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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현’의 관점에서 볼 때, 진정으로 뛰어난 정치 행위란 관련된 민의를 모사하는 게 아니라 그 열망을 정책에 얼마나 입체적으로 잘 구현하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사진은 1월30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 본회의장에서 열린 임시국회 개회식 모습. 강창광 기자 cha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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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김영민의 논어에세이
⑫ 모사와 재현
재현 행위는 해당 대상을 그대로
구현할 수는 없음을 인정한 상태에서
그 대상을 ‘대신’하고자 하는 것이다
진정으로 뛰어난 정치 행위는
관련된 민의를 모사하는 것보다는
그 열망을 정책에 얼마나 입체적으로
잘 구현하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대의정치는 민의에 기반해야 하지만
민의를 모사하는 것으로 충분치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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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현’의 관점에서 볼 때, 진정으로 뛰어난 정치 행위란 관련된 민의를 모사하는 게 아니라 그 열망을 정책에 얼마나 입체적으로 잘 구현하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사진은 1월30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 본회의장에서 열린 임시국회 개회식 모습. 강창광 기자 cha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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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점점 한갓 사교장 혹은 성추행 장소가 되어가는 이 땅의 장례식장에서 유일하게 맑은 정신을 유지할 수 있는 때는 돌아가신 분의 영정사진 앞에 서는 순간이다. 그 순간 향불 너머의 영정사진이라는 재현물(representation)은 두 가지를 동시에 말한다. 이제 이 사람은 이 세상에 없다는 것, 그리고 이 사진을 보는 당신은 그를 상기해야 한다는 것. 부재를 인정할 때에야 비로소 받아들이게 되는 어떤 현존이 거기에 있다.
이 영정사진을 애써 일찍 준비하고자 했던 망자를 생각한다. 이 사람은 칠순을 넘기면서부터 늘 자신의 영정사진을 찍어두고 싶어 안달했지. 자신의 주검에 인사하러 오는 문상객들에게 추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 했지. 망각의 바다로 건너가기 전에 잠시 서성거리는 이 장례식장에서 자신의 이미지를 통제하고 싶어 했지. 자신의 데스마스크(사람이 죽은 직후에 얼굴을 본떠 만든 안면상)가 곧 영정사진이 되기를 원하지는 않았지. 온화하고 품위를 잃지 않은 모습을 영정사진에 담고 싶어 했지. 가능하면 젊어 보이는 사진을 남기고 싶은 나머지 포토샵 프로그램으로 이미지 보정을 부탁했지.
영정사진은 망자를 상기시키기 위해 거기에 있지만, 영정사진이 곧 망자는 아니다. 즉 재현은 그 어떤 대상을 상기시키지만 그 대상 자체는 아니다. 어떤 풍경화도 그것이 표현하는 풍경 자체는 아니다. 어떤 나라의 지도도 그것이 가리키는 나라 자체는 아니다. 어떤 지구본도 지구 자체는 아니다. 호르헤 보르헤스는 이 점을 혼동하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지는지 일종의 사고실험을 통해 보여주었다.
누군가 현실을 완벽하게 재현하는 궁극의 지도를 만들겠다고 꿈꾼다. 그는 실제의 풍경과 모든 점에서 일대일로 정확하게 대응하는 지도를 만들기 시작한다. 그의 작업이 성공적으로 진행되면 될수록 그 지도는 점점 더 커져 간다. 그래서 마침내 지도가 현실과 완벽하게 조응하게 되었을 때, 그 지도의 크기는 현실과 똑같은 크기가 된다. 문제는 그렇게 큰 지도는 들고 다닐 수도 없다는 것이다. 게다가 현실과 똑같다면 그냥 현실을 들여다보면 되는데, 무엇 하러 똑같은 크기의 지도를 들여다보겠는가?
현실에 ‘대하여’ 재현하기
역사 역시 지도처럼 재현이다. 따라서 우리는 역사에 대해서도 보르헤스의 사고 실험을 적용해볼 수 있다. 조선시대 연구자 한 명이 조선시대를 완벽하게 재현하는 역사책을 쓰겠다고 마음먹는다. 그리하여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비변사등록>, <추안급국안> 등 모든 관련 자료를 섭렵하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그는 (사료 역시 재현이지만) 실제 사료와 모든 점에서 일대일로 정확하게 대응하는 아주 상세한 역사서를 쓰기 시작한다. 그의 작업이 성공적으로 진행되면 될수록 그의 역사책은 점점 더 두꺼워져 간다. 그래서 마침내 그 역사책이 현존하는 조선시대 사료와 완벽하게 조응하게 되었을 때, 그 역사책의 분량은 현존하는 사료의 분량과 똑같게 된다. 문제는 그렇게 두꺼운 역사책은 수십년이 걸려도 다 읽을 수 없다는 것이다. 게다가 사료와 똑같다면 그냥 사료를 들여다보면 되는데, 무엇 하러 똑같은 분량의 역사책을 들여다보겠는가?
흥미롭게도 정치학의 ‘대의’(代議)라는 용어는 예술에서 ‘재현’이라는 용어와 마찬가지로 ‘representation’을 번역한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대의민주주의에 관해서도 보르헤스의 사고 실험을 적용해볼 수 있다. 어느 정치인이 민의를 완벽하게 대변하는 궁극의 민주정치를 실현하겠다고 꿈꾼다. 그리하여 그는 실제의 국민들 뜻과 모든 점에서 일대일로 정확하게 조응하는 정책을 만들기 시작한다. 그의 정책이 자신의 이상에 접근하면 접근할수록, 그의 정책집은 점점 더 자세하고 두꺼워진다. 그래서 마침내 그의 정책이 모든 국민의 뜻에 일일이 완벽하게 조응하게 되었을 때, 그 정책집은 어마어마하게 복잡하고 큰 문건이 된다. 문제는 그런 정책은 한번 설명하는 데만도 10년이 넘게 걸린다는 것이다. 게다가 국민 개개인의 뜻과 정책이 정확히 일치한다면 그냥 국민을 일일이 찾아가서 물어보면 되는데, 무엇 하러 똑같은 시간을 들여 그의 정책안을 들여다보겠는가?
재현이란 어떤 대상이 부재하다는 전제 속에서 그 대상의 대체물을 제시(present)하는 것임을 기억한다면, 이런 모사의 강박에서 좀더 자유로워질 수 있다. 즉, 재현 행위는 해당 대상을 그대로 구현할 수는 없음을 인정한 상태에서 그 대상을 ‘대신’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래서 앙커르스밋은 재현을 모사와 동일시하지 말고, 좀더 창의적이고 예술적인 자세를 취하라고 권고한다. 현실을 모사하려고만 하는 이는 늘 ‘더 진짜인’ 현실에 패배할 수밖에 없다. 이런 식이라면 세상의 모든 화가와 사진사는 연속되는 패배에 지쳐 우울증에 걸리고 말 것이다. 실로 모사는 재현이 현실과 맺을 수 있는 하나의 관계에 불과하다. 더 창의적인 재현은 현실‘을’ 모사하고자 하는 집착을 버리고, 현실에 ‘대하여’ 재현하려 든다. 영정사진이 얼마나 훌륭한지는, 그 영정사진이 망자의 검버섯 하나하나를 얼마나 핍진하게 보여주고 있느냐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망자에 ‘대하여’ 얼마나 잘 이야기해주고 있느냐에 의해 결정된다.
신의 뜻을 재현하려 한 중국 고대 정치
역사도 마찬가지다. 과거를 그대로 복제하는 데 치중하는 역사서는 모사의 관점에서는 훌륭할망정 창의적인 재현으로서는 불충분하다고 할 수 있다. 진정으로 뛰어난 역사책은 해당 과거를 그대로 복제해서 전시하려 들지 않고, 보여주고 싶은 어떤 특질을 이야기의 형식을 빌려 설득력 있게 전달해준다. 과거를 복제하려고만 드는 역사가는 늘 ‘더 진짜인’ 사료에 패배할 수밖에 없다. 이런 식이라면 역사가는 패배하기 바쁜 나머지 자신의 역사책을 결국 탈고할 수 없을 것이다. 역사서가 얼마나 훌륭한지는 사료를 얼마나 핍진하게 반복하고 있느냐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과거에 ‘대하여’ 얼마나 잘 이야기해주고 있느냐에 의해 결정된다. 그 과정에서 사료는 필수불가결한 밑바탕이지만, 역사 그 자체는 아니다.
정치도 마찬가지다. 민의를 그대로 모사하는 데 치중하는 정치 행위는 ‘모사’의 관점에서는 훌륭할망정 창의적인 대의정치의 관점에서는 불충분하다고 할 수 있다. 재현의 관점에서 진정으로 뛰어난 정치 행위는, 관련된 민의를 모사하는 것보다는 그 열망을 정책에 얼마나 입체적으로 잘 구현하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민의를 복제하려고만 드는 정치인은 늘 여론조사에 끌려갈 수밖에 없다. 진정으로 탁월한 대의정치는 인기투표에 의존하는 정치와는 구별된다. 뛰어난 대의 정치인은 민의를 적극적으로 해석하고, 사람들이 미처 정의하지 못하고 구체화되지 못한 일까지 탐구하고 정책으로 번역해낸다. 대의정치는 민의에 기반해야 하지만, 민의를 그저 모사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민의가 정치의 명시적인 기반으로 인식되기 전에, 고대 중국의 정치는 무엇을 재현하고자 했나? 중국 고대 정치에서 최초로 재현해야 했던 것은 신의 뜻이었다. 제사장이었던 당시의 통치자들은 거북의 등껍질을 태워가며 신의 의견을 물었다. 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는 갑골문은 그 제사장들이 신과의 소통을 독점하며 자신의 권력을 정당화한 기록이기도 하다. 비록 그 제사장들은 신과 의사소통을 하고 있다고 주장했지만, 그 갑골문을 오롯이 들여다보고 있으면 그 갑골문이 두 가지를 동시에 말해준다. 신은 이 세상에 없다는 것, 그렇기에 이 땅의 사람들은 신의 뜻을 재현해야만 했다는 것. 신의 부재를 인정할 때에야 비로소 가능하게 되는 재현의 세계가 거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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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사회의 갑골문은 당시 통치자였던 제사장들이 신과의 소통을 독점하며 자신의 권력을 정당화한 기록이기도 하다. 갑골문자가 새겨진 거북 등껍질.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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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을 가장한 쇼의 흔적을 남기는 것
<논어> 속의 공자는 신의 뜻을 재현하는 데 골몰하던 제사장들과 거리를 두기 시작한 당시 사람들 중 하나였다. 그러한 이들에게 이제 재현해야 할 대상은 신이라기보다는 그들이 상상했던 주나라 건국 시기의 문명이었다. 그리고 공자가 보기에 그 찬란했던 고대 문명은 이제 사라질 위기에 처해 있었다. 동시에 <논어> 속의 공자는 그 문명을 되살려 공동체에 구현할 수 있는 정치적 권력은 자기에게 결국 주어지지 않을 것임을 예감했던 것 같다. 그럼에도 그는 포기하지 않고 전진한다. 그래서 석문의 문지기는 공자를 일러 이렇게 말했다. “그 안 되는 줄 알면서도 하는 사람 말입니까?”(是知其不可而爲之者與, <논어> ‘헌문’(憲問)편)
끝내 포기를 모르며 질주했던 공자의 모습과 좋은 대조를 이루는 것은 일본의 사상가 모토오리 노리나가이다. 공자처럼 그 역시 세상은 이상적인 과거로부터 멀어지며 타락해왔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공자와 달리 모토오리 노리나가는 이상적인 과거로 감히 돌아갈 수 있다고 꿈꾸지 않았다. 억지로 돌아가려는 태도 자체가 그 이상적인 정신과는 어긋나는 일이다. 난세가 도래한 것 역시 신의 뜻인 것이다.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부산을 떨며 무리하게 저항하지 않고 그저 평범하게 살아가는 것이다. 별난 행동을 하지 않고 칼럼을 쓰지도 않고 그저 숨을 쉬며 살아가는 것이다.
와타나베 히로시가 잘 보여주었듯이, 이것이 곧 모토오리 노리나가가 그저 현실에 안주하며 평범하게 살다 죽었다는 말은 아니다. 모토오리 노리나가는 평범한 삶을 산 것이 아니라, 평범을 가장한 삶을 살았다. 세상과 불화할 만한 어떤 별난 일도 하지 않았음에도, 그 평범함은 하나의 쇼였다. 그 역시 세상을 진정으로 받아들이지는 않은 것이다. 그러한 모토오리 노리나가에게 허락된 마지막 별난 선택은, 세상에 드러난 자신의 일생은 평범을 가장한 쇼였다는 흔적을 남기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치밀하게 자신의 장례식을 준비한다. 나의 무덤은 평범하게 세상의 통례에 따라 만들어라. 그리고 세상에서 하는 대로 똑같이 장례를 집행해라. 그러나 자신의 진짜 시신은 그곳에 넣지 마라. 대신 야마무로야마 정상으로 가져가서 묻고 그 옆에 벚나무 한 그루를 심어다오. 그리고 나의 글을 읽고 제대로 감응한 사람만이 이 진짜 무덤을 찾아올 수 있게 하라. 그리하여 모토오리 노리나가는 자신의 영정사진을 만들듯이, 자신의 진짜 무덤의 모습을 정성스레 유언장에 그려두었다. 그리고 자신의 자화상 옆에는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아침 해에 아름답게 빛나는 산벚꽃이랄까.”
시작이 있는 것은 끝이 있기 마련. 더 나은 세상을 열망했던 사상가들도 그렇게 죽음을 맞이한다. 열역학 제2법칙에 따르면 이 지구도 언젠가는 차갑게 식을 것이다. 재현에 종사하는 이들의 궁극적인 소망은 이 지구의 영정사진을 찍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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