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인터뷰
‘언니들의 슬기로운 조직생활’ 제작진
여성 직장인 5명 팟캐스트 방송
‘호구 안되는 법’ ‘성희롱 대처법’ 등
회사에서 말하기 힘든 고민 공유
“여성 직장인 콘텐츠 플랫폼 목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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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25일 토요일 서울 서초구 잠원동에 있는 한 스튜디오에 여성 직장인 5명이 모여 <언니들의 슬기로운 조직생활> 팟캐스트를 녹음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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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부장, 신차장, 이과장, 문대리, 박사원. 여성 직장인 5명이 얼굴과 이름을 가리고 직장 생활의 고민을 함께 나누는 팟캐스트 방송이 있다. 각자의 회사엔 비밀로 하고 주말마다 모여 녹음을 한 지 1년4개월. 누구나 하는 고민이지만 사무실에선 말할 수 없었던 이야기들이 랜선을 통해 흘러나오면, 누군가에겐 오늘 하루 직장을 버티는 힘이 된다. 팟캐스트 <언니들의 슬기로운 조직생활>(언슬조) 주인공들을 만났다.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을 하려고 보니까 무지하게 취업이 안 되는 거예요. 회사가 여자를 안 뽑으니까 최고의 스펙은 남자라는 말이 돌고…. 그때 처음 (성차별을) 느꼈던 것 같아요.” (이 과장)
“사회생활이 성차별에 눈을 뜨는 출발점인 것 같아요. 지인의 회사에서 유부남과 미혼녀가 바람이 났는데, 유부남은 더 좋은 회사로 이직했고 미혼녀는 당시 회사에서 권고사직을 당했어요. 여자분에 대한 입에 담지 못할 소문이 회사에 돌고 동영상이 있다느니 난리였어요.” (박 사원)
지난달 25일 토요일, 서울 서초구 잠원동에 있는 한 스튜디오에 여성 직장인 5명이 한자리에 모였다. 직장인의 애환을 이야기하는 팟캐스트 <언니들의 슬기로운 조직생활>(언슬조)의 ‘66화. 여자는 여자의 적? No, 여자는 여자가 돕는다’ 녹음 현장을 찾아갔다. 이날은 ‘내 인생의 첫 성차별, 아하 모멘트(깨달음의 순간)는 언제였나’에 대한 이야기가 오갔다. 이들은 가정에서, 학교에서 특별한 차별을 느끼지 못하다가 취업 준비를 하면서, 직장 생활을 시작하면서 여성에 대한 차별을 처음 느꼈다고 입을 모았다.
지난해 2월 첫 방송을 시작한 이 팟캐스트는 실제 직장에 다니고 있는 1990년생 사원급부터 1973년생 부장급까지 다섯 명의 직장인이 모여 녹음한다. 각자 속한 회사에는 철저히 비밀로 하고 얼굴과 이름도 공개하지 않는다. 그저 박사원, 문대리, 이과장, 신차장, 김부장이란 익명으로 방송한다. 육아휴직 중인 신차장은 이날 자리를 비웠고, 녹음실 밖에선 프로그램의 기획과 편집을 맡는 박피디(40)가 방송을 모니터링했다.
이들의 대화 주제는 직장에서 겪는 고민이다. ‘회사에서 꼴갑질 어디까지 당해봤니’, ‘밑도 끝도 없는 사내 성희롱’, ‘이직과 퇴직의 타이밍’, ‘직장에서 호구 되지 않는 법’, ‘여자라서 저렇다는 편견에 싸우는 법’, ‘번아웃이 찾아온다면’ 등 2019년 한국의 사무실에서 누구나 겪는 조직 스트레스를 여성의 목소리로 해부하고 비판한다.
이 프로그램은 1년 4개월간 순항하며 지금까지 67개의 에피소드를 제작했다. 팟캐스트 플랫폼 ‘팟빵’에서 6월 현재 구독자 2037명, 네이버 오디오클립 3138명, 인스타그램 992명 등을 기록하고 있다. 제작자 박피디(PD)는 “전문 방송인들이 매일 업데이트하는 프로그램이 아닌 현업 직장인들이 주말에 한 번 모여 제작하는 프로그램 중 이 정도면 양호한 성적”이라며 “일화마다 청취자가 소액의 후원금을 낸 후원자 수가 팟캐스트 <김숙·송은이의 비밀보장>보다 더 많다”고 자랑했다.
73년생 김부장부터 90년생 박사원까지
이들 6명은 3년 전 한 독서모임에서 처음 만났다. 함께 영화도 보고 술도 마시다가 마음이 맞아 따로 모임을 만들었다. 지난해 1월 함께 모여 새해 인사를 하다 이 과장이 “오늘 보니까 티브이에서 <슬기로운 감빵생활>이란 드라마를 하던데, 우리도 <슬기로운 직장생활> 한번 만들어보면 어때요”라고 제안했다. 첫 녹음은 자칭 ‘정규직 무경험 14년차’ 프리랜서 피디인 박피디가 사는 서울 마포구 연남동의 옥탑방에서 마이크 두 개로 시작했다. 1990년대 한 대기업 대졸자 공채에서 유일한 여성 신입사원으로 뽑혀 커리어를 시작한 김부장(46)은 외국계 투자은행에서 애널리스트 등을 거쳐 국내 대기업 부장까지 20여년간 직장생활을 했다. 스스로 만든 별명은 ‘부장은 외로워’다. “안녕하세요. 부장은 외로워 김부장입니다”라고 인사한다. 신차장(38)은 은행 영업직으로 근무하는 직장생활 15년차 중간관리자다. “승진보단 운동”이라며 ‘머슬마니아’란 별명을 지었다. 이과장(37)은 “직장은 내가 선택한다”는 마인드로 증권사, 자산운용사, 보험사 등을 여러 번 이직한 경력이 있는 12년차 직장인이다. 방송에선 ‘눈치 보고 비위 맞추는 이과장’, ‘프로이직러’란 별명으로 불린다. 건축을 전공하고 현재 대기업에서 건축 관련 업무를 하는 문대리(33)는 별명처럼 ‘대리끼리 대동단결’을 꿈꾼다. 직장 생활 4년차인 ‘성공한 문과생’ 박사원(29)은 ‘탈조선’을 꿈꾼다.
지금껏 가장 많은 ‘좋아요’ 수를 받은 에피소드는 ‘1화. 성공한 커리어우먼이 되려면 남자와 똑같아져야 한다 vs 아니다’ 편이다. 이 일화에서 신차장은 “금융권에 처음 들어왔을 때 깜짝 놀랐다”며 술자리를 통해 끈끈하게 엮이는 남성 중심적 조직문화 속에서 고민했던 경험을 털어놨다. “예전 상사는 술을 너무 좋아해서 오후 5시40분부터 전화를 돌려 ‘오늘 뭐 해?’ 하는데, 나는 운동을 좋아하니까 근육이 분해되는 게 싫어서 저녁에 술을 마실 수가 없었어요. 그런데 거절을 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마음이 너무 무거운 거죠. 다른 남자직원들은 그 자리에 갔고…. 내가 원하는 걸 택하면서도 굉장히 찜찜했죠.” 같은 금융권에 근무하는 이과장도 “회사에선 일단 일을 잘해야 돼요. 그런데 일은 혼자 하는 게 아니라서 술자리에서 고급 정보가 나오고, 네트워킹이 생긴다”며 술자리에 맘 편히 안 갈 수가 없었다고 했다. 박사원은 회사에서 ‘여자 신입사원’에 대해 술자리에서 특정한 역할을 요구하는 문화가 있다고 털어놨다. 박사원은 “윗분들은 어떤 기대를 갖고 여자 신입사원을 부르는데 제가 술을 많이 못 마시면 확 실망하고, 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막 사근사근하고 싹싹하게 안 굴면 한 번 더 실망한다”며 “나는 그런 싹싹한 사람이 아닌데 그런 척을 해야 하나, 그렇지 않은 척을 언제까지 할 수 있을까 생각했다”고 말했다.
당장 때려치울 수 없는 직장인을 위해
프로그램의 승부수는 현실감(리얼리티)이다. 10화에 ‘슈퍼 워킹맘’이란 별명으로 나온 외국계 회사의 16년차 직장인 홍이사는 아이를 돌보며 직장에서 버텨낸 이야기를 진솔하게 털어놨다. “워킹맘이란 단어 자체가 굉장히 차별적이라고 생각해요. 엄마이면서 일을 한다는 뜻인데, 밖에 나가서 하는 일은 일이고 엄마가 집에서 하는 가사노동은 일이 아니라는 말이 되잖아요. 게다가 ‘워킹파더’나 ‘워킹대디’ 이런 말은 없잖아요.”
간혹 직장인의 애환을 다루는 방송사 프로그램에서는 실제 직장인이 들으면 ‘뭐라고?’라는 말이 절로 나오는 비현실적인 이야기가 있다. “당장 그만 둬”라고 조언하거나, 갑질하는 상사에게 “너도 대들어”라고 말하는 식이다. 하지만 대다수의 직장인은 당장 그만둘 수도 없고, 상사에게 대들 수도 없어서 고민한다. 회사는 생계를 유지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문대리는 “우리 팟캐스트는 20여년의 나이 차이를 둔 여러 세대가 한자리에 모이다 보니 다양한 논의가 가능한 게 장점”이라고 말했다.
여성들이 진행하지만 여성들만 듣는 것은 아니다. 4명 중 1명은 남성 청취자다. 지난 5월5일부터 6월3일까지 최근 30일간 집계한 언슬조 청취자의 분포 현황을 보면, 여성 청취자가 76%, 남성 청취자가 24%였다. 연령대별로는 청취자의 절반이 30대이며 40대, 20대, 50대 순으로 많이 듣는다.
프로그램 초반엔 의도치 않은 오해도 샀다. “잘난 년들이 활개 치는 세상을 위하여”라고 매회 방송 마지막에 외치는 구호 때문이다. 하지만 사실 이들이 말하는 ‘잘난 년’이란 많이 배우고 똑똑한 ‘엘리트’를 의미하는 게 아니다. 김부장은 “지금까지 여자란 이유로 모두 ‘못난 년’으로 살았는데, 여자들도 ‘잘난 년’이 될 수 있고 우리는 모두 실은 ‘잘난 년’이라는 뜻을 담았던 것”이라며 “우리의 꿈은 ‘잘난 년들이 활개 치는 세상을 위한 여성 직장인 연대 콘텐츠 플랫폼’을 만드는 것”이라고 말했다.
김미향 기자 arom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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