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친 일행을 기다린 건 사냥꾼 다섯이 한꺼번에 사는 오두막이었다. 고맙게도 그곳에서 빵과 차를 배불리 얻어먹고 기운을 차린 뒤 다시 길을 나섰다. 공원국 제공
|
[토요판] 공원국의 유목일기
⑧ 타이가의 공유오두막
|
지친 일행을 기다린 건 사냥꾼 다섯이 한꺼번에 사는 오두막이었다. 고맙게도 그곳에서 빵과 차를 배불리 얻어먹고 기운을 차린 뒤 다시 길을 나섰다. 공원국 제공
|
파미르에 이어 앞으로 내가 거주할 두 번째 현장조사지는 남시베리아 타이가의 심장 투바의 사얀산맥 고지다. 거대한 산맥으로 보호되던 이 땅의 주민들은 18세기부터 북쪽에서 내려온 이른바 ‘주의자’들에게 상처 입고 모욕당하더니, 20세기 말 체제 붕괴 후에는 준비할 사이도 없이 돈의 체제 한가운데로 던져져 버렸다. 체제 붕괴는 인구 30만의 이 작은 공화국의 산업생산을 거의 반토막 내고 말았다. 영하 30도의 엄동설한에 보드카에 취해 키질(투바공화국의 수도) 대로에 쓰러진 이들에게 내일 어떤 좋은 일이 기다리는지, 직업 없이 온종일 방 안에서 텔레비전을 보는 젊은이에게 언제쯤 일이 생길지 모르겠다. 그래서 나이 든 이들은 종종 소비에트 붕괴 이전 집단농장과 광산에서 일하던 시절이 차라리 나았다고 말한다. 부품처럼 취급을 당해도 일은 있었으니까. 그래도 일은 있었으니까.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 인간집단은 위기 앞에서 수동적으로 기다리며 순순히 잡아먹히지 않는다. 다수가 일을 찾아 공화국 밖 더 큰 도시로 떠났지만, 상당수는 초원으로 숲으로 강으로 돌아갔다. 오랫동안 우량하이(순록치기, 오랑캐의 어원이다)로 불렸던 이들의 후손은 그중에서도 가장 멀고 깊은 곳, 동사얀산맥 타이가로 들어갔다. 시베리아에서 가장 둥치가 큰 침엽수와 자작나무를 품은 타이가는 건재했고, 기다린 듯이 사람들을 맞았다. 몰가치한 경제학 문헌들은 이 이동을 대개 ‘퇴행’(regression)이라 표현하지만, 그것은 혹독한 추위와 고독의 심장으로 들어가서 순록과 새로운 관계를 구축하는 모험이다. 숲으로 돌아간 아나톨리는 지금의 삶을 이렇게 정리했다. “네가 타이가를 진정 원한다면 타이가는 모든 것을 내준다. 하지만 원하지 않는다면 이곳은 지옥이다.”
그러나 숲은 그들을 받아들였건만 인간은 자연을 넘어 사회와 문화 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 타이가의 유목공동체 문화는 이동을 백안시하던 소비에트 전체주의 시스템에 의해 철저히 파괴됐고, 그나마 시스템이 붕괴되면서 발생한 경제적 퇴보에 한번 더 뭉개졌다. 이제 돌아간 이들은 그들의 조상이 사슴을 길들이며 숲을 터전으로 삼았던 태곳적처럼 자신들이 발 디딜 문화적인 공간을 만들어가며 살아가야 한다. 돌아온 숲에서 그들은 다시 무엇을 만들어내고 있는가? 그것은 가능한가? 그래도 나는 어렴풋이 보았다. 그들은 타이가와 사슴의 도움으로 어려운 생존의 줄타기를 하면서, 기억을 더듬고 상상력을 발휘해가며 숲의 문화를 재구축하고 있었다. 앞으로 네 번에 걸쳐 그들의 이야기를 전하려 한다.
|
타이가 산속에 마련된 공유의 오두막에서 허기를 채우고 있는 칭기스와 사샤, 숄반.(왼쪽부터) 공원국 제공
|
그들에게 나는 걱정거리였다
거의 2천년 전 초원으로부터 투르크인들이 도착했을 때 사얀산맥 일대의 토착민들은 투르크어를 받아들이면서도 자신들의 삶의 방식은 버리지 않고 산속으로 더 깊이 들어갔다. 그들 중 하나가 오늘날 토자(Tozha)라고 불리는 민족이다. 그들은 여름에는 버섯을 찾아 나선 순록을 따라다니고 겨울에는 대개 넓은 고위평탄면에 천막을 치고 이동을 멈춘다. 가끔씩 이 천막으로 모여들어 소금을 보충하고 새로운 초지를 찾아 떠난다. 사슴 떼는 우두머리의 지도 아래 부챗살처럼 움직인다. 지형의 굴곡 때문에 순록치기는 썰매 대신 순록을 타고 다닌다. 에벤키처럼 예전에는 그들도 겨우 몇십마리의 순록을 키우면서 고기를 얻는 대신 주로 이동수단으로 썼다. 찻길이 없는 동사얀산맥 일대에서는 지금도 순록이 가장 중요한 이동수단이다.
|
순록치기 지망생이자 세 아이의 아빠인 서른여섯 살 사샤. 능숙한 요리솜씨를 뽐냈다. 공원국 제공
|
공화국의 수도 키질에서 여섯 시간 거리에 있는 토자주의 주도 토라헴에서 그들의 거주지까지 최소한 이틀을 설상차로 달려야 한다. 가는 길이 너무나 험하고 혹독하니 설상차도 뜸하다. 12월 중순 한 해가 끝나갈 무렵, 여관에서 묵으며 하염없이 순록 감독관 아이다가 전해줄 소식을 기다리고 있었다. 사흘째 되던 날 아이다가 산으로 들어가는 설상차가 있다며 찾아왔다. 사실 나는 그들에게는 걱정거리였다. 그래서인지 아이다는 나를 먼저 경찰서로 데리고 갔다. 실종에 대비한 것이라지만, 진짜 목적은 외국인 관리인 듯하다. 하지만 투바공화국의 경찰은 고맙게도 제 발로 산에 찾아간 녀석에게 무슨 일이 생긴들 뭔 대수냐는 투였다. 그렇지만 주민들은 엄동설한에 이방인이 산으로 떠나는 것을 못미더워했다. 떠나는 날 마을 여관 할머니가 엄포를 놓았다.
“거기 엄청나게 춥다. 천막 안에서 자다가 얼어 죽을 수도 있어.”
“내가 안 돌아오거든 우리 집에 전화 좀 걸어주세요.”
할머니가 자지러지게 웃는다. 아이다도 미주알고주알 나를 지도했다.
“설상차가 못 올라가면 내려서 밀어야 한다.”
나는 항상 똑같은 대답을 했다. “나도 야쿠츠크에서 왔다고요.”
우리가 갈 곳은 토라헴에서 200㎞ 거리에 있는 파쉬헴이었다. 짐을 줄이고자 책과 침낭 따위는 모두 숙소에 두고 사슴가죽 한 장과 길양식만 준비해 설상차 짐칸에 올랐다. 일행은 순록치기 지망생이자 세 아이의 아빠인 서른여섯 살 사샤, 순록치기 보르바굴의 아들이며 설상차 운전의 달인인 이십대의 케렐이었다. 사샤와 나는 짐칸에 탔다. 이번에는 설상장화 안에 모양말과 면양말을 신고 다시 모직 덧버선을 두 겹이나 신었다. 지금 산속 온도는 대략 영하 30도쯤이지만 바람이 불면 아주 춥다고 했다.
설상차는 덜컹거리는 대로를 한두 시간 달려 경사지를 올라갔다. 설상차에서 바람을 맞는 고통을 알기에 온몸을 짐싸개 천으로 감싸고 눈만 끔벅끔벅 하늘을 쳐다봤다. 차도가 끝나는 지점부터 아름드리 소나무와 자작나무가 하늘을 가려서 눈이 즐거웠다. 늙은 자작나무는 젊을 때의 하얀 옷을 벗고 검회색의 거북 등짝 같은 두터운 옷을 입어서 언뜻 봐도 신령스러웠다. 고도가 높아질수록 차의 속도가 떨어지고 눈이 깊어져 엉덩이도 편했다. 그러나 이내 경사가 급해져 자주 내려 밀어야 했다. 내리는 횟수가 많아지면서 허기가 졌지만 오후 늦게 젊은 사냥꾼 다섯이 한꺼번에 사는 오두막에 이르러 빵과 차를 얻어먹고 기운을 차렸다.
|
공유의 오두막을 데워주는 난로. 누구나 다음에 올 사람을 위해 장작을 준비해둔다. 공원국 제공
|
순록의 정확한 숫자는 금기
예니세이강이 시작되는 동사얀산맥 안에는 무수한 호수와 물줄기가 얽혀 있다. 호수는 꽁꽁 얼어 건너다니기 쉽지만 흐르는 물을 건널 때는 눈 아래 숨어 있는 ‘강의 숨구멍’을 피해야 한다. 호수를 건너고 널찍한 강이 나오자 나와 사샤는 눈 위를 조심조심 걸으며 숨구멍을 살폈다. 어둑어둑해도 군데군데 눈이 녹은 곳이 보였다. 나는 한쪽 발이 빠졌지만 다행히 금방 빼낸 탓에 장화 속으로 물은 들어오지 않았다. 설상차는 숨구멍을 피해 전속력으로 강을 건너더니 기슭으로 튕겨 올라왔다. 속력이 느리면 얼음 구덩이에 빠진다. 눈이 깊어져 수시로 내려 밀며 열 시간을 달리니 깜깜한 밤중에 자그마한 오두막이 보였다. 불은 없었지만 정성스럽게 가꿔진 오두막이었다. 누구 집이냐고 물으니 케렐이 대답한다. “부란(설상차) 타고 다니는 사람들은 모두 여기서 잔다. 우리가 만들었다.”
그곳은 모두가 이용하는 숙소이자 정거장이었다. 오두막 안에는 기름통, 전기톱, 난로, 기름과 등잔, 심지어 양념도 있고, 장작도 준비돼 있다. 사샤가 등잔을 켜고 불을 지피고 밥을 지었다. 케렐은 내일 근처에 놓을 덫에 소나무 송진을 묻혀 사람 냄새를 지운다. 저녁을 먹자 피로가 몰려들어 금세 잠이 들었다.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일어나니 한밤중에 사샤가 일어나 장작을 더 넣는 중이었다. 새벽에 사샤가 완전히 곯아떨어진 뒤 아침까지는 내가 관리했다.
다음날 아침 밥을 지어 먹은 뒤 출발 준비를 하는 차에 사샤가 말했다.
“여기서 잠깐 기다려라. 장작이 없다. 장작을 준비해둔 후에 떠나자.”
그렇구나, 이 오두막은 이렇게 굴러가는구나. 누군가 다음에 올 사람을 위해 장작을 준비하는구나. 오늘 그대로 떠나야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다. 오늘 우리가 장작을 충분히 준비해두지 않으면 오늘 밤에 도착하는 이들이 위험할 수 있다. 그들은 집을 지을 때가 아니면 절대로 살아 있는 나무를 베지 않는다. 나는 타이가의 ‘공유원리’를 어렴풋이 깨달았다. 나도 그들을 따라 전기톱을 들고 타이가로 들어섰다. 사샤는 허벅지가 푹푹 빠지는 눈을 헤치고 들어가 죽은 나무를 골라냈다. 하필 날이 차서 전기톱이 말을 듣지 않았다. 사샤와 나는 번갈아가며 도끼로 나무를 찍었다. 사샤는 무거운 도끼를 휘두르기에는 몸이 너무 작고 가녀린 사내다. 그러나 그는 언제나 가장 먼저 매섭게 도끼질을 하고 제일 무거운 나무토막을 손수 든다. 꽁꽁 언 아름드리 낙엽송을 넘어뜨리고 토막 내자 케렐이 설상차로 길을 내고 들어왔다. 그렇게 우리는 오두막의 장작을 다시 가득 채웠다.
|
공유의 오두막 전경. 모두가 이용하는 숙소 겸 정거장이다. 공원국 제공
|
칭기스는 천성이 시인이다
공책에다 이런 글귀를 써 준다
“칭기스는 이 세상의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을 가진 초목이고…”
타이가에서 밤을 나려면
누군가는 불을 넣어야 한다
그러나 내가 땐 불이라고
그 빛과 열을 독점할 수는 없다
그러나 무딘 도끼로 아름드리나무를 넘어뜨리고 토막으로 잘라 운반하느라 한나절이 이미 지나갔다. 오후에 출발하려다 커다란 아자스 호수를 살피던 케렐이 말했다.
“먼저 지나간 자취가 없다. 먼저 길을 닦은 후에 데리러 오겠다.”
아자스 호수를 건너면 높은 언덕이 나온다고 한다. 나는 취사담당이 되어 오두막을 치우고 장작을 팼다. 밤에나 온다던 그들이 두어 시간 뒤 해가 한참 남아 있을 때 돌아왔다. 그 뒤로 설상차 한 대가 함께 왔다. 사샤가 벙글거렸다.
“저 친구들이 어려운 길을 먼저 닦아 놓았어. 길이 아주 좋지는 않대. 오늘 하루 더 묵고 내일 같이 길을 닦으면서 가자.”
먼저 길을 닦은 이는 위구르인 칭기스와 토자인 숄반이다. 숄반은 얼굴이 어리숙하고 선했고 칭기스는 웃음기가 넘치는 젊은이였다. 오늘은 사내 다섯이 이곳에서 잠을 자야 한다. 칭기스가 말주변이 있어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눴다.
“칭기스, 순록 얼마나 키우나?”
“순록 숫자? 정확히 이야기할 수 없어. 계속 늘어나거든.”
순록의 정확한 마릿수를 이야기하는 건 실제로 금기다. 옛날 뱃속에 있는 쥐까지 셈에 넣었다가 죽음을 당한 점쟁이 이야기처럼. 우리네 할머니들이 커가는 아이들보고 크다라고 말하지 않듯이 가축의 정확한 수를 말하지 않는 것은 희망과 배려를 담은 표현이다.
|
경사가 급해지면 자주 설상차에서 내려 뒤를 밀어야 했다. 공원국 제공
|
“그냥 나라가 아니라 임뻬리아를 세웠어”
위구르인이 어떻게 순록을 치러 왔을까? 이야기를 이어가고자 없는 지식을 긁어모아 위구르 제국의 역사를 간단히 설명해주자, 칭기스는 내가 마음에 크게 들었나 보다. “임뻬리아(제국), 그냥 나라가 아니라 임뻬리아를 세웠어. 위구르 임뻬리아.” 연신 임뻬리아 타령이다. 칭기스에게 위구르의 역사는 대단히 중요했다. 칭기스는 천성이 시인이다. 내 이야기가 끝나자 공책에다 이런 글귀를 써 준다.
“칭기스는 이 세상의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을 가진 초목이고, 숄반은 이 새하얀 세계에서 가장 빛나는 별이다.”
나는 놀라서 물어보았다.
“칭기스, 자네가 직접 지은 건가? 시인인데!”
칭기스가 자기 심장을 두드리며 씩 웃었다.
“시인? 그래 내 마음에서 나온 것이다.”
잠자리에 들어서도 그는 계속 말을 걸었다.
“원국, 가족이 그립지 않나?”
“그립지. 아내는 여기(왼쪽 가슴), 아들 둘은 여기(오른쪽)에.”
“칭기스는 아이도 아내도 없다. 타이가의 늑대처럼.”
|
다음에 올 사람을 위해 도끼로 나무를 베는 사샤. 반드시 죽은 나무만을 골라내 베어야 한다. 공원국 제공
|
그의 나이 서른여덟. 꼭 마흔이 되는 날 결혼할 거란다. 다섯 명이 눕기엔 좁은 오두막이지만 첫날보다 훨씬 아늑했다. 시베리아에서는 누군가의 입김마저 소중하다. 그날 칭기스는 담요가 없었다. 내 사슴가죽 끄트머리와 케렐의 담요 끄트머리를 연결하고 드러누웠다. 그에겐 나름대로 추위를 이기는 방법이 있었다. 난로의 불이 이글거릴 때 웃통을 벗고 겉옷만 덮고 누웠다. 그러다가 온도가 내려갈 때마다 하나씩 껴입었다. 그때마다 그는 난로를 살폈다. 낮에 길을 만드느라 힘을 쓴 숄반과 케렐은 코를 골았다. 한밤중 어김없이 사샤가 일어나 불을 피운다. 사샤의 코 고는 소리가 높아지는 새벽에는 내가 깨어나 불을 피웠다. 그러나 온도는 점점 내려가고 칭기스는 잔뜩 웅크리고 신음하고 있었다. 내 담요를 칭기스에게 덮어주고 나는 우모 상의를 꺼내 덮었다. 이미 뜬눈으로 새벽을 기다리는 중이었으므로 추위에 압도되지는 않았다. 우리는 불을 꺼뜨리지 않고 밤을 보냈다. 아침에 칭기스는 담요를 거둬 주면서 싱긋이 웃었다. 칭기스는 자기가 사는 타이가로 나를 데려가겠다고 했다.
그날 이후 타이가에서 한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타이가에서 밤을 나려면 누군가는 불을 넣어야 한다. 그러나 내가 땐 불이라고 그 빛과 열을 독점할 수는 없다. 혹여 불이 꺼졌다면 이불 밖으로 나오는 순간부터 엄청난 열을 빼앗긴다. 그렇다면 누가 일어나서 불을 지필 것인가? 여기서 행위자와 수혜자의 불일치 현상, 이른바 공유지의 딜레마가 생겨난다. 체온을 보존하기 위해서는 이불 속에 그대로 있는 것이 낫다. 죽은 나무를 찾아 먼 숲을 헤매느니 바로 옆의 나무를 베는 것이 편하다. 뒷사람을 위해 장작을 준비하지 않고 떠나야 더 빨리 목적지에 도착한다. 우리 조상들은 무엇으로 이 딜레마를 극복했을까? 나는 숲에서 답을 찾아 헤매고 있다.
광고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