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우익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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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에 걸친 편지와 봉화행…비로소 허락을 2005년은 을사조약(1905년) 100년, 한일협정(1965년) 40주년이 되는 해이자, 해방 60돌인 해다. 1945년 해방의 해에 태어난 해방둥이들이 다시 자신의 갑자(甲子)를 맞는 환갑의 해다. 1945년 창립되어 기업으로서 환갑을 맞는 출판사 현암사에 있어서도 2005년은 뜻 깊은 한 해다. 현암사는 지난 연말 세상을 떠난 전우익 선생의 <혼자만 잘 살믄 무슨 재민겨>가 다시 화제에 오르면서 베스트셀러 출판사로 이름이 알려졌다. 하지만 현암사는 음식·의복·자연 등 한국학 전반을 새롭게 해석한 <우리가 꼭 알아야 할 100가지~ >(51종 출간), <쉽게 찾는 자연도감> 시리즈로 한국의 고유문화 찾기에 앞장서 왔던 출판사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렇지 않아도 ‘어렵다’는 출판계. 내기만 하면 베스트셀러가 된다는 부동산 혹은 재테크, 처세술, 소설 등을 마다고 현암사가 고집스럽게 ‘인문학’을 고집할 수 있었던 이면에는 ‘우리 시대 최고의 출판 코디네이터’로 불리는 형난옥 전무가 있었다.
때문에 민음사, 김영사, 랜덤하우스중앙 등 대형 출판사 매출이 300억원 안팎의 매출을 기록한 올해도 묵묵히 전체 출판도서의 99%를 국내 기획물로 채워온 그의 포부 새해 포부 역시 “외형적인 성장보다 내실을 중시하는 경영을 해왔고, 앞으로도 인기 필자를 좇기보다 흙 속에 묻힌 보석 같은 필자를 발굴해 품격 높은 책을 만들고 싶다”는 것. “한국인과 한국문화, 한국의 긍지를 찾는 기획 작업을 하는 것이 나에게 주어진 임무이고, 한국학 전반을 재배열하는 것이 나와 현암사에 부여된 사명”이라고 한다. “출판 편집인이 체질…현장에서 오래 버틴 인물로 남고 싶다” 78년 숙명여대 국문학과에 입학한 그가 출판계에 몸담게 된 계기는 ‘필연’이었는지 모른다. 80년 ‘서울의 봄’ 당시 총학생회장으로 신군부에 대항하다 제적된 뒤 생계를 위해 81년 ‘한벗’에 입사한 인연으로, 그는 86년 졸업 후에도 김영사에 취직해 출판인으로의 경력을 이어갔다. 그의 말대로라면, “당시만 해도 출판에 뜻을 뒀던 것이 아니라 사회변혁의 목소리를 책을 통해 내고 싶었고, 그 기회가 우연찮게 출판사에서 왔다”지만 그렇기 때문인지 그는 20여년 넘게 “인문학의 토양을 다지는” 출판인의 길을 걸어왔다. 출판인 형난옥의 이름은 ‘김영사’ 시절 그가 기획한 <빵장수 야곱>, <내가 정말 알아야 할 모든 것은 유치원에서 배웠다>,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 등의 대중교양서가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알려졌다. 형씨는 90년 현암사 편집부장으로 자리를 옮겼고, 2002년 현암사의 실질적인 수장으로 올라섰다. 하지만 상업적 가치와 명분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좇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인문도서만으로 연 매출 100억 안팎에 이르는 국내 10위권의 출판사로 현암사를 키우기까지는 그의 피와 땀이 녹아 있다. 물론 편집자의 취향도 영향을 미쳤다. “우리 것에 대한 관심이 줄어드는 것, 자연을 비롯해 우리 것에 대한 자료의 부재가 가장 안타까웠죠. 여러 가지 자원을 묶어 책으로 만들어 내고 싶어졌고, 전통을 과학하화고 현대화하는 작업을 해야겠다고 다짐했죠.” <우리가 알아야 할 100가지~>, <쉽게 찾는 자연도감> 시리즈는 이런 사소한 관심에서 출발했다. 다행히 독자들의 반응도 좋았다. 철학소설 <소피의 세계>, <지구를 살리는 50가지 방법>, <일곱 가지 여성 콤플렉스>, <무당> 등도 꾸준히 팔렸다. 덕분에 ‘당대 최고의 출판 코디네이터’라는 별칭도 얻었다. “내가 만든 책이 베스트셀러가 될 것이라는 기대보다는, 읽은 사람들이 행복을 느끼는 책이 됐으면 하는 마음으로 일하고 있어요. 처음에는 만만치 않은 반대에 부딪치기도 했지만 결국은 제가 옳았어요. 전우익 선생님의 <혼자만 잘 살믄 무슨 재민겨>가 산 증인인 셈이죠.” 그러나 정작 형씨가 반대를 무릅쓰고 펴낸 <혼자만 잘 살믄 무슨 재민겨>의 진가는 2002년 빛을 발했다. 이 책은 2002년 <문화방송> 느낌표에서 방영된 뒤 현재까지 100만부 이상 팔리는 등 독자들로부터 꾸준히 사랑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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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터뷰 뒤안길
‘길가다가 한 번쯤은 마주쳤을 법한 옆집 아줌마, 느릿느릿하고 어눌한 말투…’,
형난옥 전무의 첫 인상이었다. 한 회사의 대표같지 않은 수더분함이 오히려 그가 편집장으로 명성을 얻는 데 더 큰 도움이 됐으리라. 그렇기 때문에 무명작가의 발굴, 작가와의 끊임없는 대화를 바탕으로 ‘책’을 기획하고, 출판하는 일은 그에게 ‘천직’으로 보인다.
형씨는 출판계에서 새로운 이정표를 세운 사람 가운데 한 명이다. 대부분의 출판사가 크지 않은 탓에 성별에 상관없이 30대 초·중반 정도면 편집장의 지위에 오르게 되며, “30대 중반이면 퇴직을 준비해야 하는 시기”라는 자조섞인 이야기가 나온다.
그 한계를 극복한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 형 전무다. 그는 30대 중반 이후 오히려 더욱 왕성한 편집활동을 보이고 있다. 그는 “나이를 들어갈수록 삶과 생각이 성숙해지는데, 30대에 정년이라니 솔직히 의아했다”며 “편집부장만큼은 정년이 있을 수 없으며, 항상 새롭게 시작하는 마음으로 일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그의 성공신화(?)를 직접 글로 남겨볼 생각은 없는 것일까. 그는 “대학시절 학보사 기자로 활약한데다 한때는 문학에 대한 열정이 강해 문학을 통해 이상을 실천할 것인지, 출판일을 계속할 것인지 고민하기도 했다”고 토로했다.
그 고민은 영화 <아마데우스>를 본 뒤 편집자의 길을 가기로 궤도를 수정되었다.“제가 직접 글을 쓰는 것보다 많은 사람들의 고민을 함께 나누고, 그것을 토대로 좋은 글, 좋은 책을 쓸 수 있도록 협력하는 일을 가야 할 것 같아요.”라고.
◇ 현암사는 = 현암사는 1945년 조상원씨가 만든 출판사다. 현암사 창업자 조씨는 가죽신을 만드는 갖바치에서 따온 ‘책바치’로 자신의 삶을 정의했다. 현암사는 1959년 한국 최초의 법령집인 <법전>을 펴낸 것을 시작으로 대표적인 법률서적 출판사로 자리잡았으며, 법률문화의 대중화에 기여했다. 1965년에는 박경리의 장편소설 <시장과 전장>을 전작 형태로 출판하였고, 1966년 <한국문학>을 창간하여 계간 문예지 시대를 열었다. 1969년 <한국의 명저>를 간행해 한국학 단행본 붐을 일으켰으며, 1970년에는 국내 최초로 출판제작자 실명제를 도입하여 편집·교정·장정·제작 등 책을 만드는 데 참여한 사람들의 이름을 저작권표시 난에 넣었다. 1980년대 들어 조상원씨의 아들 조근태씨가 경영을 맡으면서 문학 분야에까지 지평을 넓혔으며, 1990년대 들어서는 형난옥 전무의 영입을 계기로 환경과 전통문화 분야에 관심을 쏟아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 꽃 백 가지>를 비롯한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백 가지> 시리즈를 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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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온라인뉴스부 김미영 기자 kimm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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