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8.01.01 19:10
수정 : 2018.01.12 01:11
【짬】 ‘
이상’ 연구서 펴낸 신범순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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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범순 서울대 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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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을 20년 공부했어요. 그래도 어려워요.” 12월27일 서울대 연구실에서 만난 신범순 서울대 국문학과 교수 얘기다. 김소월 연구로 석사, 해방기(1945~48) 시인들 연구로 박사를 받았다. 하지만 지난 20년 동안 그가 열정을 쏟은 시인은 이상(1910~37)이다. 2007년 펴낸 <이상의 무한정원 삼차각 나비>는 “이상문학을 가장 이상답게 분석한 연구서”(김주현 경북대 국문학과 교수)라는 평을 얻었다. 신 교수는 여기서 이상을 두고 “근대를 초극한 위대한 사상가”라고 했다. 그는 이상 시에 등장하는 ‘삼차각’(삼차원적 입체각)이나 ‘멱’(거듭제곱)과 같은 언어에서 ‘생명력의 증폭’이란 키워드를 추출했고, 여기서 근대를 뛰어넘은 원형적 문명을 읽어내려 한 것이다. 2년 전엔 이상학회를 만들어 지금껏 회장으로 이끌고 있다. 최근엔 <이상 시 전집―꽃속에 꽃을 피우다>(전 2권, 나녹 펴냄)를 출간했다.
전집 두 권의 구성이 특이하다. 600쪽이 넘는 첫 권은 시 원본과 주해다. 2권은 이상 시를 한글로 풀었다. “우리말로 된 시도 어려워요. 먼저 해설을 읽은 뒤 보는 게 좋을 겁니다.”
첫 권은 주석이 빽빽이 달려 마치 플라톤 원전 번역본을 보는 듯하다. “그동안 나온 전집 중엔 고 임종국, 이어령, 김주현, 권영민 교수가 낸 책들이 평가를 받고 있죠. 하지만 이상의 사유와 사상 체계를 제대로 다루지 못했죠.” 그는 자신의 시 전집이 주석과 해석을 본격적으로 단 최초의 저작일 것이라고 자부했다. 일본어로 쓴 초기 작품 ‘황’ 연작에 큰 의미를 둔 것도 눈에 띈다. 이상 시의 중심 주제인 ‘역사 전체와의 투쟁’이 잘 드러났다는 이유에서다. “황 텍스트는 예술·사상적으로 이상의 가장 중요한 시입니다. 식민 권력에 대한 비판과 공격의 강도가 높았어요.”
‘해방기 시인 연구’로 박사 땄으나
‘이상’에 매료돼 열정적으로 매달려
최근 주석 빽빽한 ‘시 전집’ 2권 내
“이상 시의 주제 ‘역사와의 투쟁’
피카소·칸딘스키 등 비교연구로
난해한 작품 문턱 낮출 터”
그는 ‘황’ 연작에 등장하는 ‘마드무아젤 나시’(MADEMOISELLE NASHI)의 나시가 바로 일본 왕가를 암시하고 있다면서, “(시에 나오는) ‘개 인간’인 황이 총을 ‘나’에게 주며 나시를 죽여달라고 한 것은 이상의 마음속에 있는 일제를 상대로 한 전쟁 의지를 보여준 것”이라고 했다. “이상은 일제를 인류 역사의 인공적 측면에서 나타나는 최후 단계로 보았죠.” 그는 이상 시 가운데 ‘전쟁’ 모티프가 등장하는 작품이 10수도 넘는다고 했다. “이상 시에 등장하는 ‘직선’이나 ‘탄환의 질주’와 같은 표현은 ‘역사를 뚫고 나가는 육체의 전쟁’을 뜻합니다. 이 전쟁은 감금된 세계 저 너머에 있을 낙원 세계를 향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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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범순 교수가 최근 펴낸 <이상 시 전집>(1·2권) 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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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의 시는 난해함의 대명사다. ‘이론의 실험장’이란 말까지 나온다. 그가 이상 시에 끌린 것도 바로 이 난해함 때문이다. 박사를 마치고 문학 평론을 쓰면서 이상에 관심을 갖게 되었단다. 첫번째 평론집 제목(<글쓰기의 최저낙원>)도 이상 시 ‘최저낙원’에서 따왔다. “언젠가 이상의 난해한 텍스트를 풀어보겠다고 생각했는데, 20년이 걸렸네요.” 이번에 낸 책에 대해 동료 학자나 학생들의 반응은 어떨까? “새로운 해석이라고 다들 신기해하죠.”
그는 지난 20년의 탐구로 이상 시의 비밀을 풀었다고 자신한다. 하지만 실증의 옷을 입기 전까지는 여전히 추론일 뿐이다. 예컨대 이상 시 ‘차8씨의 출발’에 나오는 한자 且(차)를 두고도 권영민 교수는 이상 친구 구본웅의 성 具(구)에서 온 것이라고 보지만 신 교수는 의미 분석을 통해 ‘계속 이어진다’는 뜻이라고 전혀 다른 해석을 한다.
실증이 더 필요한 것 아니냐고 하자 이런 답이 돌아왔다. “이제 실증에서 떠날 때가 되었어요. 실증은 그 위의 것, 사상을 위해 복무합니다. 우리도 사상을 창조할 때가 되었어요. 사상은 다른 곳에서 가져온 뒤 실증에만 복무하면 노예밖에 더 됩니까. 근대 사상은 다 외래 것입니다. 고전도 중국 사상이죠. 실증은 다 중국이나 외래 상상에 복무하는 것입니다.”
우리 것에 대한 강조도 반론이 있을 것 같다고 하자 이렇게 말했다. “모든 생태계의 종은 독자성과 독창성이 있어요. 이게 붕괴되면 생태계가 파괴됩니다. 장미꽃이 이쁘다고 민들레가 ‘나도 장미꽃 되겠다’고 하면 생태계가 빈곤해집니다. 각 종은 자기 고유성을 지키면서 진화해야 합니다.”
그는 화가 등 다양한 직업의 이상 애호가들이 참여하는 ‘비초’라는 이름의 세미나 팀도 이끌고 있다. “비초는 ‘비예(흘겨본다는 뜻으로 이상이 즐겨 쓴 한자어)를 초극하다’는 뜻입니다.” 한달에 한번씩 이상 관련 세미나 모임을 여는 이 팀이 최근 다룬 주제는 ‘이상과 피카소 작품 게르니카’였다.
“이상 소설과 수필 전집은 제자들 중심으로 준비 중입니다. 저는 옆에서 돕기만 할 생각합니다. 대신 저는 이상의 사상을 대중화하는 데 힘을 쏟을 생각입니다. 이상을 피카소나 칸딘스키, 아폴리네르와 같은 예술가들과 비교연구해 글을 쓸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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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범순 교수의 연구실엔 그가 만든 ‘이상의 산책 지도’가 걸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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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학회 회원은 40~50명 선이라고 했다. “회원을 엄선합니다. 구속되지 않기 위해 외부 지원을 받지 않고 회비만으로 운영합니다. 이상의 독창적 생각을 발굴해 밀어붙이기 위해서죠. 다양성이 강조되면 백화점식이 됩니다.”
그는 “기존 이상 이미지에 덧씌워진 기괴한 천재나 피에로 등의 가면에서 벗어나 진실을 바로 봐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상은 자신의 펜을 최후의 칼로 삼아 싸운 시인이자 학자이며 병사였어요. 그런데 이상을 다룬 영화를 보면 ‘여자를 좋아하는 변태’쯤으로 그렸어요.”
글·사진
강성만 선임기자 sungm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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