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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20.01.17 05:59 수정 : 2020.01.17 09:41

페미니즘 소설 <붕대 감기>를 낸 작가 윤이형. 지방에 머무르고 있는 그는 <한겨레>와 한 이메일 인터뷰에서 “여성들 사이의 차이를 차이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태도, 차이 때문에 미워하지 않는 태도, 동지는 될 수 없더라도 서로 존중하는 태도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윤이형 제공

‘붕대 감기’ 작가 윤이형 이메일 인터뷰

“여성들 사이의 차이 인정하고 존중해야
담론 바깥에도 여성들 있다는 것 보여주고파
소수자 목소리 효과적으로 담아내는 게 에스에프 매력”

페미니즘 소설 <붕대 감기>를 낸 작가 윤이형. 지방에 머무르고 있는 그는 <한겨레>와 한 이메일 인터뷰에서 “여성들 사이의 차이를 차이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태도, 차이 때문에 미워하지 않는 태도, 동지는 될 수 없더라도 서로 존중하는 태도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윤이형 제공

<한겨레>는 소설 <붕대 감기>의 작가 윤이형과 이메일 인터뷰를 했다. 인터뷰 전문을 싣는다.

-‘붕대 감기’라는 제목으로 상징하고자 한 것은 무엇입니까? 소설에서 묘사된바, 고교 시절 교련 시간 세연의 붕대 감기처럼 서투르고 실수도 생기지만 그럼에도 챙기고 지속해 가야 할 여성들 사이의 우정과 연대인가요?

“네. 뭐 그렇게 보시면 무난할 것 같아요. 제가 고등학교 때 실제로 교련시간 붕대 감기 시험에서 친구 머리에 붕대를 원래보다 한 바퀴 더 돌려 감는 실수를 저지른 적이 있었는데 그 실수가 마음에 오래 남아 있었어요. 페미니즘은 힐링이 아니고 권력투쟁이라는 말이 있고 저는 거기에 동의하지만, 여성은 누구나 각자 모양은 달라도 남성 중심적인 가부장제 사회로부터 받은 상처와 고통을 지니고 있어요. 여성을 거기서 해방시키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페미니즘인데, 그걸 붕대라고 한다면, 여성 각자 개인차가 있으니까 감아놓은 상태에서는 사람에 따라 좀 답답할 수도 있고 너무 세게 조이거나 잘못 감으면 아프게 느껴지기도 할 거예요. 그렇지만 장기적으로 상처와 억압에서 해방되기 위해서 감는 것이니까 붕대 자체는 필요한 것이죠. 더 자유롭게 하기 위해 일시적으로 감아두는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 각자가 잊지 않았으면 하고, 타인에게 감아줄 때는 다른 여성을 너무 엄격하게 평가하거나 단죄하지 않는 태도가 필요한 것 같아요. 사실 그 상처와 억압 자체는 여성이 아니고 남성중심 사회 때문에 발생한 것이잖아요. 그런 맥락에서 붕대라는 사물을 가져와 봤어요.”

-소설집 <작은마음동호회>의 연장선상에서, 여성들 사이의 연대와 갈등에 주목한 듯합니다. 최근 그런 테마에 관심이 많아진 것인지요? 아니면 원래부터 지니고 있던 관심인가요?

“페미니즘 공부 시작하고 자연스레 그렇게 되었어요. 여성들 사이에 의견 차이로 길이 갈리는 경우를 많이 보았고 저 자신도 겪었기 때문에요.”

-페미니즘이 시대정신이 되어 있지만, 페미니즘 내부에서도 불화와 마찰이 없지 않은 듯합니다. 그런 양상이 이번 소설에도 어느 정도 그려져 있고요. 그 원인은 무엇이라 생각하시는지요?

“그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과정이라고 생각해요. 페미니즘 리부트 당시 여성들이 한꺼번에 각성하면서 처음에는 여성들 대부분이 ‘우리는 단일한 집단’이라고 생각했었어요.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여성들 사이에도 계층, 세대, 취향, 가치관, 사회적 지위, 지역 등에 따라 다양한 차이가 있음을 스스로 알게 되었고 그에 따라 그 차이를 확인하는 과정이 진행 중에 있는 것이죠. 모두가 똑같은 목소리를 낼 수 없고 그건 바람직한 일도 아니에요.”

-같은 맥락에서, 해결책(?)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해결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원칙을 위해서는 치열하게 싸워야 할 필요도 있으니까요. 그런데 아무래도 더 큰 힘이 필요할 때가 많이 있을 것 같고 그러려면 여성들 사이의 차이를 차이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태도, 차이 때문에 미워하지 않는 태도, 동지는 될 수 없더라도 서로 존중하는 태도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나와 다른 정체성을 지닌 여성이 있을 때 그 여성을 단지 그 정체성으로만 바라보면 사람과 사람 사이에 생겨날 수 있는 다양한 관계와 긍정적 상호작용, 대화 같은 것들은 모두 사라지고 사람이 하나의 기호로만 남게 돼요. 그러지 말고 그 사람에게도 지금껏 쌓아온 고유한 삶의 맥락과 역사가 있을 거라고 짐작해보는 태도, 함부로 단정하지 않고 판단의 여지를 남겨두는 태도가 필요한 것 같아요.”

-“곳곳에서 주저하고 흔들리는 작가의 목소리”라는 심진경의 해설 속 구절에 동의하십니까? 동의한다면 왜 그렇게 된 것일까요? 반대로, 동의하지 않는다면, 왜 그렇게 보인 것일까요?

“네, 동의하는데요. 저는 지금 40대 중반인데 세상이 너무 빨리 변한다고 느껴요. 제가 40년간 가지고 살아왔던 가치관이 여성주의를 만나면서 거의 남지 않을 정도로 무너져 내렸고 그 자리에 계속 새로운 가치관이 생겨나고 있어요. 여성주의 플로우 자체의 속도도 매우 빠르고요. 흔들리지 않을 수가 없죠. 또 저와 다른 세대, 다른 환경, 다른 조건에서 살아온 여성들의 이야기를 발견할 때마다 내가 모르는 세계가 정말 많이 있구나 하고 놀라기도 해요. 그래서 아직은 타인들에 대해 조심스럽고, 확신을 갖고 판단하기가 어려워요. 그런데 그게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이제 리부트 이후 겨우 4년 정도가 지났을 뿐이니까요.”

-주인공 한 사람의 이야기에 집중하지 않고 여러 인물들의 다양한 이야기를 펼쳐 놓은 것은 여성 현실과 페미니즘의 복합적인 양상을 보여주기 위한 배치였을 것 같습니다?

“네. 여성들의 다양함과, 그 다양함에도 불구하고 여성들은 서로 알게 모르게 모두 이어져 있고 이미 서로를 돕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였어요.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 활발하게 논의되는 페미니즘 담론의 장을 지켜보면서, 저는 어쩐지 그 담론 언저리에서 머뭇거리거나, 망설이거나, 들어가도 되는지 아닌지 몰라 두려워하고 있거나, 자격이 없다고 느끼는 여성들에게 마음이 더 많이 갔어요. 아마도 제 나이와 기혼 유자녀 여성이라는 정체성 때문에 저의 위치에서는 그런 여성들이 더 많이 보이게 되었는지도 모르겠어요. 담론 바깥에도 여성들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 있었어요. 그래서 우정이라는 더 큰 테마를 골라서 그 바깥까지 담아보려고 했어요.”

-이 소설에 남성 인물을 등장시키지 않은 것은 물론 의도적인 것일 듯합니다. 왜 그렇게 한 것인지요? 다시 말하자면, 어떤 효과를 노린 것입니까?

“음… 특별히 남성이 나올 만한 이유가 없었어요. 그냥 여성들의 이야기를 중점적으로 하고 싶었는데 불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이번 소설에서 가장 애정이 간달까 마음이 쓰인 인물은 누구이며 그 까닭은 무엇인지요?

“헤어드레서로 일하고 있는 지현인데요. 자신의 생업을 놓고 가치관의 혼란에 빠져 있기도 하고, 자신이 너무 도덕적이라고 느껴서 괴롭지만 비도덕적으로 행동하지도 못하는 마음 여린 인물이에요. 자신의 잘못이 아닌 일에 큰 죄책감을 느끼기도 하고요. 제 주변의 많은 여성들에게서 지현과 같은 모습을 보았는데 아무튼 세상의 온갖 일들을 다 자기 잘못이라고 생각하고 자기검열이 너무 심한 거예요. 그런 자기검열을 좀 놓아버렸으면 좋겠어요.”

-반대로 가장 든든하고 믿음직한 인물은 누군가요?

“음… 형은의 어머니인 명옥에게 같이 살자고 제안하는 효령이라는 비혼 여성이요. 저희 어머니에게 효령과 비슷한 후배분이 있는데, 그분이 저희 어머니랑 같이 살고 싶어하시는데 저희 어머니가 반대하셔서 그렇게 못 하셨어요. 그분을 모델로 해서 만든 인물이에요. 후배로서 선배에게 받은 것들을 돌려주고 이제 나이 들어 약해진 선배를 돌보고 싶어 하는 마음을 지닌 든든한 사람이죠.”

-등단 초기부터 에스에프(SF) 소설을 즐겨 썼는데, 에스에프의 매력 또는 장점은 무엇이라 생각하십니까?

“세계를 보는 관점을 한꺼번에 뒤집어놓을 수 있다는 것. 현재의 세계에 부족하거나 개선할 부분을 잘 드러낼 수 있고 약자와 소수자들의 목소리를 효과적으로 담아낼 수 있다는 것. 더불어 잘 정돈된 과학이 인간에 대한 애정과 어우러질 때 느껴지는 에스에프 특유의 장엄함과 우아함이 있어요. 차가우면서도 가슴이 뜨거워지는 사랑의 느낌이죠.”

-최근의 에스에프 중흥 분위기를 보면서 보람을 느낄 것 같은데, 혹시라도 아쉬움이 있다면요?

“아쉬운 점은 별로 없고요. 제가 느끼기엔 10년 전에도 한국 에스에프 작품들은 최고의 퀄리티였어요. 매번 ‘지금이 부흥기’라는 말을 듣는데 제가 볼 때마다 항상 최고였기 때문에 달리 할 말이 별로 없네요. ㅎㅎ”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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