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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포함해 칭기스와 숄반, 케렐과 사샤 등 다섯 남자는 새 길을 닦았다. 올겨울 다른 이들이 다닐 길이기 때문에 첫 길은 신중하게 내야 했다. 그래서 가끔 어렵게 닦은 길을 포기하고 돌아와 다시 새 길을 닦았다. 뒤에 오는 사람에게 더 좋은 길을 내주기 위해서. 공원국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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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공원국의 유목일기 ⑨ 투바에서 띄우는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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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포함해 칭기스와 숄반, 케렐과 사샤 등 다섯 남자는 새 길을 닦았다. 올겨울 다른 이들이 다닐 길이기 때문에 첫 길은 신중하게 내야 했다. 그래서 가끔 어렵게 닦은 길을 포기하고 돌아와 다시 새 길을 닦았다. 뒤에 오는 사람에게 더 좋은 길을 내주기 위해서. 공원국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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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가끔 유목민은 방위도 없이 초원을 바람처럼 떠도는 사람들이라 오해한다. 그러나 인간이 사회 속에서 사는 한 그 누구도 길 없는 곳으로 다닐 수는 없다. 처음 길 없는 곳으로 들어간 용감한 이들 대부분은 길을 내다 쓰러졌을 것이다. 유목민들은 물과 풀을 찾아 오히려 더 좁은 길을 다녀야 했다. 서기전에 기록을 남긴 이란 유목민들은 길 바로 옆에도 온통 죽음의 구덩이를 파고 누군가 발을 헛디디기를 기다리는 존재들이 득실거린다고 믿었다. 움직일 수 없을 만큼의 눈이 오고, 눈을 뜰 수 없을 정도로 바람이 그치지 않아 가축이 쓰러지면 인간도 쓰러지는 일은 다반사였다. 인간에게는 길이 필요하다.
하지만 유라시아 대륙의 유목민들은 광폭한 길의 두 얼굴에 몸서리를 쳐왔다. 1917년, 러시아 혁명이 성공한 이래 100년 하고도 1년이 지났다. 타지키스탄, 키르기스스탄처럼 유목민들 중 일부는 옛 나라를 되찾았고, 투바인, 부랴트인처럼 일부는 최소한 옛 전통과 정체성을 다시 이야기한다. 솔제니친의 표현을 빌리자면, 소비에트 시절 ‘볼셰비키 외에 정치적인 사상을 가진 이들의 머리는 순서가 뒤바뀔지언정 어김없이 어깨 위에서 굴러떨어졌다’.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최소한 1991년 이후 사상 면에서는 제로(0)에서 다시 시작해야 한다. 하지만 연방을 받치던 얼음 기둥이 녹아 무너지자, 그 충격으로 사회는 물론 개인의 삶마저 산산조각이 났다. 누군가 평생을 바쳐 모은 연금으로 임종 시 자기가 누울 관 하나도 구할 수 없다면, 차라리 얼음 기둥이나마 있던 겨울로 돌아가자고 한들 이상한 일은 아니다. 어제의 선행이 오늘의 악행으로 둔갑하는 시점, 그 누가 행동을 하고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낼 수 있을까? 언어도단, 말이 길을 잃었다.
독재의 길, 자본의 길
과거의 언어는 청결을 지향했다. 소비에트 시절 당국의 표현을 빌리면 ‘숙청’(肅淸). 그러나 1990년대, 소비에트 연방의 시대가 가고 찾아온 민족자결의 시대는 어떠했던가? 아르메니아인들과 아제르바이잔인들이 서로를 ‘청소’하고 세르비아인이 알바니아인을 ‘청소’했다. 그들 모두 한때 나치의 인종주의에 맞서 대동단결한 연방의 민족들이었다. 심지어 체첸의 수도로 들이친 이는 소비에트 붕괴를 지지한 옐친이었다! 빵이 부족할 때, 민족주의는 더 이상 전체주의 사회의 얼음을 깨뜨리는 도끼가 아니라 너의 살을 발라 내 배를 채우는 악마의 흉기다. 다행히 소비에트의 유목 변경지대에서는 학살이 일어나지 않았지만 민족주의 열풍은 기어이 오시의 우즈베크인 학살을 낳았다. 진자는 진폭이 클수록 난폭한 속도로 흔들린다. 쇳덩이가 좌우를 오가는 동안 가운데 있는 사람들이 모두 갈려나갔다. 이곳 사얀산맥 가축 순록의 운명도 그랬다. 1949년의 집단화 과정에서 가축 반수가 사라졌고, 1990년대 이후 사유화 과정에서 거의 90%가 사라졌다. 그야말로 ‘백년 주기의 난폭한 진자 운동’이 반복됐다.
어쩌면 우리들은 길의 진짜 의미를
많이 잃어버린 게 아닐까?
옛날이야기에선 모두 길을 떠나잖아
길 위에서 능력을 얻고 사람을 얻었지
길이 그저 수단이 되면서, 사람들은
길에서 지루함을 견딜 수 없게 되었어
커다란 두 점을 잇는 것이 길이 아닐 거야
수많은 작은 점이 모인 것이 길인 거지
지금 있는 곳은 정거장에 불과할지 몰라
하얀 언덕을 까만 나무줄기가 빽빽이 매우고 있는 사얀산맥. 그 경건하리만치 순결한 공간을 지나며 ‘새 길’을 그려보았다. 문화는 사회 속에서 인지될 수 있는 유기적인 형식들의 총체이므로, 완성된 그림처럼 전체로서 의미를 가진다. 회화와 음악은 분명 조화를 만드는 형식을 갖고 있다. 문명을 바꾸려는 사상에 예술의 길을 도입할 수 있을까? 증명된 바로는 소비에트나 월스트리트나 결코 미래의 길은 아니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행위 자체가 목적인 유기적인 형식이 없기 때문이다. 독재가 추구하는 길은 폭력을 통한 획일화이며, 자본이 따르는 길은 낙인찍기를 통한 배제다. 20세기의 사상들은 그 내용이 무엇이건 간에 표현 방식은 폭력과 배제의 형식을 충실하게 따랐다. 이제 문화의 일차적인 표현 양식인 말하기의 길부터 재구축하여 사상이 움직이는 길을 다시 닦아야 하지 않을까? 나는 ‘어린이에게 말걸기’, 서사가 생겨난 이래부터 이야기꾼들이 써온 ‘낮은 눈높이에서 말하기’를 다시 눈여겨본다. 이어지는 편지는 나의 아이들에게만 보내는 것이 아니라 한국어를 쓰는 모든 어린이들에게 말을 걸어보고자 보내는 짤막한 인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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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이서 함께 사는 아나톨리 할아버지의 오두막. 여름에 도끼로 나무를 베어 지었다. 공원국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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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들아, 며칠 있으면 새해다. 세상 모든 아빠들처럼 이때면 너희들과 보낸 일상이 사무치게 그립다. 타이가에서 목동들이 걸리는 병 이름은 대개 그리움이다. 겨울 사얀 타이가에는 많은 아빠들이 아이들을 떠나 혼자, 혹은 몇몇이 살아간다. 숲에서 너희 같은 아이들을 보고 싶지만 아직은 그런 때가 아닌가 보다. 이 숲은 지난 몇십년 동안 유라시아에서 가장 안전하게 보존된 것 중 하나란다. 하지만 사람들의 삶은 그러지 못했지. 순록 목축은 ‘생산성이 없는 산업’이라고 낙인찍히고, 목동들은 반(半)강제로 산을 내려갔다. 하지만 지금은 도시를 떠나 다시 숲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이 있단다. 지금 그 사람들이 새로 길을 만들고 있어.
“내가 사는 곳 숲이 제일 젊다. 오늘 젊은 숲까지 가자.”
칭기스 아저씨는 ‘원시림’을 ‘젊은 숲’(말라다야 타이가)이라 불러. 사실 인간의 손이 닿지 않은 오랜 숲인데 말이지. 투르크식인지 모르겠지만 그 표현이 썩 마음에 들었다. 가장 젊은 숲까지 가는 길을 내는 게 당장 우리가 할 일이었어. 칭기스 아저씨를 빼면 모두 아빠들이었고.
첫 길은 신중하게 내야 한대
아자스 호수는 산속에 있는 자그마한 바다야. 그 호수 위를 달리는 설상차의 모습은 꼭 물기둥을 뿜는 고래 같아. 시속 100㎞로 달리면 얼굴이 하얗게 얼지. 그렇지만 하얀색 잔잔한 물결 위를 달리는 듯 신난단다. 얼굴을 살짝 덮은 살얼음은 바람을 막어줘. 호수를 건너고 얼마 안 가서 아예 길이 없어졌어. 새로 내린 눈이 대지를 하얗게 덮어서 눈 아래 무엇이 있는지 모르니까 첫 길을 낼 때 순록치기들이 가장 많이 다친대. 그래도 길을 뚫어야 산마루까지 밀가루와 소금을 옮겨가지. 전구와 태양광 집광판도 바꿔야 하고. 길이 없는 곳부터 아빠는 케렐의 작은 설상차에서 내려 숄반의 큰 차로 갈아탔어. 케렐이 먼저 길을 인도하고 우리는 뒤를 따랐지.
우리 인간의 눈으로 보면 타이가의 삶은 물론 자연현상까지 모순투성이야. 설상차가 달리며 눈을 확 걷어젖히면 인동초 같은 파란 풀 잎사귀가 드러나는데 참 예뻤어. 그런데 대기에 노출된 잎사귀는 금방 얼어 죽는대. 눈이 이불인 셈이지. 얼음은 정말 무서워. 종종 설상차를 끌고 들어가고 가끔 사람마저 삼켜버리지. 하지만 그 얼음이 없으면 거미줄처럼 이어진 예니세이강 지류들을 건너 설상차가 달릴 수 없단다. 아늑한 가을이 가고 추운 겨울이 와야 산과 마을이 연결되는 것도 속상하지. 이 겨울에 어린이들은 움직이기 어렵단다. 하지만 자연은 인간이 마음대로 구부릴 수 없는 자신만의 길이 있나 봐. 물건을 나르는 설상차도 고맙지만 얄밉기도 해. 이 차가 먼 길을 달리면서 가족은 산을 내려가 수백리 먼 마을에 자리를 잡았지. 그래서 겨울 산에는 젊은 엄마도 아이도 없어. 순록치기 아저씨들은 길고 긴 밤을 혼자서 지내야 해. 아이들이 마을에 있으니, 우리는 길을 닦아야지. 순록과 아빠들이 마을을 드나들 수 있도록.
설상차 짐칸은 안락하지 않아. 오르막이면 밀고 내리막에는 무릎을 꿇고 허리의 충격을 흡수해야 해. 그렇지만 어떤 신체의 고통으로도 없앨 수 없는 타이가의 장엄함을 맛볼 수 있단다. 12시 무렵 첫 순록치기 야영지, 발레리 아저씨의 천막으로 들어섰어. 멋진 봉지 커피 한 잔과 빵을 얻어먹었는데 커피크림은 한국에서 수입한 것이었어. 타이가에서는 어떤 사람들을 만나건 주인은 정성껏 대접을 해. 그러면 주인도 외롭지 않아서 좋을 거야. 하긴 온종일 겨우 몇 명이나 지나가겠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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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톨리 할아버지와 할머니. 친할아버지와 친할머니처럼 푸근하고 마음씨 넓은 분이다. 공원국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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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겨울 다른 이들이 다닐 길이기 때문에 첫 길은 신중하게 내야 한대. 그래서 가끔 어렵게 닦은 길을 포기하고 돌아와 다시 새 길을 닦았어. 뒤에 오는 사람에게 더 좋은 길을 내주기 위해서. 나무를 넘어뜨리고, 구덩이에 돌을 채우고 눈을 넣어 다졌어. 땀이 났다가 바로 얼어붙곤 했지만 신났지. 첫 길을 내는 일이잖아.
이렇게 첫 길을 닦으며 아빠는 계속 반성해. 어쩌면 우리들은 길의 진짜 의미를 많이 잃어버린 게 아닐까? 바리데기 이야기를 알지? 버림받은 바리데기는 머나먼 길을 떠나고, 자신을 버린 사람들을 구제하지. 옛날이야기의 영웅들은 모두 길을 떠나잖아. 그러다 길 위에서 능력을 얻고 사람을 얻었지. 열차는 덜하지만, 요즘 비행기는 그냥 점과 점을 잇는 수단에 불과한 것 같아. 길이 그저 수단이 되면서 사람들은 길에서 지루함을 견딜 수 없게 되었어. 이미 뚫린 길로 모두가 비슷한 길을 가야 하니까 더욱 지루하지. 커다란 두 점을 잇는 것이 길이 아닐 거야. 수많은 작은 점이 모인 것이 길인 거지. 지금 있는 곳이 정거장에 불과할지 모르지.
아, 길에서 늑대의 흔적을 보았어. 아주 큰 짐승을 잡아 끌고 갔더군. 이 숲에서는 늑대가 왕이야. 순록치기 아저씨들은 늑대 흔적이 나오면 꼭 살피지. 몇 놈인가, 어디로 갔나 하면서. 타이가에서 목동은 늑대의 길까지 잘 살펴야 해.
하루를 꼬박 일하고 새해를 한 주 앞에 둔 깜깜한 밤, 드디어 칭기스 아저씨가 말한 세상에서 가장 젊은 숲으로 들어갔어. 아빠는 그곳을 별의 언덕이라 불렀어. 하얀 별이 하늘을 빼곡히 채우고 땅까지 이어져 꼭 밤에 별 눈이 내리는 것 같았지. 칭기스 아저씨가 운전대를 대신 잡더니 별의 언덕을 지날 때 신이 나서 막 달렸어. 오르막이 끝나는 지점이었거든. 칭기스는 숲속의 카레이서야. 그러나 잠깐 신났지만 우리는 곧장 하늘을 날아 눈 둔덕으로 돌진했어. 다행히 아무도 다치지 않았어. 움푹 팬 곳에 눈이 가슴보다 높이 쌓여 있었거든. 컴퓨터가 부서졌지만, 너무 신나서 화도 나지 않았어. 별의 언덕을 지나자 눈부신 설원이 나타났어. 칭기스 아저씨와 우리는 노래를 고래고래 불렀지. 타이가 여행자는 개 짖는 소리를 참 좋아해. 사람을 반기는 소리니까. 그렇게 들어간 곳이, 바로 아나톨리 할아버지의 집이었어. 숄반의 아버지. 친할아버지처럼 푸근하고 마음씨 넓은 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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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를 넘어뜨리고 구덩이에 돌을 채운 뒤 눈을 넣어 다져 길을 낸다. 공원국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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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두막과 우리 집도 이어진 거야
배가 아파서 재빨리 숲속으로 들어가 일을 보았지. 믿을 수 있겠니? 위도가 높은 북반구 타이가에서는 별이 나무 사이를 건너다니다 슬그머니 땅으로 내려앉아. 묵묵히 궤도를 따르지만 모두 다른 빛깔로 다른 시간에 하늘의 길을 지나 숲으로 돌아와. 고단한 밤길을 마치고 통나무집으로 들어간 우리들처럼. 이 통나무집은 셋이 함께 도끼로 만든 것이래. 우리는 순록 이야기에 밤이 가는 줄도 몰랐지.
“옛날에는 여기 사람이 많았어. 이 언덕 저 언덕. 1980년대가 가장 많았던 것으로 기억해. 여기는 복받은 곳이야. 따듯하고, 눈도 적고, 샘도 있지. 여기서 태어나서 도시로 나갔다가 일이 없어 13년 전 돌아왔어.”
할머니까지 포함해 네 사람이 같이 사는 오두막은 웃음이 넘쳐. 필요한 물건을 사려면 사냥을 해야 돼. 올해 숄반은 흑담비 20마리를 잡았지만 초보 사냥군 칭기스는 겨우 2마리. 아빠가 놀렸어.
“칭기스, 이래 가지고 장가가겠어?”
칭기스 아저씨가 받았지.
“내 강아지가 아직 어려서.”
강아지가 좀 더 크면 칭기스 아저씨도 결혼을 하겠지.
별들이 정해진 길을 따르듯 사람에게도 가야 할 길(상도·常道)이 있겠지. 하지만 어떤 별이 얼마나 밝고 큰지는 상관없을 거야. 어두운 별이라도 멀어서 작아 보일 뿐 실제로 작은 게 아니거든. 아빠는 작가야. 언어의 길을 찾고 있지. 작가는 언제나 머뭇거리며 결론을 내지 못해. 빛에 환호하고 그림자에 우는 우유부단한 존재지. 하나뿐인 해와 달을 바라는 대신 뭇별들을 쳐다보며 시간을 보내지.
아빠는 오늘 산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을 위해 하얀 눈 위로 길을 닦았어. 아나톨리 할아버지가, 순록치기들이 돌아오면 다시 이 산맥의 무수한 능선들을 잇는 길이 생길 거래. 그리고 지도를 봐. 길이 다 이어져 있지? 할아버지의 오두막과 우리 집도 이제 이어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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