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9.10.09 17:09
수정 : 2019.10.09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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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길후 작 <대통령>(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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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길후 작가 ‘유령을 먹어치운 신체’전]
트럼프 등 정치 권력자 이미지
권위 대신 결핍돼 보이는 윤곽
스산하고 기괴한 분위기 풍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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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길후 작 <대통령>(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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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방에서 만난 ‘대통령’은 얼굴이 없었다. 그를 찾아낸 건 골방 안쪽 벽에 걸린 그림 속. 온몸에 시커먼 고독을 품고 있는 모습이다. 화면이 온통 검은 아크릴물감으로 뒤덮였고, 희끄무레한 붓질이 그 위를 겹쳐 지나가면서 ‘대통령’은 유령처럼 윤곽만 남았다. 칠흑 같은 배경에 잠겨 그는 두 손을 내밀고 있다.
중견작가 김길후(59)씨가 그린 가로 130㎝, 세로 192㎝의 신작 제목은 <대통령>이다. 서울 신문로 2가 복합문화공간 에무의 지하 전시장 안쪽에 놓였다. 지난 8월 말부터 열린 개인전 ‘유령을 먹어치운 신체’의 전시작 중 하나다. 특정 인물을 짚어 그린 것은 아니지만 국내에서 나온 권력자들 그림 가운데 가장 스산하고 기괴한 분위기의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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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길후 작 <트럼프>(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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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는 얼굴과 몸 대부분을 검은색 배경에 파묻힌 구도로 설정했다. 검은 물감을 중첩해 붓질하고 화폭 곳곳에 주름을 잡아 쭈글쭈글한 효과를 냈다. 눈알처럼 보이는 동그라미 형상과 끄적거린 일부 흔적들만 부각해 그로테스크한 인상을 빚어냈다. 손과 팔, 몸은 단번에 그은 허연 선들로만 처리됐다.
제목에 걸맞은 권위나 위엄은 볼 수 없고, 결핍되고 쪼그라든 침잠의 이미지를 보여준다. 얼굴이 안 보이니 그림은 마치 대통령이 침묵의 절규를 하는 것처럼 보인다. 골방을 나와 바깥 전시 벽을 보면 또 다른 대통령을 그린 작품이 붙어 있다.
회색빛 화면에 퉁퉁한 모양의 머리, 팔짱 낀 듯한 몸뚱이가 검은색, 흰색, 누런색 물감으로 뒤발됐다.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대통령 <트럼프>다. 골방의 <대통령>처럼 광폭한 붓질을 휘두르며 축약된 윤곽선의 이미지로 트럼프의 자태를 그려냈다. 현실 정치에서 난해한 판단을 내려야 하는 권력자를 작가는 직관적인 필선과 색감으로 표출했지만, 그림에서 특정한 인물이나 사건의 상념을 떠올리는 건 관객 몫일 터다. 작가는 <트럼프>에는 ‘당신의 패를 먼저 보여주지 마시오’, <대통령>에는 ‘그에게서 당신의 얼굴을 보려 하지 마시오’라는 부제를 잠언처럼 적어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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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장 안쪽에 내걸린 작가의 근작 <바라는 것들의 실상>과 <돌아선 남자>(왼쪽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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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작가는 2011년 중국으로 작업 터전을 옮긴 뒤 유럽·중국·한국을 오가며 동서양 회화의 융합을 꿈꾸는 ‘기를 담은 회화’를 그려왔다. 서양의 페인팅 화면에 일필휘지의 필법을 써서 어지럽고 거센 기세로 옮긴 현자와 인간 군상을 대작에 담았던 그는 이번엔 대통령 연작을 비롯해 해체된 인간과 유령의 몰골을 통해 실존에 대한 집착을 보여주는 회화를 내놓았다. 유령과 신체의 경계, 권력과 실존, 이승과 저승, 영원과 찰나 같은 여러 화두를 다루면서 넓어진 작가적 시야를 드러내고 있다. 다음달 1일까지.
글·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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