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파계열 독립운동 무시…이승만은 부각
“친일파는 정당화, 미군 개입엔 명분 주기”
교과서포럼 근현대사 대안교과서 시안 제4장 ‘국민국가의 건설’은 “해방은 느닷없이 왔다”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일본의 패망에 대비하려고 여운형이 조직한 ‘건국동맹’ 같은 비밀결사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극히 예외적인 움직임이었다.” 글이 주로 ‘국내’에 초점을 맞추고는 있지만 그렇다고 ‘국외’ 부분을 따로 조명하지도 않는다. 따라서 시안을 보면 광복은 외세의 선물인 듯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실제 역사에선 건국준비위원회 등의 활동은 물론이고 만주와 중국 화북지역 등을 중심으로 적지않은 무장대원들이 단독조직 또는 동북항일연군 등 중국공산당 등과의 연계형태로 치열한 항일투쟁을 벌였다. 님 웨일즈의 <아리랑의 노래>의 주인공 김산(장지락)의 일대기만 봐도 한민족 항일투쟁의 폭과 깊이를 확인할 수 있다.
시안은 식민지 항일무장투쟁의 핵인 사회·공산주의계열을 거의 빼버림으로써 민족 전체의 독립역량을 부정하는 꼴이 됐다. ‘만주에서의 항일무장투쟁’이라는 소항목이 설정돼 있으나 홍범도 최진동 김좌진 정도만 언급됐다.
좌파계열이 단 한번 언급된 곳이 있는데 매우 부정적으로 그렸다. “당시 한인 독립운동가들은 분파주의로 상호 갈등과 분열로 시달렸다. 중국에서는 김원봉이 임시정부에 대항하는 민족혁명당을 조직하여 활동하였고 미국에서도 한길수를 중심으로 하는 이들이 이승만을 비판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에 비해 이승만은 ‘이승만의 제네바회의 외교’라는 독립항목을 둘 정도로 부각시켰다.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는 “(다른 그룹을) 비판한 건 사실이겠지만, 그걸 분파주의로 모는 건 일제가 오도한 조선 당파성론을 연상시킨다. 분파주의로 치자면 이승만쪽이 더하지 않았나”라고 말했다.
한국 우파의 본산이라 할 임시정부 백범 쪽도 미국 전략정보국(OSS. 중앙정보국의 전신)과 손잡고 국내 진공계획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런 백범을 미군정은 정작 점령 뒤 버렸다. 아무 준비도 없었던 것이 아니라 많은 준비세력들이 강제퇴장당했다.
‘시장경제 기반의 구축’, ‘대외관계와 무역의 성장’ 등 일제시대 상황을 서술한 항목들은 식민지근대화론의 영향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쌀을 수탈당해 가난해졌다는 속설도 있으나 이는 잘못되었다. …쌀은 가격이 비싼 일본으로 수출되었고 이를 통해 조선의 지주와 농민은 수입증대라는 혜택을 입었다.”
광복 이후 기술부분에 대해서는 결국 “친일파의 입지를 넓히고 미군의 한반도 개입 명분을 주는데 초점이 맞춰졌다”고 한 전문가는 지적했다.
시안은 5·16을 “당시 한국사회의 가장 중요한 국가적 과제인 산업화를 성공적으로 주도할 새로운 대안적 통치집단의 등장 계기가 된 사건”이라며 ‘혁명’으로 규정한 연장선상에서 박정희 일인장기집권체제인 유신독재도 긍정한다. “행정적 차원에서는 국가적 과제 달성을 위한 국가의 자원동원과 집행능력을 크게 제고하는 체제”였으며 “조국 근대화작업의 한 단계 도약”을 위한 장치였다는 것이다. 그런 시각은 한일협정, 베트남전 파병에 그대로 이어진다. “경제개발에 필요한 자본과 기술을 안정적으로 공급”해주었고 “한국경제의 대외 신용도가 크게 상승돼 외국자본을 안정적으로 도입할 수 있는 조건”을 마련해줬다는 것이다. 하지만 실제 한일협정에선 대일 청구권 문제를 호도했고 독도문제를 얼버무려 오늘날의 화근이 되게 했으며, 일본군 위안부 문제 등을 제대로 거론하지도 못했다. 이미 평가가 끝난 12·12 신군부 쿠데타도 12·12사건으로 얼버무렸다. 한승동 선임기자 sdhan@hani.co.kr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