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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03.02 09:19 수정 : 2019.03.02 13:58

제이티비시 제공
<눈이 부시게>(제이티비시)는 타임루프물이자, ‘김혜자 헌정 드라마’다. 25살 혜자(한지민)가 시간을 돌리는 시계를 남용하는 바람에 할머니(김혜자)가 된다. 드라마는 배우 김혜자의 이미지를 총체적으로 활용한다. 수십년간 “그래 이 맛이야”를 들려주던 자상한 어머니 상이지만 한편으론 새치름한 소녀의 이미지가 공존하다. 엉뚱함이 깃든 순박한 눈매에, 때로는 히스테릭하게 변하는 예민한 표정이 다층적인 매력을 뿜는다. 드라마는 조연과 단역을 통해 강도 높은 코미디를 구사한다. 특히 손호준의 망가지는 연기는 일품이다.

젊음과 늙음의 공존이라는 면에서 혹자는 영화 <수상한 그녀>를 떠올리지만, 방향이 반대다. <수상한 그녀>가 다시 젊어진 노인이 일찍이 펴보지 못했던 재능을 발휘한다는 소망충족적 판타지인 반면, <눈이 부시게>는 젊어서 한번도 생각해보지 못한 노년을 체험함으로써 늙음을 성찰케 한다. 어쩌면 <하울의 움직이는 성>이 연상된다. 갑자기 노파가 된 소녀가 까칠한 미남과 부대끼며 스스로를 알아간다는 점에서 유사성을 지닌다.

드라마가 비추는 노년은 참 쓸쓸하다. 몸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고, 매일 약을 먹어야 되니, 양식장의 연어처럼 느껴진다. 혜자가 다시 ‘한지민’의 몸으로 돌아갔을 때, 젊음은 ‘눈이 부시게’ 아름답다! 그러나 한낱 꿈임을 알고 혜자는 눈물을 쏟는다. 혜자는 갑작스러운 노화에 당황하지만 이런 부적응을 혜자만 겪는 게 아니다. 샤넬 할머니(정영숙)는 요실금을 받아들일 수 없어 물을 마시지 않는다. 그도 몸은 늙었지만 마음은 젊은 날의 추억에 고착되어있다. 어쩌면 혜자는 몸만 늙었을 뿐 마음은 그대로인 대다수 노인들이 겪는 불일치를 극대화한 인물인지도 모른다.

제이티비시 제공
노인의 4고를 병고, 빈고, 고독고, 무위고라 했던가. 건강뿐 아니라, 할 일이 없는 게 더 문제다. 집에만 있으면 가족의 짐이 되니, 어디든 가야 한다. 그래서 나선 곳이 홍보관이다. 흔히 노인들에게 건강식품을 강매하는 곳으로 알고 있지만, 노인들 사이에선 ‘노치원(노인유치원)’으로 통한다. 놀이도 하고, 간식도 주기 때문이다. 영화 <약장수>(2015)에서도 조명했듯이, 노인들이 속아서 물건을 사는 게 아니다. 비록 상술일망정 자식들도 하지 않는 효도와 재롱으로 노인들을 즐겁게 해주니, 온정으로 사주는 것이다.

이런 노인복지는 상업적인 홍보관이 아니라 공공시설에서 제공하는 것이 마땅하지만 노인시설의 설립은 주민 반대에 부딪힌다. 노인시설이 혐오시설로 간주되어 집값을 떨어뜨리기 때문이다. 드라마는 첫 회에 요양원 건설을 반대하는 시위에 나선 노인들의 고충을 역설적으로 보여주었다. 자신보다 늙어버린 딸 앞에서 엄마(이정은)는 늙는 것은 “아기 때로 돌아가는 것일 뿐”이라 말하지만, 혜자는 “아기는 귀엽기나 하지”라며 웅얼거린다. 맞다. 노인은 사회적인 혐오의 대상이다. 노파심, 마귀할멈 등의 표현이나 ‘틀딱충’ 같은 신조어는 노인에 대한 혐오를 품고 있다. 혜자를 본 인터넷방송 구독자들이 “곤지암 귀신”이라며 조롱을 쏟아내는 장면이 이러한 혐오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한편 드라마는 가난한 청춘을 뼈아프게 비춘다. 혜자네 부모는 워킹푸어다. 오빠(손호준)는 취업을 포기한 백수로, 방구석에서 인터넷방송으로 ‘잠방’과 ‘먹방’을 찍는다. 그의 가난은 식탐과 싸운다. 삼겹살이 먹고 싶어 헌혈 후 받은 영화표로 고기를 사서 밀폐된 방 안에서 구워 먹다가 질식을 한다. 혜자는 아나운서를 꿈꾸었지만, 자신이 “후지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몇번 떨어진 뒤 시험도 보지 않지만, 꿈을 포기하진 못한다. 조손가정의 준하(남주혁)는 수많은 알바를 해가면서 언론고시를 준비하였다. “면접만 봐도 무조건 될 놈”으로 선배의 인정을 받지만, 기자가 되지 못한다. 혜자에게는 가난해도 단란한 가족이 있지만, 준하의 가정은 해체되었다. 남보다 못한 혈육으로 갈등을 겪는 준하의 모습은 더 심화된 가난의 묘사다. 지독한 가난은 가족 관계마저 파괴해 버리기 때문이다. 홍보관에서 일하는 준하는 자기부정과 환멸에 빠져있다.

반면 혜자는 늙음을 받아들이고, 할 수 있는 일을 한다. 집안일을 하고, 아빠 도시락을 싼다. 그리고 아나운서가 되려 했던 재능을 살려 소소한 돈벌이를 한다. 이상할 것도 없다. 젊었을 때 그의 첫 돈벌이가 야한 동영상 녹음이었음을 감안하면, 할머니의 몸으로 “계란 사세요”를 녹음하거나, 마트에서 판매 방송을 하는 것은 일관된 쓰임이다. 이는 마치 상당수의 여성들이 출산과 육아로 경력 단절이 되었다가 중년 이후에 다시 구직에 나선 상황과 비슷해 보인다. 허드레 일자리밖에 없지만, 일할 기회는 더 많아진 역설적인 상황에 놓이는 것이다.

12회로 사전 제작된 드라마가 절반을 지났다. 어쩌면 혜자가 인터넷방송에서 대박을 터뜨릴지도 모른다. 6회 끝에 재등장한 시간을 돌리는 시계가 젊음과 늙음을 뒤바꾸어 놓을지도 모른다. 노년의 쓸쓸함과 흙수저 청춘의 막막함을 보여준 이 드라마가, 젊든 늙든 ‘어느 하루도 눈부시지 않은 날은 없다’는 것을 느끼게 해준다면, 애틋한 드라마로 기억될 것이다.

황진미 대중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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