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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10.30 19:04 수정 : 2019.10.31 20:59

충남 서산시 운산면 태봉리 산야에 있는 조선 13대 임금 명종의 태실 모습. 봉긋 솟은 태실 봉우리 꼭대기에 자리잡아 천하의 명당으로 꼽힌다.

【노형석의 시사문화재】
개심사 할퀸 태풍 속에서 발견된
폐사지 보원사가 찍은 목판 14종
간행시기·시주자 명단 등 바탕
조선 왕실 권력과의 관계 주목

충남 서산시 운산면 태봉리 산야에 있는 조선 13대 임금 명종의 태실 모습. 봉긋 솟은 태실 봉우리 꼭대기에 자리잡아 천하의 명당으로 꼽힌다.
2010년 9월 태풍 곤파스가 충남 해안과 수도권을 강타하며 한반도를 지나갔다.

순간 초속 40m가 넘는 거센 바람을 동반한 태풍은 서산시 운산면 상왕산(가야산)에 위치한 유명 고찰 개심사도 할퀴었다. 강풍과 폭우로 산사태가 일어나면서 20세기 초 한국 불교를 중흥시킨 경허 선사를 기려 세운 전각인 경허당이 흙더미에 파묻히는 피해를 입었다. 인근 덕숭산 대찰 수덕사를 비롯한 여러 절의 스님과 불자들이 허겁지겁 달려와 복구작업을 벌였다. 경허당 안에는 조선시대 절에서 새겨 숱한 불서들을 찍은 것으로 짐작되는 목판본들이 가득 차 있었다. 스님들은 하나하나 경판을 칫솔로 후비며 흙을 닦고 털어낸 뒤 경판의 제목과 내용을 기록했다. 이 과정에서 놀라운 역사적 사실이 드러났다.

1571년 서산 보원사에서 목판으로 찍은 석가모니의 설법도인 ‘영산회상 변상도’. 당시 보원사는 충청도 일대에서 가장 활발하게 불서를 간행했던 사찰로 꼽힌다. 그 배경에는 문정왕후를 비롯한 조선왕실의 전폭적 후원이 있었을 것이라는 설이 최근 설득력을 얻고있다.
추가 조사를 하면서 더욱 확실히 알게 된 것이지만, 수백점의 목판 대부분은 개심사에서 간행된 것이 아니라, 작은 산 하나를 넘으면 만나게 되는 옛 폐사지에서 찍은 것이었다. 폐사지는 통일신라, 고려시대에 번성했다가 조선 말기 퇴락해 없어진 옛 절 보원사였다. 개심사에는 경허당을 포함해 16~17세기 조선 초중기 간행한 18종 421판의 목판이 보관된 것으로 추산됐는데, 무려 14종이 이 폐사된 보원사 터에서 임진왜란 전인 16세기 중반에 찍은 것으로 나타났다. 내용도 망자의 영혼이 극락에 천도하기를 기원하는 대규모 의식인 수륙재에 얽힌 내용이 절반 이상이었다. 조선시대 사찰들이 목판을 새겨 출판물을 찍는 일은 종종 있었다. 하지만 도읍 한성과는 떨어진 시골 사찰에서 큰 규모의 수륙재에 얽힌 불서를 주로 찍은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이런 문헌사적 중요성 때문에 보원사에서 찍은 불교서적 목판들은 2014년 조계종불교문화재연구소의 일제조사결과를 거쳐 2017년 4종이 한꺼번에 국가보물로 지정됐다.

충남 서산시 운산면 태봉리 산야에 있는 조선 13대 임금 명종의 태실 모습. 봉긋 솟은 태실 봉우리 꼭대기에 자리잡아 천하의 명당으로 꼽힌다.
보원사는 ‘백제의 미소’로 유명한 서산 운산면 용현리 마애삼존불에서 계곡길을 타고 1㎞ 남짓 들어가면 나타나는 옛 절터다. 백제 때 처음 개창됐다는 설이 전해져오는 보원사는 통일신라 때 여러 고승들이 계를 받았고, 고려시대 광종 재위기에는 나라의 국사로 추앙받던 탄문 대사가 학문을 익히고 말년 입적한 절로 융성했다. 그러나 조선시대 들어 사세가 쪼그라들고, 조선 후기에는 절 자체도 급속히 허물어지면서 폐사된 것으로 전해져 왔다.

통일신라, 고려시대 나라의 대찰로 위세를 떨쳤던 보원사는 실제로 문화재 동네에서 나말여초의 유적 유물들로만 주로 알려져 있었다. 일제강점기 국립중앙박물관에 옮겨진 두 분의 거대한 철조 불상과 절터에 남아 있는 장대한 크기의 당간지주, 불교의 수호신 팔부 중상이 조각된 오층석탑과 고려시대 이 절에서 말년을 보낸 탄문 국사의 부도탑, 탑비가 바로 그런 유물들이다. 학계는 보원사가 고려시대 선종과 교종의 화엄종 등 여러 종파를 아우르며 고려 왕실의 밀접한 지원을 받다가 조선시대 쇠락했던 것으로 추정해왔다. 그런데 뜻밖에도, 이런 내력의 절에서 조선시대 초인 16세기 왕실과 밀접한 관계를 지닌 ‘왕찰’이었을 가능성이 최근 새롭게 제기된 것이다. 개심사에서 9년 전 산사태로 실체가 다시 드러난 옛 보원사의 나무 경판 덕분에 학계와 교단의 각별한 눈길을 받게 된 셈이라 할 수 있다.

서산시 운산면 용현리 보원사터의 모습. 정면의 당간지주 뒤에 석탑과 고려국사 탄문의 부도탑과 탑비가 보인다. 뒤켠 산 너머 약 3km 떨어진 곳에 조선 명종의 태실이 자리한다.
주목되는 건 이 절터에서 2.9㎞ 지척인 서산군 운산면에 조선 13대 임금 명종의 태를 묻은 태실(국가사적)이 있다는 점이다. 태실은 1538년 명종의 안녕과 복을 빌기위해 문정왕후 등 왕실 주도로 건립된 시설이다. 그동안, 학계는 조선 왕실의 발원이 담긴 운산면의 명종 태실이 고려시대 왕실 후원을 받으며 융성한 보원사와는 전혀 인연이 없는 별개의 유산이라고 단정해왔다. 그러나, 최근 드러난 보원사의 조선초기 불서 간행 활동 시기와 태실의 건립시점이 맞아 떨어지면서 두 유산에 숨은 연결고리가 새로운 관심사로 부각되고 있다.

이와관련해 눈길을 끄는 건 간송미술관의 김동욱 연구원이 올해초 발표한 동국대 미술사학과 석사학위논문이다. 김 연구원은 <서산 보원사지 오층석탑 연구>라는 제목의 이 논문에서 개심사로 이관된 16~17세기 보원사 간행 불교 서적 경판의 간행 연대를 분석하면서 상당수가 명종 태실을 조성한 시기(1538년), 문정왕후 사거 시기(1565년)와 근접하거나 겹친다고 언급해 놓았다. 특히 명종 21년인 1566년 3월 보원사에서 간행한 <천지명양수륙재재의찬요>(국가보물)의 시주자 명단에는 ‘통정대부 상선 강맹필’이란 기록이 보이는데, 강맹필은 실록에도 등장하는 왕실의 주요 내관으로 확인된다고 밝혀놓았다. 당시 종2품 상선의 고위급 지위로 보원사에 시주했다는 것인데, 이는 왕실에서 내관을 시켜 후원했다는 근거로도 해석할 수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더욱이 2000년대 이후 절터를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등이 발굴하면서 금당 터와 좌우 건물 터, 문루 등의 많은 건물을 조선 중후반경에 축조했다는 분석 결과를 보고서로 낸 것도 왕실이 후원한 중창불사(확장 재건립)로 해석할 여지가 충분해 보인다.

2012년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의 발굴당시 보원사터에서 나온 조선초기의 백자 제기 접시. 최근 새롭게 제기되는 절과 조선왕실과의 연관성을 짐작케하는 유물로 꼽히고 있다.
또 절터의 중심 건물 터에서 ‘희준’ 등 16세기께 왕실에서 쓴 양식의 백자 제기들이 다수 출토된 사실은 명종 태실을 지키는 수호사찰로 제사를 지내기 위해 썼을 가능성을 짐작하게 한다. 사서나 선비들의 문헌 기록에 보원사와 조선 왕실의 관계가 직접 언급된 대목은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 그러나 서산 내포 지역의 가야산 기슭 불교 유적에서 조선조 왕실과의 연결고리가 새롭게 드러났다는 점은 충분히 의미를 부여할 만하다. 명종 태실을 조성할 당시 상황에서 보원사, 개심사, 문수사 등 인근 사찰과 조선 왕실이 어떻게 교류했는지 등의 내력을 밝히는 것이 앞으로 불교사학계와 문화재학계의 중요한 탐구 과제가 될 것임을 시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보원사는 줄곧 민가로 둘러싸인 폐사지였다가 2000년대 초반 옛 절터 옆 민가에서 다시 법등을 켰다. 현재 새 보원사의 작은 법당 안에는 옛 철불을 모델로 조성한 본존불상이 있는데, 그 옆에 16세기 보원사에서 만든 불경 목판 한점과 이 경판으로 찍은 인쇄본이 작은 진열장 안에 나란히 전시되어 있다. 새 보원사 불사를 주도했던 정범 스님이 십수년전 서울 청계천 고서적상에서 자신이 소문을 듣고 샀던 옛 보원사의 경판 인쇄본과 최근 개심사에서 존재가 확인된 경판을 400여년만에 짝을 맞춰 놓은 것이다.

조선시대 최고의 여걸 정치가였던 문정왕후와 서산의 고찰 보원사, 개심사, 명종태실은 과연 어떤 관계였을까. 그들의 숨은 인연은 새롭게 재조명될 수 있을까. 역사학자나 미술사가, 문헌학자들에게는 흥미로운 스토리텔링의 화두가 아닐 수 없다. 서산/글·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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