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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11.29 06:00 수정 : 2019.11.29 20:17

늘 수많은 사람들에 둘러싸여 있다가 마침내 발코니에 혼자 남게 되자 줄리엣은 그제야 억눌린 진심을 토해낸다. “아, 로미오! 왜 당신은 하필 로미오인가요? 아버지를 버리고 가문의 이름을 거부하세요!” “당신과 아무 상관없는 그 이름 대신, 내 전부를 가지세요.” 사진은 베로나에 있는 ‘줄리엣의 발코니’에서 미소짓는 아이. 사진 이승원 작가

[책&생각] 정여울의 문학이 필요한 시간
⑧ 아름다운 방백, 문학이 있는 자리

뼈아픈 언어야말로 억압의 흔적을 온몸에 문신처럼 새겨놓은 문학의 언어

지배자-피지배자 ‘이중언어’ 쓰는 소수자, 해방의 언어 구축하는 전사 되기를

늘 수많은 사람들에 둘러싸여 있다가 마침내 발코니에 혼자 남게 되자 줄리엣은 그제야 억눌린 진심을 토해낸다. “아, 로미오! 왜 당신은 하필 로미오인가요? 아버지를 버리고 가문의 이름을 거부하세요!” “당신과 아무 상관없는 그 이름 대신, 내 전부를 가지세요.” 사진은 베로나에 있는 ‘줄리엣의 발코니’에서 미소짓는 아이. 사진 이승원 작가

이곳에서는 마음껏 소리쳐 말할 수 있다. 그때 당신에게 차마 들려주지 못한 말들을. 꼭꼭 숨겨놓은 마음을 고백하지 못했던 그 모든 순간들, 소리내어 절규하지 못했던 그 모든 분노와 절망의 목소리들이 문학작품 속에서는 더욱 생생하게 들린다. 우리가 영혼의 청진기를 대고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속 이야기들을 들어주지 않는다면 영원히 사라져버릴 수도 있는 그 모든 억압된 이야기들이 문학작품 속에서는 당당히 살아 숨쉰다. 타인의 시선 때문에, 나 자신의 검열 때문에, 때로는 그저 침묵하는 것이 습관이 되어버려서,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그 모든 아픔들이야말로 문학작품의 가장 소중한 테마다.

“우리는 바이링궐이다”

윤이형의 소설 <작은 마음 동호회>는 마음속에 담아 놓은 수많은 사연을 차마 일상 속에서는 표현하지 못한 엄마들의 이야기다. 그들이 모여 함께 만들어내는 첫 책을 통해 자신들의 마음속에 갇힌 아픔을 해방시켜주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작은 마음 동호회>의 주인공은 자신들을 “혼자 노래방에 가서 두 시간 동안 악을 쓰고, 아이를 때리지 않으려고 부엌 휴지통을 찌그러뜨리고, 신경정신과 상담 예약을 했다가 취소하고, 증명할 수 없는 무언가를 증명하기 위해 일기를 쓰고 과일청을 만들다가 시계를 보고 쫓기듯 자러 가는 사람들, 방안에서만 서성거리는 사랑스러운 지식인들”이라고 묘사한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는 사연을 가진 사람들은 모두 ‘바이링궐’(bilingual), 즉 이중언어 구사자가 아닐까. “우리는 바이링궐이다. 우리의 말들은 반쯤은 자신의 것이지만 반쯤은 우리를 괴롭히는 사람들의 것이다. 우리는 종종 싸우려다 싸울 대상을 변호하며 주저앉는다. 그러고 나서는 성나고 괴로운 마음이 되어, 자신을 때려 기어이 피를 내곤 한다. 아무리 싫어도 우리 입에선 자꾸만 ‘아줌마’라는 말이 흘러나온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비하하는 그 말이.” ‘작은 마음 동호회’의 회원들은 겉으로는 아주 소박하고 은밀하고 내성적으로 소통하지만, 속으로는 아주 커다랗고 풍요로우며 화려한 우주적 언어를 품고 있는 사람들이며, 알고 보면 너무 거대하고 광활해서 측정할 수조차 없는 마음을 지닌 사람들이다. 이제 아이나 남편이나 시어머니를 위해서가 아니라, 처음으로 나 자신을 위해 글을 쓰기 시작한 엄마들의 눈빛은 누구도 말릴 수 없는 열정으로 불타오른다. 문학은 이 바이링궐의 언어, 갑갑한 이중언어의 감옥문을 부수고 스스로 해방의 언어를 구축하는 전사들의 몫이다.

‘바이링궐’이라는 단어는 본래 ‘두 언어를 모두 구사할 수 있는’이라는 긍정적인 의미로 쓰이지만, 지배자의 언어와 피지배자의 언어를 동시에 구사하는 소수자야말로 또 다른 바이링궐이 아닐까. 겉으로는 스스로 ‘아줌마’라 비하하지만 마음속에서는 세상 모든 쓸쓸한 주부들의 슬픔을 이해하고 감싸줄 준비가 된 사람들, 스스로를 ‘아싸’(아웃사이더)라고 폄하하면서 사실은 세상 모든 주변인들의 아픔에 공감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 온갖 저항의 언어를 마음속에 잔뜩 쌓아놓고도 차마 우리를 괴롭히는 그들 앞에서는 아무 일 없는 듯 ‘정상적인 언어’를 구사하는 우리 모두가 바이링궐이 아닐까. 문학은 바로 이렇게 마음속에 저항의 언어를 쌓아두고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더 이상 이중언어로 자신을 은폐하지 않아도 된다고, 이제 침묵을 끝장내자고 속삭이는, 내성적인 사람들의 가장 매혹적인 친구다.

‘블랙 페미니즘'의 선구자, 오드리 로드. 그는 <시스터 아웃사이더> 등 수많은 저서에서 억압된 여성의 목소리를 해방시키는 글쓰기를 실천했다. 출처: 위키피디아

글쓰기는 해방의 도구

문학은 운명적으로 이중언어와 복화술을 구사한다. 사회화되고 표준화된 언어로는 결코 표현해낼 수 없는 감정들, 아무리 민주적인 사회에서도 어딘가는 반드시 억압되어 있는 인간의 욕망, 가장 평등해 보이는 관계에서도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내밀한 권력관계를 표현하는 언어는 결코 단순할 수가 없다. 그리하여 ‘무조건 쉽고 빠르게 잘 읽히는 글을 써라’는 대중화의 주문은 문학의 입장에서는 가혹한 폭력이 될 수 있다. 여러 번 곱씹으며 소중하게 다루어야 할 언어들, 어딘가 기이하게 뒤틀려 있고, 하도 여러 번 구겨지고 짓밟혀 본래 모습을 찾을 수 없는 뼈아픈 언어들이야말로 억압의 흔적을 온몸에 문신처럼 새겨놓은 문학의 언어들이다.

<작음 마음 동호회>의 엄마들은 ‘과연 내 생각을 책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 누가 내 글을 읽어줄까’라는 두려움을 뛰어넘어 한 권의 아름다운 책을 만들고, 마침내 그토록 간절히 꿈꾸던 촛불집회에 나가게 된다. 서로 닮은 아픔을 공유한 여성들, 엄마라는 이유만으로 24시간 아무런 대가 없는 그림자 노동의 시스템을 벗어날 수 없는 여성들이 추운 겨울날 서로 핫팩을 주고받으며 마음껏 ‘혼자이면서도 동시에 함께인 시간’을 실현하는 것. 자기 안의 억눌린 목소리를 표현해내는 힘을 발견하는 것. 자기 안에 이미 오래전부터 살아 숨쉬고 있었던 창조적 재능을 끌어내는 것이야말로 문학의 힘이다. 오드리 로드는 <시스터 아웃사이더>에서 이렇게 말한다. “주인의 도구로는 결코 주인의 집을 무너뜨릴 수 없습니다. 주인의 도구로 그가 만들어 놓은 게임 안에서 일시적인 승리를 거둘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결코 진정한 변화를 일으킬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주인의 도구가 아닌 새로운 언어란 무엇일까. 통제하고 지배하는 다수자의 정상적인 언어가 아닌, 스스로 해방된 소수자의 비정상적 언어, 이방인의 언어로 자유와 평등을 외치는, 아니 글을 쓰는 그 순간부터 이미 자유와 평등이 시작되는 글쓰기다. 여성이며, 흑인이며, 레즈비언이었던 오드리 로드는 최소한 삼중의 억압 속에서 분투해야 했다. 이런 이중삼중의 억압을 뚫고, 태어날 때부터 천 갈래 만 갈래로 찢어져 있던 자신의 세계를 이어붙여 마침내 오롯한 ‘자기만의 세계’를 만들어내는 이들이, 남과 여로, 백인과 유색인으로, 정상인과 비정상인으로 갈라진 이 세계를 기적처럼 횡단하는 문학의 전사들이다. 오드리 로드는 선언한다. “단 한 명의 유색 여성이라도 속박 아래 있다면, 저는 자유롭지 못합니다.” 단 한 명의 사람이라도 자유롭지 못하다면 우리는 여전히 속박된 것임을 깨닫는 것. 나의 자유는 내가 공감하는 모든 이들의 자유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문학의 언어는 향기로운 폭탄이 되어 억압의 사슬을 끊어낸다.

읽는 나는 나아지고 나아간다

장은진의 소설 <외진 곳>에서는 다단계 사기 피해를 입은 두 자매가 버스조차 다니지 않는 외진 곳으로 밀려오게 된다. 집 한 채를 9개 방으로 나누어 쓰는 이 벌집 같은 협소한 공간, ‘네모집’에서, 그들은 언제든 출발신호가 울리면 미친 듯이 달려나갈 준비가 되어 있는 육상선수처럼 엉거주춤한 자세로, 언제든 떠날 준비를 한 채 살아간다. 이곳을 떠나는 것이 유일한 희망인 사람들은 서로를 걱정하거나 신경쓰지 않는 것이 오히려 서로를 향한 배려라고 합의라도 한 듯 애써 서로에게 관심을 주려 하지 않지만, 주인공은 어느 추운 크리스마스이브, 이 네모집 9개의 방에 전부 빛이 밝혀져 있는 것을 보고 왠지 모를 안도감을 느낀다. 9개의 방이 마치 9개의 아름다운 환한 전구처럼 그들에게도 어김없이 찾아온 크리스마스 전날 밤을 따스하게 밝혀준다. 빛은 대도시의 대낮처럼 환한 ‘중심’만이 아니라 이토록 외진 곳, 9개의 ‘네모집’에도 존재한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주인공은 깊은 안도감을 느낀다. ‘외진 곳’은 언뜻 보기엔 누구도 서로에게 말을 걸지 않는 침묵의 공간처럼 보였지만, 오직 마음의 촛불만이 밝힐 수 있는 따스한 이웃의 속삭임이 존재하는 공간이었던 것이다.

내가 견뎌야 할 일상이 결코 끝나지 않는 기나긴 터널처럼 느껴질 때, 나는 쓰지 않으면 견딜 수 없고, 읽지 않으면 버틸 수 없는 나를 발견한다. 쓰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시간, 읽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시간을 통해 나는 조금씩 더 나은 존재가 되어간다. 읽고 쓰고 쓰고 또 읽음으로써 우리는 매번 더 나은 존재가 되어간다는 믿음이 나를 밀어간다. 지금 내게 다가오는 고통을 저번보다는 더 낫게 견뎌낼 수 있는 사람, 첫번째 화살에는 어쩔 수 없이 맞았지만 두번째 화살, 세번째 화살은 피할 수 있는 내면의 힘을 가진 사람이 되고 싶다. 마음속에 영원히 꺼낼 수 없는 비밀을 쌓아놓고 사는 모든 사람들은 바이링궐이 아닐까. 그렇게 안으로만 삼킨 말들이 거대한 화산층을 이루어 마침내 마그마처럼 폭발해버릴 때까지, 우리는 부디 침묵하지 말고, 결코 포기하지 말고, 우리 안의 슬픔과 분노와 희망을 ‘문학’이라는 아름다운 타임캡슐에 담아 이 세상을 향해 힘차게 내보낼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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