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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7.10.08 18:22 수정 : 2017.10.08 19:48

[짬] 38년 재직 방송대 퇴임 이정호 이사장

이정호 정암학당 이사장이 2016년 학당 정기총회에서 사회를 보고 있다.

한국철학사상연구회(한철연)와 정암학당이 함께 펴낸 <아주 오래된 질문들>(동녘)은 ‘고전철학의 새로운 발견’이란 부제를 달고 있다. 1989년 창립한 한철연은 철학계의 진보적 독립 연구자들이 속한 단체다. 정암학당은 플라톤 저술을 중심에 놓고 그리스 로마 원전을 연구하는 학술단체다. 2000년에 출범해 2008년 1월 사단법인으로 등록했다.

서양 고대철학 전공자 13명의 글이 실린 <아주 오래된 질문들>은 정암학당 이사장인 이정호(65) 교수의 지난 8월 한국방송통신대 정년퇴임에 맞춰 기획된 책이다. 하지만 책의 표지와 목차를 봐선 그런 의도를 알기 힘들다. “(이 교수가) 자신을 드러내는 걸 완강히 반대하셨어요.” 저자들을 대표해 이 책의 서문을 쓴 최종덕 상지대 교수의 말이다.

최 교수는 대신 서문에서 선배 철학자에 대한 헌사를 바쳤다. ‘한철연과 정암학당은 사회적 아픔에 눈감지 않고 진실된 공부를 추구하고, 지식권력에 의존하지 않고 ‘독립 학자’를 지향하는 이들의 모임이다. 이런 공통의식은 자연발생적이었지만, 30년 동안 끊임없이 우리를 북돋워주고 밀어준 선배 학자가 있어서 그 발현이 가능했다. 그는 그리스 고전 철학자이자 철학운동가인 이정호다.’

지난달 28일 전화로 만난 최 교수는 이렇게 설명했다. “이 교수는 철학운동을 하신 분입니다. 철학운동이란 개념이 생소할 때, 철학 공부가 현장과 상관관계를 갖는 실천적 이론을 지향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셨어요. 나이 든 선배 교수이지만 강력한 사회운동 의식을 가지셨죠.”

이 교수의 학술단체 이력은 최 교수가 말한 ‘철학운동’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1996년 한철연 회장을 지낸 이 교수는 2009년부터 지난 2월까지 8년 가까이 이 단체의 이사장으로 일했다. 이 교수 부친의 아호가 학당 이름이 된 정암학당은 사실상 이 교수의 작품이다. 부친이 막내 아들에게 ‘집을 사라’고 남긴 유산이 학당의 종잣돈이 된 것이다. 이 교수는 여기에 더해 2012년까지 매월 학당에 사비 350만원을 내놓았다. 이 돈은 학당 소속 가난한 연구자들의 연구 지원금으로 쓰였다. 지난해 10월 학당의 서울 연구실을 서초구 방배동으로 옮길 때도 전세금 조달과 월세 마련은 그의 몫이었다.

‘실천적 이론과 독립 학자’ 추구한
한철연과 정암학당서 중추 역할
후배 연구자들 아낌없이 지원
퇴임 맞춰 두 단체 소속 연구자들
‘아주 오래된 질문들’ 펴내

“선생님은 격려 대마왕이셨죠”

이 교수는 정부가 퇴임 교수에게 주는 포상도 받지 않았다. 기자의 인터뷰 요청도 사양했다. 그럴 자격이 없다는 이유에서다. 지난 3월 대장암 수술을 받고 최근 1차 항암 약물치료를 끝냈다고 한다. 이 교수의 방송대 제자인 이옥심 정암학당 사무국장은 “수술 결과가 나쁘지 않은 것 같다”고 했다.

이 국장은 스승을 두고 이렇게 말했다. “방송대 제자들은 선생님을 ‘격려 대마왕’이라고 불렀어요. 방송대 학생들은 일년에 사흘 출석수업을 합니다. 이때 선생님은 제자들에게 꼭 밥을 사셨어요. 80명 이상이 함께 밥을 먹기도 했죠. 이 자리에서 학생들에게 3분 동안 자기 소개를 하도록 하셨어요. 선생님은 나이 들어 힘들게 공부하는 제자들에게 ‘정말 잘 살았다’ ‘훌륭하다’고 칭찬을 해주셨죠. 이런 격려에 자극받아 학업을 이어가는 분들이 많아요.” 이런 따듯한 스승의 면모는 이 교수의 방송대 홈페이지에서도 엿볼 수 있다. 이 교수는 만학도 제자들이 남긴 이런저런 글에 철학자의 지혜가 녹아든 답변을 달고 말미엔 꼭 ‘격려를 드리며’란 문구를 넣었다.

‘밟고 가라.’ 이정호 교수가 학당에서 자주 했던 말이라고 한다. “학당이 원전 번역으로 한국 인문학의 토대를 만들면 연구자들이 이를 밟고 더 큰 진전을 이루라는 바람이 담겼죠.”(이기백 정암학당 학당장) 학당 소속 연구원은 현재 33명이다. 이 가운데는 서울대·서강대 등 이른바 주요 대학 교수도 여럿이다. 출범 당시 목표로 삼은 플라톤 원전 완역은 내후년쯤 마무리된다. “번역한 종수는 많지만 <국가>와 <법률>과 같은 대작이 빠져 양으로 치면 절반 정도 번역했어요. 내후년 마무리되면 위서로 거론되는 플라톤 대화편들도 추가로 번역할 생각입니다.”(김주일 정암학당 연구원) 학당은 지난달부터 대우재단의 요청과 후원으로 학당 바깥에서 고전인문학 강좌와 고전독회 및 라틴어 강좌 수업도 열고 있다.(jungam.or.kr)

강원 횡성의 정암학당에서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이정호 이사장과 후배 연구자들.

<아주 오래된 질문들>엔 이 교수의 글 ‘플라톤과 정치철학’도 실렸다. 그는 여기서 플라톤 정치 사상에 대한 균형 있는 접근을 강조한 뒤 플라톤 철학의 주요 미덕으로 “파편적 지식이나 독단에도 저항할 수 있는 비판적 안목을 제공해준다는 점”을 꼽았다. “이 교수는 고대 철학의 고유한 사유를 마르크스적 시각과 같이 묶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신 분입니다. 플라톤의 우주론이 담긴 대화편 <티마이오스>를 노동의 관점에서 해석하는 논문도 쓰셨죠.”(김주일 연구원)

“학당엔 매월 20만원에서 5천원까지 내는 500~600명의 후원회원이 있어요. 학당이 낸 책을 보고 후원을 해주신 분들이 길게 가는 것 같아요. 지난 8월엔 미국 교포 한 분이 전화를 걸어 학당 활동이나 이사장님이 어떤 분인지 물어본 뒤 한꺼번에 1만달러를 후원금으로 보내주셨어요. 앞으로도 매년 후원해주시기로 하셨어요.”(이옥심 국장)

강성만 선임기자 sungman@hani.co.kr, 사진 이옥심 국장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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