도 하였으나, 일본인 니시 아마네(西周)가 이것을 ‘지양’(止揚)으로 번역한 이래 한·중·일 삼국이 모두 이 번역을 대체로 따르고 있다. 그런데 이 번역은 ‘Aufheben’이 지니고 있는 위의 세 가지 의미 가운데 ‘폐지(廢止)한다’와 ‘고양(高揚)한다’라는 의미는 가리키지만 ‘보존한다’라는 의미는 나타내지 못한다는 결함이 있다. 오히려 ‘보존한다’라는 의미는 ‘폐기하다’라는 의미와 더불어 헤겔 자신이 강조한 또 하나의 의미임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한 것이다. 헤겔 자신의 의도에 충실한 번역이 되려면 오히려 ‘지보’(止保) 내지 ‘보지’(保止)가 더 적절할 것이다(헤겔 자신은 이 용어가 지닌 ‘보존’과 ‘폐기’라는 두 가지 의미만을 제시했다. Wissenschaft der Logik. GW 11, 58). 그러나 헤겔의 설명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헤겔 텍스트에서 이 용어가 지니는 의미는 세 가지 모두를 포함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니시 아마네의 의도는 아마도 ‘고양한다’라는 의미 속에 이미 ‘보존’의 의미도 내포된 것으로 간주하고 ‘폐지’와 ‘고양’을 두 가지 핵심의미로 하여 번역어를 확정한 것으로 보인다(그러나 ‘Aufheben’의 영역인 ‘annihilate’는 원어의 극히 일부분의 의미인 ‘절멸하다’, ‘폐기하다’, ‘부정하다’라는 의미만을 포함하고 있는 부적절한 번역어다. 그러나 ‘sublate’라는 번역어는 ‘부정하다’ 외에도 ‘고양하다’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기에 전자보다는 훨씬 나은 번역어라 하겠다).
그러나 ‘a priori’에 대응하는 우리말 번역어 ‘선험적’(先驗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원어를 음사하여 ‘아 프리오리’로 사용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자국어로 원어의 극히 일부분의 의미만을 전달할 수 있는 경우에는 부득이하게 원어 그대로를 사용하고 주석 등을 통하여 설명을 붙이는 것이 바람직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번역은 자국어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3. ‘a priori’와 ‘transzendental’의 번역어 문제
백 교수와 칸트학회의 번역진과의 의견 대립의 중심에 놓인 문제들 가운데 하나가 바로 번역 용어의 문제인데, 그중에서도 지면에서 논쟁이 되는 것이 바로 ‘a priori’와 ‘transzendental’을 우리말로 어떻게 번역할 것인가 하는 문제다. 나는 이 문제에 관한 양자의 주장에는 한편으로는 일리가 있지만 동시에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a priori’는 백 교수가 말하는 대로, 글자 그대로는 ‘~에 앞서서’라는 의미로, 이 경우에는 ‘(감각)경험에 앞서서’라는 의미이므로 ‘선험적(先驗的)’이라는 의미이고 그대로 번역하면 된다. 이 용어에 맞서는 것은 바로 ‘a posteriori’인데, 이것은 글자 그대로는 ‘~의 뒤에’라는 의미로, 결국 ‘(감각)경험 후에’라는 뜻이므로 이것을 한자로 그대로 옮기면 ‘후험적’(後驗的)이 되겠으나, ‘후험적’이라는 표현은 우리말 표현에도 맞지 않는 어색한 말일뿐만 아니라 오해를 초래할 수 있는 불필요한 말이 될 수 있다. 왜냐하면 ‘선험적’이, ‘경험에 앞서서’, ‘경험하기 전에’를 뜻한다면, ‘경험이 시작되는 순간’부터가 바로 ‘경험 후에’가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경험이 시작되는 순간부터’를 가리키는 말이 바로 ‘경험적’이라는 용어이므로 ‘후험적’이라는 표현은 불필요하다. 잘못하면, ‘선험적’과 ‘후험적’이라는 표현으로, ‘경험하기 전에’와 ‘경험한 후에’를 각각 가리킨다면, “그렇다면 경험하는 순간 자체는 이 양자에 속하지 않는 것이 아닌가?!”하는 물음 내지 문제 제기가 이루어질 수 있다. ‘a priori’에 들어맞는 우리말 ‘선험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칸트학회에서 이것을 음사하여 ‘아프리오리’로 옮긴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면 ‘transzendental’은 어떻게 번역하는 것이 바람직한가? 이 문제는 칸트 자신이 이 용어에 대해 설명한 내용에 따라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 칸트는 ‘transzendental’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1) <순수이성 비판>에서의 정의: “대상이 아니라 대상이 선험적으로 가능해야 하는 한에서 대상에 대한 우리의 인식방식 일반을 다루는 모든 인식을 나는 transzendental이라고 부른다.”(“Ich nenne alle Erkenntnis transzendental, die sich nicht sowohl mit Gegenstae nden, sondern mit unserer Erkenntnisart von Gegenstaenden, insofern diese apriori moeglich sein soll, ueberhaupt beschaeftigt.” Kritik der reinen Vernunft, hg.v. Raymund Schmidt, Hamburg, 1956, B 25.).
여기서 ‘transzendental’은 “인식”(Erkenntnis)에 대해 적용된다. 요컨대 ‘transzendental’은, “인식”의 속성이다. 인식이 물(物), 대상을 주제나 내용으로 갖지 않고 인식을 주제나 내용으로 가진다. 그러나 그 어떤 임의의 인식방식이 아니라 “대상이 선험적으로 가능해야 하는 한에서의 대상의 인식방식을” 주제나 내용으로 가질 때 바로 ‘transzendental’인 것이다.
2) <프로레고메나>(Prolegomena)에서의 정의: “transzendental이라는 말은 (…) 모든 경험을 초월하는 어떤 것을 뜻하지 않고, 경험에 (선험적으로) 선행하긴 하지만 오로지 경험적 인식을 가능케 하는 것이라고 규정된 어떤 것을 뜻한다.”(“‘transzendental’ (...) bedeutet nicht etwas, das ueber alle Erfahrung hinausgeht, sondern was vor ihr (a priori) zwar vorhergeht, aber doch zu nichts Mehrerem bestimmt ist, als lediglich Erfahrungserkenntnis moeglich zu machen.”) (Prolegomena zu einer jeden kuenftigen Metaphysik, die als Wissenschaft wird auftreten koennen, hg.v. Karl Vorlaender, Hamburg, 1969, 144.).
위 칸트의 주장을 종합해 볼 때, ‘transzendental’은 ‘①경험에 앞서서 ②경험(적 인식)을 가능하게 한다’는 두 가지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고, 그것은 ‘인식’과 관련된 용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용어를 칸트학회처럼 ‘선험적’으로 번역해버리면, ①의 의미만을 전달하며, 이것은 ‘a priori’와 전혀 구별되지 않는다. 이것은 큰 잘못이다. 그런데 이것을 백 교수처럼 ‘초월적(超越的)‘으로 번역하면 ①과 ②의 의미 모두를 나타낼 수 없을 뿐 아니라, 본래 ‘초월적’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 ‘transzendent’라는 용어와도 구별되지 않는다는 문제점을 드러내게 된다. ‘transzendental’과 ‘transzendent’의 의미 차이는 비유적으로 말하면 소위 ①세계(우주)를 창조하고 세계의 모든 일에 관여하고 지배하는 고전적 유신론에서 신과, ②세계(우주)를 창조하긴 했지만 창조 이후에는 그것을 초월하여 그것에 전혀 관여하지 않는 이신론(理神論)자의 신에 견줄 수 있다. 즉 칸트에 있어서 ‘transzendental’은, 경험에 앞서 있으면서, 그것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경험이 가능하게 되는 그런 것인 반면에 ‘transzendent’는 원래 의미대로 ― 이 두 용어는 모두 라틴어 부정형 ‘transcendere’에서 나왔다 ― ‘~을 넘어서서’, ‘~을 초월하여’라는 의미를 지닌 용어다. 그래서 어떤 경우에는 이 용어를, 어떤 것과의 단절을 강조하여 ‘초절적’(超絶的)이라고 옮기기도 한다.
그런데 칸트 자신은 ‘transzendental’을 일의적으로 사용하지 않고 있다. 예컨대 “만일 직관이 어떤 방식으로든 주어지지 않으면 대상은 단지 transzendental한 것에 불과하게 되고”(A 247/B 304)라고 할 때의 ‘transzendental’은 ‘transzendent’와 같은 ‘초월적’ 내지 ‘초험적’이라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그리고 transzendentale Dialektik은 자아·세계·신이라는 “순수이성의 초월적(transzendenten) 개념들”(B 366)을 다루고 “초월적(transzendenter) 판단들의 가상(假象)을 들춰내고, 동시에 그것이 우리를 속이지 않도록 방지하는 것으로 만족할 것”(A 297/B354)이므로 ‘초월적 변증론’이라 할 수 있을 뿐만이 아니라, 이러한 이념들은 인간에게 선험적으로 주어져 있는 것이므로 ‘선험적 변증론’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리고 여기서 다루는 transzendentaler Schein은 이러한 초월적 대상을 인식할 수 있다는 가상이므로 ‘초월적 가상’이며, 경험을 통해 생기는 가상이 아니므로 ‘선험적 가상’이기도 하다. 또한 (영)혼, 세계, 신 등의 “transzendentale Idee”(A 327/B 383)는 우리의 경험에 앞서서, “이성 자신의 본성에 의해 부과되어 있는 것”(B 384)이므로 선험적 이념이다(‘초월적 이념’이라고 부를 수도 있지만, ‘이념’은 본래 초월적인 것이므로 이러한 표현은 불필요하다 하겠다). 또한 <순수이성 비판>과 <실천이성 비판>에 등장하는 “transzendentale Freiheit”[<순수이성 비판> B 474; <실천이성 비판> Kritik der praktischen Vernunft, hg. von K. Vorlaender, Hamburg 1974 (초판: 1929) Vorrede 그리고 112]는, 경험에 앞서 있고 경험을 초월한 자유이기 때문에 ‘선험적 자유’, ‘초월적 자유’라는 표현이 모두 사용 가능하다.
‘인식’과 관련한 ‘transzendental’에 대한 칸트의 설명에 대응하는 가장 충실한 번역어는 김석수 교수의 ‘선정험적’(先定驗的) 혹은 ‘선가험적’(先可驗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기존의 나의 저·역서 ― <피히테, 쉘링, 헤겔>(2008), <칸트와 독일관념론의 자아의식론>(2013), <철학입문>(2015), <서양근대철학>(2017) 등 ― 들을 통하여 이를 ‘정험적’(定驗的, ‘경험을 규정하는’)으로 옮기는 이유를 밝힌 바 있다. 그것은, ‘경험을 규정한다’는 의미의 ‘정험’에 이미 ‘경험에 앞서서’라는 의미가 포함된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험적’이라는 용어는 필자가 창안한 번역어가 아니라 안호상 박사[<철학개론>, 대한교과서주식회사, 1986(초판, 1942), 50 f. 참조] 같은 분들이 이미 사용했던 용어다. 칸트학회가 두 차례의 학술대회와 용어조정위원회의 논의 끝에 ‘트란스첸덴탈’을 ‘선험적’으로, 그리고 ‘a priori’로 번역했다고 하는데, “가장 중요한 ‘transzendental’의 번역어를 먼저 정하니, ‘a priori’의 번역어로 마땅한 것이 없어 결국 발음을 그대로 옮기게 됐다”거나, ‘아프리오리를 ‘선험적’이라고 번역했을 때 트란젠덴탈을 번역할 적절한 용어가 없어져버리기 때문에 음역하기로 결정했다는 설명‘은 전혀 설득력이 없다. 더군다나 칸트학회의 토론에서 ‘a priori’를 ‘선천적’(先天的)으로 번역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왔다고 하니, 이것은 심각한 문제가 아니라고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선천적’(先天的)이라는 것은 ‘생득적’(生得的), ‘생구적’(生具的), ‘본유적’(本有的)이라고도 하며, 이것은 글자 그대로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는’이라는 뜻이다. 이에 해당하는 독일어는 ‘angeboren’이다. 그러나 ‘a priori’에는 이런 의미가 포함되어 있지 않다. 우리가 어떤 대상을 인식할 때 ― 그 시점이 스무 살 때이건 여든 살 때이건 간에 ― 그러한 인식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감각경험에 앞선 그 무엇이 인식주관에 선재(先在)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지, 그것을 태어날 때부터 구비하고 있다는 말은 아니다. 지금까지의 용어와 그 의미와 번역을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4. 가독성 문제
칸트학회의 번역진의 주장으로는 백 교수의 번역은 “가독성 면에서 심각한 문제가 있다. 이건 칸트 연구자들은 모두가 하는 이야기다. 이번 전집은 철학을 전공하지 않은 일반 독자들도 읽을 수 있도록 가독성을 높였다”라고 말했다(김지훈 기자, 한겨레, 2018. 6. 7). 가독성에 관련해서만 말하자면 백 교수의 번역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고 할 수 없다. 내 개인적인 견해로는, 번역은 가능한 한 직역을 원칙으로 하되 그것이 여의치 않을 경우에는 의역을 고려하는 것이 좋다는 것이다. 예컨대 임석진 교수의 헤겔 <정신현상학>(Phaenomenologie des Geistes, 1807) 번역본들을 비교해보면, 앞서 나온 번역(분도출판사 및 지식산업사 간)은 직역에 가깝고 나중에 2005년에 나온 번역본(한길사 간)은 의역이 근간을 이루고 있는데, 앞서 나온 번역이 원문의 의미에 훨씬 더 가깝고 정확한 번역인 것이 사실이다. 번역자 자신이 필자에게 한 표현을 빌리면, ‘이번 번역(2005년도 판을 가리킴)은 소설처럼 읽기 쉽게 만들었다’고 했는데, 문장은 한문을 병기하거나 단독으로 사용하지 않는 등, 젊은이들 내지 철학 비전공자들을 위한 배려의 노력이 보이지만, 많은 경우 헤겔의 진의(眞意)에 벗어나서 다른 의미로 이해되도록 번역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물론, 가독성도 중요하다. 그러나 이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사태를 정확하게 나타낼 수 있는 번역이다. 이 두 가지를 겸비할 수 있다면 더없이 좋은 일이겠으나, 한 가지만 택할 수밖에 없다면 당연히 후자다. 물론 우리말 표현력이 부족하여 가독성을 떨어뜨리는 것은 문제다. 그러나 그렇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어려운 번역문이 되고 가독성이 떨어지는 것은 왜 그러한가?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는, 사태 자체의 복잡성 때문이다. 이런 경우 번역문도 복잡하고 어렵게 되는 것이 통례다. 물론 이 경우에도 가능한 한 사태를 알기 쉽게 풀어서 번역하면 좋을 것이다. 그러나 가독성을 너무 중요시한 나머지 저자의 원의(原意)를 손상·왜곡하는 우(愚)를 범해서는 안 될 것이다.
5. 번역용어를 다수결로 결정할 수 있는가?
백 교수의 말대로, 철학 번역용어를 다수결로 결정할 사항은 아니다. 학회에서의 치열한 논쟁을 통해서, 어떤 용어가 왜 우리말로 이렇게 번역되어야 하는가를 결정해야 하는데, 그 기준이 되어야 할 것은 원저자가 그 용어를 사용한 의도와 의미를 텍스트를 통해 정확하게 드러내는 일이다. 이 사안에 관하여 단일한 번역용어 선정에 대한 합의에 이르지 못하는 이유는, 예컨대 원어 자체가 다양한 의미를 지니고 있어서 그것을 우리말 한 단어로 고정하여 번역할 수 없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이 경우에는 맥락에 따라 이렇게 또는 저렇게 번역한다고 주석을 달거나 하여 설명을 덧붙이면 될 일이다. 원어 자체가 다양한 의미만이 아니라 상반(相反)된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예컨대 영어의 ‘virtual’이라는 단어는 ‘actual’과 마찬가지로 ‘실제로’라는 의미도 지니고 있지만, 이와 정반대의 의미인 ‘가상적인’(‘비현실적인‘)이라는 의미도 가지고 있다(예컨대 ‘virtual space’(가상 현실)의 경우). ‘sanction’도 이와 유사하게, ‘~을 허용하다’(‘비준하다’)라는 의미만이 아니라 이와 대립하는 ‘~을 제지하다’라는 의미도 가지고 있다. 이런 경우, 그때그때 의미를 달리하여 번역하면 된다. 그러나 칸트의 ‘a priori’와 ‘transzendental’은 이런 경우에 해당하지도 않는다. 진리를 어떻게 다수결로 정할 수 있겠는가?! ‘a priori’를 ‘아프리오리’로 음사하여 번역어로 채택하기로 학회에서 다수결로 결정했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겠다. 더군다나 “칸트학회가 칸트 용어를 통일하면 헤겔, 하이데거, 후설 연구자들도 동일한 용어를 쓰게 될 것”(박상현 기자, 연합뉴스, 2018. 6. 4)이라고 하는데, 물론 올바르고 적합한 번역어가 결정되면 그에 따르는 것이 바람직하겠지만, 어떤 학회에서 어떤 철학자의 용어를 우리말로 확정했다고 해서 그 용어를 다른 연구자들도 따라서 사용하게 되리라는 것은 베이컨이 말한 극장의 우상이나 시장의 우상을 상기시키는 말이다.
6. 맺는말
학문과 진리는 일개인 내지 소수 혹은 다수의 전유물이 될 수도 없고 다수결로 결정될 일도 아니다. 누구나 진리 앞에 겸손한 태도로 타인의 주장을 경청하고 자신의 주장을 논증을 통해 개진해야 할 것이다. 금번의 칸트 전집 발간을 둘러싸고 학자들 간에 이루어지는 논쟁이 감정싸움으로까지 번지는 양상을 보이는 점은 심히 안타까운 일이다. 나를 포함하여 이분들 모두는 이러저러한 연고로 얽혀있는 동학이요 선후배들이다. 상대편의 주장과 자신의 견해를 다시 한 번 철저히 살펴보고, 오류가 발견된다면 인정하고, 혹 더 나은 견해가 있으면 수용하는 넓은 마음을 가져주기 바란다. 그리하여 우리말로 된 칸트전집 출간이 더 빛날 수 있기를 바란다.
백훈승은 독일 하이델베르크 대학을 거쳐 노르트라인 베스트팔렌 (Nordrhein-Westfalen) 주 정부 장학생으로 지겐 (Siegen) 대학교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하고 ‘자기의식과 욕망 . 헤겔에 있어서의 욕망의 구조·발생·전개에 관한 연구’ ( Selbstbewuβtsein und Begierde. Eine Untersuchung zur Struktur, Entstehung und Entwicklung der Begierde bei Hegel, Peter Lang, 2002) 이라는 논문으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고 1999 년 지겐 대학교 연구상( Studienpreis) 을 수상하였다 . 현재 전북대학교 인문대학 철학과 교수이며 , 2015~2016 년 한국헤겔학회 부회장을 역임했다 . 저서로는 <피히테의 자아론: 피히테 철학 입문>(신아출판사 , 2004), < 칸트와 독일관념론의 자아의식 이론> ( 서광사 , 2013), < 철학입문> ( 전북대학교출판문화원 , 2015), < 헤겔 <법철학 강요> 해설 : < 서문 > 과 < 서론 >>( 서광사 , 2016), < 서양근대철학> ( 전북대학교출판문화원 , 2017), < 누가 추상적으로 사유하는가 ?>( 서광사 , 2017) 가 있고 , 역서로는 <시간과 시간의식> ( 간디서원 , 2006), < 피히테 , 쉘링 , 헤겔> ( 인간사랑 , 2008) 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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