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9.11.22 05:01
수정 : 2019.11.22 16:40
그곳에 한국군‘위안부’가 있었다
김귀옥 지음/선인·1만9000원
2000년대 초반 어느날, 지은이는 서울 중구 충무로4가 148번지를 찾아간다. 당시만 해도 정확한 주소지를 찾으려면 동사무소에서 지적도를 확인해야 했다. 대한극장 맞은편, 충무로역에서 1분 거리, 왠지 음산한 느낌이 나는 좁은 골목길 초입, 하지만 148번지는 사라지고 148-1번지에 새 건물이 들어서 있었다. 원래 있었던 건물은 1986년 아시안게임을 앞두고 재개발과 함께 사라졌다고 했다. 수소문 끝에 찾아낸 한 원주민은 해당 주소지에 예전부터 군대 건물로 사용되던 건물이 있었다고 기억했다. 이곳은 바로 한국군‘위안부’가 있었던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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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4년 무렵 경성관광협회의 ‘경성안내도’. 서울 중구 충무로4가 148번지가 ☆표로 표시돼 있다. 도서출판 선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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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김귀옥 한성대 교수(사회학)는 이곳에 한국군‘위안부’가 있었다는 사실을 대한민국 육군이 펴낸 <육·이오사변 후방전사: 인사편>(1965)에서 알아냈다. 한국전쟁 당시 특수위안대라는 이름의 한국군‘위안부’는 서울지구 3개 소대, 강릉지구 1개 소대가 있었다. 서울지구 제1소대(충무로 148번지) 19명, 제2소대(중구 초동 105번지) 31명, 제3소대(성동구 신당동 236번지) 8명, 강릉 제1소대(강릉군 성덕면 노암리) 21명이었다.
김 교수는 1996년 강원도 속초 아바이마을에서 월남이산가족 현지조사를 하면서 한국군‘위안부’의 존재를 처음 들었다. “유엔군놈들한테 잡혀서 (…) 포로가 되어 아군이 시키는 대로 했지. 아군들한티 밥도 하고 빨래 같은 일도 해주며 밥을 얻어먹었어. 그란디 이상한 거이 군‘위안대’ 여자들이 있었던 거야. 군‘위안대’ 여자들은 주로 이남 사람인 거 같아. 그들은 군인들을 위문하는 일을 했어.”(함경남도 출신 김씨, 1927년생, 남)
한국전쟁 당시 일반 병사뿐만 아니라 위관급 장교였던 리영희 교수, 채명신·김희오·차규헌 장군 등한테서도 군‘위안부’가 있었다는 증언이 여러 형태로 나왔다. 채명신은 회고록 <사선을 넘어>에서 “당시 우리 육군은 사기 진작을 위해 60여 명을 1개 중대로 하는 위안부대를 서너 개 운용하고 있었다. 예비부대로 빠지기만 하면 사단 요청에 의해 모든 부대는 위안부대를 이용할 수 있었다. 그러니 (…) 장병들의 화제는 모두 위안부대 건이었다”고 적었다. 차규헌 회고록 <전투>에도 “잔적을 완전히 소탕한 후 예비대가 되어 부대정비를 실시하고 있을 때 사단 휼병부(恤兵部)로부터 장병을 위문하러 여자위안대가 부대 숙영지 부근에 도착하였다는 통보가 있었다. 중대 인사계 보고에 의하면 이들은 24인용 야전 천막에 합판과 우의로 칸막이를 한 야전침실에 수용되었다고 하며 다른 중대병사들은 열을 서면서까지 많이 이용했다고 하였다”고 나와 있다.
김 교수는 “일본군‘위안부’제도가 한국군에게는 한국군‘위안부’제도로 왔고, 미군에게는 미군‘위안부’제도로 왔다”며 “그 제도를 도입했던 한국군 장성들과 이승만 정부는 부끄러움을 몰랐다. (…) 나는 이번 책을 통해 한국의 지배층에게 ‘책임’을 말해주고 싶다”고 밝혔다.
이재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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