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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8.06.29 15:43 수정 : 2018.06.29 15:43

최근 한국칸트학회가 기획해 출간하는 칸트 전집과 다른 전집의 번역자 백종현 서울대 명예교수(철학과) 사이에 번역어 등을 놓고 논쟁이 뜨겁다. 지난 19일 기고문을 보내왔던 이종훈 춘천교육대학교 윤리교육과 교수가 이후 백종현 교수와 철학자 전대호 쪽에서 제기한 비판에 답하는 기고를 다시 보내왔다. (편집자 주)

▶관련기사

① 한국학술번역 ‘현주소’ 보여준 칸트 전집

② 칸트 전집 번역, 논쟁이 시작됐다

③ [기고] 자국어로 옮기는 것만이 번역인가 / 이종훈

④ “백종현 번역어 바로잡으려 전집 내”

⑤ [기고] 백종현 번역어 심각한 문제 있었다 / 김상봉

⑥ [기고] ‘트란스첸덴탈’을 ‘초월적’으로 번역하는 것이 심각한 왜곡이라고? / 전대호

⑦ [기고] ‘한길사 판 칸트전집’ 문제는 불순한 기획과 불법적 홍보다 / 백종현

⑧ [기고] 백종현과 전대호의 비판에 대한 대답 / 김상봉

⑨ [기고] 번역자의 자세에 관하여 / 이충진

한국칸트학회가 기획한 <칸트전집>에 대해 백종현 교수가 제기한 것으로 알려진 이의 가운데 용어 번역과 관련해 “핵심 용어인 a priori를 번역하지 않고 발음대로 ‘아프리오리’로 통일한 것”을 비판한 것과, “기존의 말에 새로운 뜻을 추가하거나 신조어를 사용해서라도 남김없이 자국어로 옮겨야만 하며, a priori는 ‘선차적’(先次的), transzendental(트란첸덴탈)은 ‘초월적/초월론적’이 가장 적합하다”고 제안한 것을 다음과 같이 반박한다.

우선 백 교수는 이미 자신이 번역한 책들에서 a priori를 ‘선험적’, transzendental을 ‘초월적’(아주 드물게 초험적/초월론적), transzendent(트란첸덴트)를 ‘초험적’이라고 정리한 바 있다. 그렇다면 ① a priori는 궁극적으로 ‘선험적’인지 ‘선차적’인지, ② ‘초험적’의 원어는 transzendental인지 transzendent인지, ③ transzendental은 어느 때 ‘초월적’이고 어느 때 ‘초월론적’인지, 또한 ‘론’이 붙은 것과 안 붙은 것에는 가령 하이데거(M. Heidegger)의 ‘존재적’(ontisch)과 ‘존재론적’(ontologisch) 같은 차이가 있는지 분명하게 밝혀야 한다.

더불어 “번역은 남김없이 자국어로 옮겨야만 한다”는 주장은 궁색한 억지다. ‘포스트모던(니즘)’ ‘포스트휴먼’ ‘딜레마’ ‘에로스’ ‘에피스테메’, ‘헬레니즘’ 등 어떤 말로 번역해도 그 의미를 충분히 담아낼 수 없을 경우 차선책으로 발음대로, 심지어 최근 출간된 <니체전집>은 이제껏 ‘초인’으로 번역한 Uebermensch도 ‘위버멘쉬’로 표기한다. 반대로 저명한 영어사전에도 ‘화병’(火病), ‘온돌’ 등은 어떤 번역도 적절하지 않아 우리 발음대로 ‘Hwabyung’ ‘ondol’로 등재하고 있다.

그런데 백 교수의 스승인 고 최재희 교수는 transzendental을 ‘선험적’으로, a priori를 ‘선천적’으로 번역했다. 백 교수의 선배이자 동료 교수인 고 한전숙 교수는 <현상학의 이해>(1984)에서 “(…) 안호상 박사가 경험을 가능하게 한다는 뜻으로 ‘정험적’(定驗的)이라 번역한 것은 내용상 타당하다. 그러나 transzendent라는 말과의 관계로 볼 때 ‘초월론적’이라는 번역이 제일 적합다고 생각한다”(328쪽)면서도 곧 이어 “이 말을 관례에 따라 ‘선험적’이라 하고, a priori도 ‘선천적’이라 한다”고 밝혔고, <현상학>(1996)에서 “우리는 a priori는 대개의 경우 원어의 발음대로 ‘아프리오리’로, transzendental을 관례에 따라 ‘선험적’으로 번역한다”(151쪽 주 20)고 했다. 10여 년 지나면서 transzendental은 변함없이 ‘선험적’이지만, a priori를 ‘선천적’ 대신 ‘아프리오리’로 옮긴 것은 ‘선천적’이라는 말로는 ‘생득적’이라는 의미만 크게 부각되어 적절하지 않다고 판단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이와 같이 견해가 달라도 관례를 존중해 따른 것은 이들 용어의 역사적 맥락과 정확한 의미를 몰랐기 때문이 아니라, 학자마다 다른 용어를 씀으로써 공부하는 이들에게 혼란만 가중시켰던 것을 극복하기 위한 ‘합리성’ 때문이다. 그래서 한국현상학회도 현상학의 창시자인 E. Husserl까지 ‘훗설’ ‘후싸르’ ‘후셀’ 등으로 제각기 표기했던 것을 ‘후설’로 쓰기로 약속했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을 모를 리 없을 백 교수는 1990년경부터 이 용어들을 완전히 다르게 표기하기 시작했다. 물론 지금처럼 그 당시에도 ‘발음대로 아프리오리로 표기하는 것은 번역이 아니다’라고 이의를 제기했는지 궁금하다. 어쨌든 이들 용어를 포함해 예전과 다르게 표기한 많은 개념은 학회의 공식적 논의나 검토를 거치지 않은 채,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았으니 곧 ‘공인된 것이다’라는 듯) 주로 이미 번역된 저술을 새롭게 번역하면서 일부의 제자들을 중심으로 점차 확산되었다. 용어 번역의 기준이 어느새 특정 소수가 주도하는 ‘학벌 권력’이 된 것이다.

이렇게 10여 년 지나자 백 교수는 “‘초월적’, ‘초월철학’이라는 중심 용어의 새 번역어는 처음의 생소함을 벗어나서 이제 어느 정도 익숙하게 사용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순수이성비판> 제1권, 7쪽)고까지 자평한다. 이 말을 달리 보면, 학계의 혼란은 그만큼 더 극심해진 것이다. 여기서 용어 번역의 또 다른 기준으로 ‘익숙함’을 들었다면, 그때까지 학계에서 익숙하게 사용해 왔던 용어를 그처럼 바꿔야 할 정당성 역시 없어진다.

다른 한편 ‘인식은 경험과 더불어(mit) 시작하지만 경험에서(aus) 나오지 않는다’는 칸트의 기본 테제와 그의 저술에 빈번히 등장하는 ‘a priori한(선험적) 종합 인식 또는 종합 판단’이라는 문구는 a priori를 ‘선험적’으로 번역하면 의미의 내용상 서로 충돌하지 않는가. 또한 “대상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대상을 인식하는 방식을, 이것이 a priori하게(선험적으로) 가능한 한에서, 일반적으로 다루는 모든 인식을 나는 transzendental(초월적)이라 한다. 그러한 개념들의 체계를 Transzendental-Philo.(초월철학)이라 부를 것이다”(<순수이성비판>, B 25)에서 백 교수가 정리한 괄호 속의 번역은 상당히 어색하고 혼란스럽지 않은가. 왜냐하면 ‘초월’이라는 말이 일상적으로 ‘탈세속성’(脫世俗性)을 연상시키며, 대상이 아니라 인식하는 우리 의식의 방식을 다루는 것을 ‘초월적’이라 하면 무엇을 넘어서는지 그 의미가 왜곡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무튼 백 교수가 이에 동의하지 않더라도, 이러한 견해가 틀렸다고 단정해서 무시하면 안 된다. 그리고 마치 점령군 사령관이 겁박하듯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의견을 강제하거나 후학들을 초보자로 취급해 섣불리 가르치려 해서도 안 된다.

학문이 발전하려면 때로는 스승이나 선배를 뛰어 넘어서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이 잘못 이해한 점을 바로 잡거나 미처 파악하지 못한 부분을 밝혀내는 데 있지, 특정 용어를 군사작전 하듯 일방적으로 바꾸는 데 있지 않다. 물론 이들 용어 번역과 관련해 학계의 전통과 관례를 따랐던 많은 학자들이 공들여 이룩한 모든 업적을 일거에 낡은 유물로 낙인찍어서도 안 된다. 문명국가에서 이러한 측면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면, 이제껏 많은 업적을 쌓으며 꽃길만 밟아왔는데도 더 많이 더 오래 소유하려는 노욕(老慾)으로 비칠 것이다.

※이종훈 교수는 서양철학(현상학)을 전공하고, 2011~12년 한국현상학회 회장을 역임했다. 저서로는 <현대의 위기와 생활세계>, <후설현상학으로 돌아가기> 등이, 번역서로는 에드문트 후설의 <순수현상학과 현상학적 철학의 이념들>(전 3권), <시간의식>, <데카르트적 성찰>, <유럽학문의 위기와 선험적 현상학>, <현상학적 심리학>, <형식논리학과 선험논리학>, <엄밀한 학문으로서의 철학>, <경험과 판단>, <논리연구>(전 3권), <수동적 종합>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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