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나푸르나 산군을 배경으로 걷고 있는 도보 여행자들. 허호준 기자
|
5416m 넘는 안나푸르나 트레킹
먼저 세상을 떠난 딸아이
무너진 삶 커지는 절망과 공허
누군가 안나푸르나 가면 치유된다고 말해
그래서 떠난 ‘애도 트레킹’
전세계 여행자·거대한 자연·수도자들 만나
차가운 새벽 밤하늘에는 우리 아이 별도
길은 인생, 안나푸르나는 위안
|
안나푸르나 산군을 배경으로 걷고 있는 도보 여행자들. 허호준 기자
|
절박했다. 2019년 5월, 언제나 해맑게 웃음 짓던 사랑하는 18살 딸이 하늘나라 여행길을 떠난 뒤 모든 것이 무너져 내렸다. 온 가족의 삶은 송두리째 뒤틀렸다. 현실은 비현실인 것만 같았고, 비현실은 현실이 돼 있었다. 무엇을 하고 있는지, 무얼 해야 할 것인지 떠오르지 않았다. 날이 갈수록 공허함이 밀려왔고 절망감은 커졌다. 돌파구를 찾아야 했다.
절망의 끝에 서 있던 때, 누군가로부터 네팔 안나푸르나에 가면 위안을 얻고 치유에 도움이 된다는 말을 들었다. 안나푸르나로 가는 애도 트레킹은 그렇게 시작됐다. 안나푸르나로 가는 길, 이왕이면 가장 높은 곳에 올라 별이 된 아이를 보고 싶었다. 안나푸르나 산군을 왼쪽에 두고 걷는 ‘안나푸르나 서킷(라운드)’ 트레킹 코스를 택했다. 이 코스는 안나푸르나 트레킹 코스 가운데 가장 높은 토롱라(5416m)를 넘는다.
최소한 3~6개월은 준비하고 떠난다는 안나푸르나 트레킹을 출발 3주 전에야 결정했다. 카트만두행 비행기표부터 예약했다. 준비는 그다음에 생각하기로 했다. 일주일을 그냥 보낸 뒤 2주 전부터 본격적으로 준비했다. 서킷 트레킹은 보통 13~15일 정도 걸리지만, 경관 감상이 아닌 위안을 얻고 치유를 위한 길이기에 일정을 단순화했다.
등산화밖에 없던 우리는 모든 장비를 빌렸다. 인터넷에서 현지 여행사를 찾아 연락했고, 포터 겸 가이드(1일 25달러)를 구했다. 트레킹에 필요한 팀스(트레커 정보관리 카드)와 퍼밋(입산 허가증)도 여행사를 통해 발급(1인당 50달러)받았다. 침낭(1일 2달러)과 가이드가 짊어질 배낭(1일 1달러)도 빌렸다. 카트만두의 타멜거리에는 등산 장비 대여점이 많아 장비를 사거나 빌릴 수 있다. 문제는 체력이었다. 지난 5개월 동안 심신이 고갈된 상태였지만, 단시일 안에 체력을 강화할 방법도 없었다. 천천히 걷는 것만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
토롱라에 오르기 전 마지막 산장인 하이캠프(4925m) 로지의 난롯가에 전 세계 도보 여행자들이 모여 앉아 시간을 보내고 있다. 허호준 기자
|
11월2일 오후 카트만두에 도착해 포터 겸 가이드 밈(35)을 만났다. 이튿날부터 트레킹 여정이 시작됐다. 아침 7시 전날 여행사에서 만난 한국인 트레커 2명과 함께 지프를 대절해 카트만두에서 출발해 베시사하르까지 간 뒤 그곳에서 지프를 바꿔 타고 트레킹 출발지인 다라파니(1860m)까지 이동했다. 전 세계 트레커들이 모여드는 베시사하르에서 출발하는 트레커들도 있지만, 일정상 다라파니나 차메부터 트레킹을 시작하는 경우가 늘고 있다고 한다. 절벽 위의 울퉁불퉁하고 좁은 길은 지프와 오토바이가 지나갈 때마다 온통 먼지로 뒤덮여 걷기에 불편하다. 카트만두에서 다라파니까지 11시간 30분이 걸렸다.
다라파니의 한 로지(숙소)에 여장을 푼 뒤 다음날 아침 7시30분부터 트레킹에 나섰다. 길가에는 포터들이 트레커들의 배낭과 짐을 머리에 이고 걷는 모습이 보였다. 밈은 출발하기 전에 자기에게 보조를 맞춰 걸으라고 조언했다. 한라산보다 높은 지대인데도 울창한 산림이 인상적이었다. 뒤로 돌아보니 거대한 설산 마나슬루(8163m)가 눈에 들어왔다.
길은 안나푸르나의 젖줄인 마르샹디강을 따라 이어졌다. 강은 역동적이었다. 걷다 보면 나의 눈높이와 가까워지는가 하면, 까마득한 절벽 아래에서 흐르기도 한다. 석회질이 섞인 옥빛 강물은 폭포수 같은 소리를 내며 몰아치다가, 어느 틈엔가 평온한 물줄기가 돼 흐른다.
|
토롱라를 넘어 보이는 다울라기리 산군의 위용. 허호준 기자
|
비가 내린다. 우기가 아닌 11월에 비가 내리는 경우는 드물다고 밈이 말했다. 비를 피해 들어간 찻집에서 자전거로 토롱라를 넘는 라이언(42·미국)과 피아(30·프랑스)를 만났다. 남미와 베트남 등지에서 교사 생활을 한 라이언은 1년 동안 휴직해 인도와 베트남, 라오스, 미얀마 등 아시아를 라이딩하고 있었다. 라이딩과 걷는 것 가운데 어느 것이 좋으냐고 물었다. 라이언은 “자전거로 힘든 길을 올라갈 때 희열을 느낀다”며 웃었다. 트레킹이 끝난 뒤 그리스 레스보스섬 난민캠프에서 봉사 활동을 하겠다는 피아는 “라이딩보다 걷는 것이 훨씬 철학적이다. 걷는 것은 시간이 소요되지만, 자신을 돌아볼 수 있게 한다”고 말했다.
아내와는 각자의 방식으로 아이를 기억하기로 하고 가급적 서로 말을 하지 않기로 했다. 밈은 계속 우리가 걱정되는지 자기 페이스에 맞추라고 여러 차례 당부했다. 밈이 우리에게 보조를 맞추듯 공감이란 상대방을 배려하는 것이다. 불교 신자인 밈은 들리는 마을마다 마을 입구에 있는 마니차(불교 경전을 넣은 경통)를 돌리며 ‘옴마니밧메훔’(불교 진언)을 암송한다. 우리도 밈을 따라 했다.
차메(2670m)의 타싯곰파(절)를 찾았다. 이곳에서 만난 산두 라마(스님)에게 삶과 죽음의 의미를 묻자 “육신은 사라져도 영혼은 살아 햇빛과 바람으로 돌아다닌다. 어디선가 우리를 보고 있을 것이다. 언제나 우리와 함께 있다고 생각해야 한다”고 말했다. 차메의 포탈라게스트하우스 사장 쿠이상(41)은 유창한 한국어로 의정부에서 12년 동안 했던 불법체류 생활의 고단함과 재산을 모아 로지를 마련한 과정을 풀어놓는다. 로어피상(3200m)의 식당에서 만난 ‘민수 아재’는 음주에 불콰해진 얼굴로 “삼겹살에 소주가 최고”라며 “사랑은 아무나 하나”를 되풀이하다가 아내에게 끌려 나가기도 했다. 식당은 웃음바다가 됐다. ‘민수 아재’도 한국에서 10년간 모은 돈으로 로지를 열어 운영한다고 한다.
트레킹 내내 걷는 길에서 만난 마을들은 티베트 불교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티베트 불교의 상징인 룽다(지붕 위나 대문 앞에 거는 깃발)가 많이 보였다. 로어피상의 로지에선 누군가 옆방에서 돌아눕는 소리, 말소리도 들린다. 옷을 껴입고 물통에 따뜻한 물을 담아 침낭 속에 넣어 잔다.
토롱라를 넘지 못하고 내려가는 트레커들도 보인다. 트레킹 도중 만나는 한국인들은 “히말라야에 한 번도 오지 않은 사람은 많지만 한 번만 오는 사람은 없다”는 말로 네팔 트레킹의 매력을 말했다. 실제로 이곳에서 만난 한국인들 가운데 초행길은 우리밖에 없었다. 노련한 유경험자로 보이는 한국인 트레커는 “준비를 하고 오지 않으면 고산증에 걸릴 확률이 높다. 그때는 즉시 내려가야 한다”며 우리를 안쓰러운 눈으로 바라보기도 했다.
안나푸르나 트레킹을 하는 이유는 다양하다. 나에게는 아이를 기억하는 순례의 길이었고, 성찰의 길이었다. 친구와 함께 서킷 트레킹을 하는 60대 중반의 한국인 트레커는 “그동안 3차례 에베레스트와 안나푸르나 트레킹을 했다. 인생의 후반부를 건강하고 즐겁게 살고 싶어 왔다”며 웃었다. 4년6개월간 군 복무를 한 뒤 3개월 전에 제대한 아미트(24·이스라엘)는 “대학에 복학하기 전에 새로운 인생의 전환점을 만들고 싶어 왔다”고 말했다. 영국 런던에서 출발해 6개월 동안 싱가포르까지 유럽과 아시아 대륙을 라이딩하는 아일랜드 청년은 휴식차 왔다고 했다. 그린란드를 여행하다가 안나푸르나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4년 동안 준비하고 서킷 트레킹에 나선 알렉스(42·네덜란드)는 “인생의 버킷리스트 가운데 하나를 달성했다”며 좋아했다.
|
네덜란드에서 온 알렉스가 트레킹을 하다가 가이드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쉬고 있다. 허호준 기자
|
산타아고 순례길을 라이딩한 60대 초반 부부는 “서킷 트레킹 코스를 라이딩하기 위해 사전 답사차 20일 동안 이곳을 걷고 있다. 산티아고가 아름답다면 서킷 코스는 압도적이다”라고 표현한다.
마낭은 트레커들이 고산증에 적응하기 위해 이틀 정도 머무는 마을이다. 우리는 이미 고산병에 대비한 약을 매일 먹었다. 마낭에서는 틸리초 피크(7134m), 강가푸르나(7454m)와 안나푸르나 3봉(7555m)의 설산이 눈에 들어왔다. 고소(높은 곳) 적응을 위해 프라켄곰파(3945m)의 작은 암자를 갔다. 신발 끈을 풀려고 고개를 숙이자 머리가 핑 도는 느낌이다. 30년 동안 이곳에서 수행하는 논노리(비구니) 아니초르덴(71)은 “명상하면서 행복을 느낀다. 행복은 마음에 달려 있다. 착한 마음으로 타인을 대해야 한다”며 우리가 무사히 토롱라를 넘을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안나푸르나의 마을들은 곳곳에 타르초가 휘날리고, 산등성이마다 초르텐(하얀 불탑)이 서 있다.
마낭의 강가푸르나 호숫가에 앉아 호수와 빙하를 바라보며 아이가 즐겨 들었던 방탄소년단의 ‘아임 파인’, ‘러브 마이셀프’와 아이유의 ‘너의 의미’를 들었다. 아내와 함께 아이를 기억했지만, 서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말을 하면 터질 것 같았다.
마낭에서 레다르(4200m) 가는 길, 눈이 내렸다. 장갑을 낀 손끝이 아플 정도로 저렸다. 누가 볼까 봐 넥워머로 가린 얼굴엔 눈물이 번졌다. 그러고는 아이가 어렸을 때 고사리 같은 손을 잡고 나서면 사람들이 머리를 쓰다듬으며 귀여워했던 광경이 떠올랐다. 아이와 단둘이서 외국 배낭여행을 떠났던 때의 즐거웠던 추억도 기억의 수면 위로 떠올랐다. 어느 틈에 옅은 미소가 눈물을 닦아내고 있었다.
산을 넘고 넘어 걷고 걸으면 하늘에 닿을 것 같았다. 짙푸른 하늘의 색깔과 거대한 협곡, 만년설은 비현실적 조합을 이뤘다. 레다르의 숙소는 저녁 8시가 되자 히터와 전기가 모두 끊겼다. 빵모자까지 둘러쓰고 속바지에 겨울 등산복을 입고 자야 한다.
|
토롱라에 오른 도보 여행자들이 환호하며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허호준 기자
|
별을 보기 위해 밖으로 나왔다. 차가운 새벽 밤하늘, 별이 머리 위에 쏟아진다. 나의 천사는 무수히 많은 별 어디에서 반짝이는 별이 됐을까. 사랑하는 아이의 별을 찾아본다. 밤하늘에 총총히 박힌 별들은 가까이서 딸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닿을 수 없는 심연처럼 아득히 멀리 있었다. 어디선가 스산한 새벽바람이 불어왔다.
하이캠프(4925m)로 오를수록 숨이 거칠어진다. 한발 한발 떼어놓기 힘든 발걸음, 나는 그렇게 나의 아이를 느낀다. 걷는 길옆은 까마득한 절벽이다. 거대한 자연 앞에서 인간의 존재가 보잘것없다는 것을 절감했다. 하이캠프 로지의 난로를 켠 공간에는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전 세계의 트레커들이 둘러앉아 시간을 보냈다. 이불을 더 빌렸지만, 방 안의 공기는 차가웠다. 물티슈로 얼굴을 대충 닦고, 양치는 생각하지도 못했다.
11월10일 이른 새벽부터 토롱라로 향하는 트레커들이 어두운 산길을 이마에 랜턴을 켜고 줄을 지어 걷는 모습은 순례자의 행렬처럼 보였다. 급경사 길을 쉬며 걸었다. 오전 8시40분 토롱라에 올랐다. 아내와 나는 서로 떨어져 아이의 이름을 불렀다. 쌓였던 복받침이 목덜미 깊은 곳에서 솟구쳤다. 한 외국인 트레커가 나의 어깨를 토닥이며 지나갔다. 오색의 타르초가 바람에 휘날렸다. 아이는 토롱라의 바람과 함께 우리에게 왔다.
“나의 천사, 고맙고 사랑하고 보고 싶다.”
좁고 위험한 길이 있으면 평탄한 길이 있고, 오르막길이 있으면 내리막길도 있다. 길은 인생이다. 한번쯤 뒤를 돌아봐야 할 때, 안나푸르나는 위안이었다.
토롱라를 넘고 다울라기리 산군을 보며 황량한 고원의 길을 재촉했다. 네팔 힌두교와 불교의 성지인 묵티나트(3760m)까지 내려간 뒤 버스를 타고 좀솜(2720m)으로 이동했다. 다음날 12시간 동안 버스를 타고 좀솜에서 포카라로 이동했다.
허호준 선임기자 hojoon@hani.co.kr
[ESC] 안나푸르나 여행 쪽지
◇안나푸르나 서킷: 마나슬루(8163m)와 안나푸르나 2봉(7937m)과 3봉(7555m), 4봉(7525m), 강가푸르나(7454m), 틸리초 피크(7134m), 빙하와 호수를 볼 수 있고, 토롱패스(5416m)를 넘은 뒤엔 다울라기리(8167m) 산군까지 볼 수 있는 안나푸르나 트레킹의 백미.
◇일정: 11월2~16일. 순수 트레킹 소요기간 8일(다라파니~좀솜)이지만, 카트만두에서 출발해 서킷 트레킹을 하고 포카라를 거쳐 카트만두로 돌아오는 이동시간을 고려하면 최소 11일, 마낭에서 틸리초 호수를 트레킹하면 2~3일 추가 소요.
◇가는 방법: 인천-카트만두 직항(대한항공)이 있으며, 중국이나 동남아를 거쳐 카트만두로 들어갈 수도 있음.
◇경비: 등산 장비 대여 및 숙식비, 포터 겸 가이드, 팀스·퍼밋 발급 비용 포함 1인당 80만~90만원(항공권 제외)
◇준비물: 여권 유효기간이 6개월 이상 남아 있어야 한다. 각종 상비약 필수(고산병 대비약, 항생제, 두통약, 지사제 등)
광고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