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인터뷰
SF 작가 김보영
소설가 꿈꿨지만 게임회사 근무
‘좋은 작품 하나만 써보자’며 퇴사
2004년 당선되며 전업작가의 길로
지난달 해외에 세 작품 판권 팔려
‘알파고’ 이후 국내서 SF 관심 커져
SF 전문 문학상·출판사도 늘어나
여성 작가가 전체 절반 차지해
“인권 등 현실문제 담은 작품 늘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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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보영 작가는 “서구 과학소설들에서 쉽게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세계관과 현실감 덕에 우리 과학소설들도 국제 무대에서 주목받을 날이 올 것”이라고 기대했다. 김 작가가 지난 23일 강원 평창 산자락의 집 앞 뜰에서 <한겨레>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평창/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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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가 에스에프(SF) 불모지였다니요?”
23일 낮 강원도 평창 자택에서 만난 김보영(44) 과학소설(SF, 에스에프) 작가는 ‘불모지였던 국내에서도 에스에프가 꽃을 막 피우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고 말하자 “오랫동안 그 자리에 있었던 많은 작가와 독자들은 그런 말에 서운해하고 속상해한다”고 웃었다. 국내 과학소설의 대표주자라고 할 수 있는 그는 평창 산자락에 있는 작은 집에서 고양이 일곱 마리와 함께 살고 있다.
국내 과학소설 작가와 독자들이 일궈온 역사는 짧지 않다. 1990년대 피시(PC)통신 공간에서 이미 작가와 독자가 직접 만나는 장이 열렸고, 환상소설(판타지소설)과 더불어 장르문학으로서 꾸준히 성장해왔다. 최근 몇년 사이에는 부쩍 조명을 받고 있다. 과학소설 문학상이 여럿 생겨났고 과학소설 전문 출판사도 늘었다. 문예지나 문학평론가들도 과학소설을 다루기 시작했다. 이공계 연구자 출신을 비롯해 과학소설 작가도 많아지고 있다.
해외에서 한국 과학소설의 번역 출간도 늘고 있다. 지난달 미국 대형 출판사 하퍼콜린스가 김보영 작가의 <당신을 기다리고 있어> 등 작품 셋의 영어 번역 판권을 사들여 화제가 됐다. <당신을 기다리고 있어>는 시공간의 어긋남 때문에 빚어진 연인의 애틋한 기다림을 다룬 작품이다. 한국계 미국인이 운영하는 미국 가야출판사도 김 작가의 단편집을 내년에 출간할 예정이라고 한다. 이미 2015년에도 그의 단편 ‘진화 신화’(박지현·고드 셀러 번역)가 미국의 이름난 에스에프 웹진 <클락스월드>에 발표된 적이 있다.
“우리는 늘 여기 있었어요”
그는 2004년 과학문화재단의 과학기술 창작문예 공모전에 복제인간을 다룬 중편 〈촉각의 경험〉이 당선되면서 본격적인 작가의 길에 들어섰다. ‘더 이상 소설 쓰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을 만큼 좋은 작품 하나만 쓰고서 그만두자’는 간절한 심정으로 쓴 그 작품이 당선되자 전업 작가를 계속할 용기도 생겨났다고 한다.
“제가 기억하는 가장 어린 시절부터 저는 소설가의 꿈을 갖고 있었어요. 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점점 불가능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그래서 대학을 졸업하고 1998년 게임회사에 들어가 그래픽 디자이너로 일했어요. 우연히 회사에 게임시나리오를 쓸 사람이 없어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했어요.” 소설가의 꿈이 다시 깨어나기 시작했다. “2002년 무렵 인터넷의 에스에프 커뮤니티에 몇 편의 단편을 써서 올렸어요. ‘출간을 할 수 있건 없건 나를 위해 한 권의 소설을 써보자’고 생각하고 2004년 퇴사했죠. 그렇게 쓴 <촉각의 경험>이 공모전에 당선됐고 덕분에 작가 생활을 시작하게 된 거죠.”
하지만 남의 말을 비판할 때 “허무맹랑한 공상과학소설 같은 얘기”라고 흔히 말할 정도로 과학소설은 문학작품으로서 제대로 평가받기 어려운 시절이었다. 주류 문학에서는 ‘없는 존재’와 같았다. 작품을 써도 출간하기 어려웠다. 생계의 어려움도 컸다. “더 이상 방법이 없는 건가 하던 때에 2006년 과학문화 웹진인 <크로스로드>(아시아태평양이론물리센터 발행)에서 과학소설을 실어보자는 연락이 왔어요. 원고료가 꽤 됐어요. 그런 식으로 더는 방법이 없는 것 같다 싶을 때마다 뭔가 기회가 생겼죠.“
―요즘엔 과학소설 출판도 많아졌고 해외 소개도 늘어나는 등 주목받는 분위기인데요.
“주류 문학의 시선에서 보면, 과학소설이 갑자기 떠오른 것처럼 보일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우리나라가 에스에프 불모지였던 건 결코 아니에요. 1990년대부터 에스에프가 좋아 모인 사람들의 커뮤니티가 계속 이어졌죠. 우리는 여기 늘 있었는데, 최근에야 많은 사람들의 시야에 들어온 거죠..”
그가 알려준 한국과학소설작가연대 웹사이트(sfwuk.org/7), 그리고 일찌감치 2003년 문을 열어 장르문학의 주요 무대가 된 환상문학웹진 <거울>(mirrorzine.kr) 등에서는 많은 작가들의 작품과 독자들의 평을 볼 수 있다.
―언제부터 과학소설에 대한 우리사회의 인식이 바뀌었다고 생각하나요?
“제 생각에는 2016년 즈음인 듯해요. 물론 여러 다른 요인도 있겠지만 ‘알파고 충격’의 여파가 컸어요. 과학소설에 나오는 인공지능이나 로봇의 시대가 더이상 공상이 아니라 현실이 되고 있다는 걸 느끼게 된 거죠. 정부와 과학기술단체의 인식도 바뀌었고, 에스에프 기획 행사도 많이 생겼어요. 언론매체나 주류 출판사들에서도 과학소설을 다루기 시작했어요. 그동안 쌓여왔던 것들이 알파고 이후에 터져나온 게 아닌가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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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 평창 자신의 집에 있는 김보영 작가. 평창/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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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독자층 다양해져”
과학소설이 남성 작가와 독자 중심의 문화라는 선입견도 있지만 과학소설계에서 여성 작가의 약진은 세계적 추세라고 한다. 소비자 역시, 전체 출판시장과 마찬가지로 여성이 많다.
―과학소설 작가와 독자층에 여성이 많네요.
“사실 과학소설 독자층은 훨씬 넓어요. 강연장에 가보면 할머니, 할아버지도 과학을 배워보고 싶다고 찾아오고, 자녀와 함께 에스에프를 읽고 있다며 중장년층도 찾아와요. 연령층이 고르죠. 청소년 독자가 많을 듯한데, 오히려 공부 때문에 강연장엔 별로 안 보여요. 그리고 국내 에스에프 작가 중 절반 정도가 여성입니다. 국제 행사장에도 여성 작가들이 많이 참석해요.”
―페미니즘 과학소설도 많던데요.
“아마도 페미니즘, 성평등이 미래 사회의 이상적인 모습이고, 그러다보니 미래 과학소설의 소재로 종종 다뤄지는 게 아닌가 해요. 인권 문제나 소외된 사람들의 미래도 자주 과학소설의 소재가 되죠. 이제는 익숙해진 백인 남성 중심의 과학소설과는 다른 분위기라는 점도 주목받는 요인인 것 같아요. 최초의 에스에프라고 얘기되는 <프랑켄슈타인>의 작가도 여성(영국작가 메리 셸리, 1797~1851)이었어요. 프랑켄슈타인 자체가 소외된 여성을 상징한다는 해석도 있고요.”
‘에스에프의 노벨문학상’이라고도 불리는 휴고상도 N.K.제미신 등 여성작가들이 자주 수상하고 있다. 중국 계급사회를 시공간의 개념으로 다룬 하오징팡의 <접는 도시>나 문화혁명을 소재로 다룬 류츠신의 <삼체>가 휴고상을 받는 등 아시아 과학소설도 새롭게 조명을 받는 분위기라고 한다.
“서구의 에스에프 팬들이 새로움을 찾고 있어요. 국내 작품들도 더 많이 해외로 나갈 기회를 찾아야 할 것 같아요. 미국의 가야출판사가 한국 작가 10명의 에스에프 작품집으로 <레디메이드 보디사트바>라는 책을 낸 적 있는데 반응이 꽤 괜찮다고 하더라고요.”
세상은 빠르게 변화했고, 1980년대엔 먼 미래로 상상하던 과학기술들이 현실에서 등장하고 있다. 과학소설은 그만큼 현실의 문제를 더 많이 다루게 됐다. “이제 첨단 과학기술은 현실감 있는 문학의 소재가 됐습니다. 과학소설은 과학기술의 경외감을 보여주던 데에서 더 나아가 페미니즘, 인권, 사랑 같은 현실적인 문제를 더 담아내고 있어요.” 과학소설 장르의 매력을 묻자, 김보영 작가는 “우리가 살아가야 할 미래에 대한 상상력”이라고 말했다. 에스에프는 더욱 다양한 모습으로 진화하고 있다.
평창/오철우 선임기자 cheolwo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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