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인터뷰
100살 평화활동가 롤랑 베이 프랑스 변호사
1919년 태어나 지금도 변호사 활동
“그만 쉬라고? 그럼 뭐 하러 사나
마지막 순간까지 유용한 일 하고파”
10년 전 세상 떠난 아내와 60년간
동료 법률가이자 평화운동가로 살아
“항상 그리워…그라면 뭐라 할까 생각”
2012년 첫 방한 이후 해마다 찾아와
대학생들에게 유엔헌장과 평화 강연
“국제법 알아야 행동할 힘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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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살 평화운동가이자 프랑스 현역 변호사인 롤랑 베이는 1945년 유엔헌장이 규정한 원칙인 평화와 민주주의, 인권, 자유 등을 전 세계적으로 구현하는 방안을 모색해왔다. 지난 5월28일 서울 종로구 인사동 한 카페에서 만난 그는 “2차 세계대전을 겪으며 정말 전쟁은 없어야 한다는 것을 온몸으로 느꼈다. 정의를 완벽하게 구현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할까, 그 고민을 쫓아오다 보니 여기까지 왔다”고 말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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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7일 서울 서초구 서초동 한 중국집에서 한 프랑스 변호사의 100살을 축하하는 모임이 열렸다. 알록달록한 꼬깔콘 모자에 촛불이 켜진 장난감 안경을 쓴 그는 ‘100’이라는 숫자가 꽂혀 있는 생일떡의 촛불을 끄며 농담을 던졌다. “나는 100년을 산 것보다 중요한 일을 더 많이 했는데 왜 100살만 축하해주는지 모르겠다.”
올해 100살인 롤랑 베이(Roland Weyl)는 현역으로 활동하는 프랑스 변호사이자 평화운동가이다. 1946년 창립된 유엔 자문기구인 국제민주법률가협회 수석부대표인 그가 국제연대를 위해 올해 방문하는 나라마다 100살 생일상이 차려진다고 한다. 이날 생일파티를 준비한 장경욱 변호사가 ‘건강을 유지하는 비법’을 묻자 그의 우스갯소리가 이어졌다.
“나처럼 100살을 산 사람이 있어서 기자가 인터뷰하러 갔다. ‘어떻게 장수를 하셨습니까’라고 묻자 그 사람이 큰소리로 ‘나는 물을 많이 마시고 알코올은 단 한 방울도 섭취하지 않습니다’라고 답했다. 옆방에서 청년들의 말소리가 들렸다. ‘누가 이렇게 시끄럽냐?’ ‘응, 초저녁부터 술에 취한 우리 할아버지 목소리야.’” 지인들이 크게 웃으며 즐거워하자 그는 맥주를 한 모금 마시며 이야기했다.
“나는 (아내가 사망한) 2009년까지 한 번도 혼자 일해본 적이 없다. 1949년에 젊은 여성 변호사, 모니크 피카르를 만났고 그해 결혼해 60년을 함께했다. 우리는 언제나 함께 투쟁하는 동지였다. 아침에 눈을 떠 식사 하면서부터 우리는 정치·법률 이야기를 나누었다. 또 휴가를 떠나는 차 안에서도 논쟁하고, 그 내용이 너무나 충실해 자녀들에게 녹음해서 들려줘야 하지 않을까, 그런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지금까지 내가 활동할 수 있는 것은 동반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프랑스파리변호사협회 명예회장인 롤랑 베이는 1919년 3월18일 1남2녀 중 장남으로 파리에서 출생했다.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때부터 판사·변호사였던 법률가 집안에서 그는 “다른 직업을 생각할 겨를도 없이” 자연스럽게 법을 전공해 1939년, 20살에 변호사가 됐다. 제2차 세계대전 때 레지스탕스(독일 나치에 저항한 운동)에 참여했을 때를 제외하고는 80년간 변호사로 살았다. <한겨레>는 이날 생일파티에 이어 지난 28일 서울 종로구 인사동의 한 카페에서 그를 만났다. 프랑스어에 능통한 정새날씨가 통역을 맡았다.
“동반자 떠난 것이 가장 큰 아쉬움”
―100살을 기념하는 행사가 많이 열리나 보다.
“올해 내가 법률 활동을 시작한 지 80주년이라서 프랑스 파리 법원에서 다른 변호사와 함께하는 축하 모임이 있었다. 가족들이 가까운 지인들을 초청한 행사도 구청에서 열어 줬다. 나는 정말 하고 싶지 않았는데 가족의 요청에 어쩔 수 없이 참석했다.”
―하고 싶지 않은 이유는.
“별로 의미가 없으니까. 죽지 않았기 때문에 100살이 된 것인데, 그게 무슨 의미가 있나.”
―100살까지 현역이라는 게 놀라운데 이제 집에서 쉬어도 되지 않나.
“그럼 왜 사나. 땅으로 빨리 들어가는 게 낫지. 끝까지 유용한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활동하겠다는 의미인가.
“그렇다. 물론 그 순간이 언제인지는 나도 알 수 없지만. (웃음)”
―매일 하는 운동은 없나.
“한 세기 동안 한 번도 한 적이 없다. 달리기하는 사람들을 많이 보는데 뭐가 저렇게 급해서 뛰어다닐까, 그런 생각을 하곤 한다.(웃음)”
농담을 즐기는 롤랑 베이는 레지스탕스로 활동할 때도 재치로 위기를 모면한 이야기를 들려줬다. 그는 레지스탕스에 물품을 전달하고 위조 신분증을 만들어주는 행정적 역할을 담당했는데 어느 날 기차로 이동하려고 역에 갔다가 경찰에게 검문을 당했다. “기차표를 사고 뒤돌아서는데 경찰 2명이 다가와서 손을 내밀며 ‘종이’라고 말했다. 신분증을 보여달라는 요구였지만 나는 손에 들고 있던 담뱃갑을 싼 종이를 건넸다. 그러면서 ‘나는 담배를 피우지 않는다’고 답했다. 일종의 연극이었다. 그 경찰은 황당해 말을 잇지 못했는데 나는 모르는 척 기차 시간이 다 됐다고 말하며 빠져나갔다. 잘못했으면 내 인생이 그때 끝났을 수도 있다. 나는 운이 좋았다.”
전쟁이 끝난 뒤인 1949년 30살 때 첫눈에 반한 아내와 결혼해 딸 다니엘, 프랑스와 아들 페레니를 낳았다. 자신의 아버지가 그랬듯이 그는 잠들기 전 침대 머리맡에서 자녀들에게 프랑스 인권선언, 유엔헌장 등을 읽어주곤 했다. 두 자녀는 법률가가 됐고, 손주 5명, 증손주 2명이 생겼다. 하지만 아내는 2009년 10월, 뇌출혈로 급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향년 84살.
―부인을 어떻게 처음 만났나.
“1949년 1월28일, 청년 변호사들이 재판에서 모의 변론을 하면 특출한 사람 12명을 선출하는 행사가 있었다. 나는 심사위원들과 정치적 입장이 달라 실력이 충분한데도 그 12명에 뽑히지 못했다. 너무 황당해 하며 법정을 나왔는데 어떤 젊은 여성 변호사가 복도에서 나를 위해 큰 목소리로 항의하고 있더라. 이런 말도 안 되는 경우가 어디 있냐고, 부당하다고.”
―그래서 첫눈에 반했나.
“그렇다. 내가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은 아내를 만났던 1949년 1월28일이다. 우리는 서로 너무 좋아서 2월5일에 상견례를 하고 3월17일에 결혼했다. 모든 것에 동의한 상태라 결혼을 안 할 이유가 없었다. 정치 투쟁도, 아이를 낳는 것도 함께하자, 그렇게 합의했다.”
―49일 만의 결혼이라나 신기하다.
“그리고 60년 동안 아무런 일이 없었다는 게 더 신기하지 않나.(웃음) 5월28일, 오늘이 아내의 생일이다. 살아있다면 94살이 됐을 것이다.”
―부인이 떠난 뒤 달라진 점은.
“우리는 개인적 관계를 넘어 사회 정의, 평화를 위한 정치 투쟁, 사회운동에서도 깊은 관계를 형성했다. 많은 일을 함께하며 나는 아내의 의견을 항상 참고했다. 그런 동반자가 사라졌다는 게 가장 큰 아쉬움이다. 이제는 어떤 결정을 할 때 아내라면 무슨 생각을 했을까, 아내라면 무슨 조언을 해줬을까 떠올린다. 그렇게 언제나 함께하는 마음으로 지낸다.”
―특별히 그리운 순간이 있나.
“언제나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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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27일 서울 서초구 서초동 한 중국집에서 장경욱 변호사(오른쪽)가 준비한 롤랑 베이의 100살을 축하하는 모임이 열렸다. 그는 올해 국제연대를 위해 방문하는 나라마다 100살 생일상을 받고 있다. 정은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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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반대 집회 참여로 첫 인연
―2012년 한국에 처음 방문했으니까, 부인은 한국과 인연을 맺지 못했겠다.
“아니다. 우리는 신혼부부 시절인 1950~53년 한국전쟁에 반대하는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당시 리지웨이(맥아더 장군의 후임) 장군이 파리를 방문했는데, 그에 반대하는 집회를 열었다. 그때부터 한국과 연대했고 2012년 9월 나는 처음 방한했다(제4회 코리아국제포럼 참석). 그러나 ‘코리아’(Korea)에는 아직 가보지 못했다. 코리아라고 말하려면 남북이 하나가 돼야 한다. 내가 세상을 떠나기 전에 코리아에 방문하는 날이 오기를 바란다.”
롤랑 베이는 2012년 첫 방한 이후 거의 해마다 한국을 방문했고 여러 대학의 초청을 받아 유엔헌장을 소개하고 있다. 그는 “유엔헌장은 모든 미래세대가 누릴 수 있는 중요한 유산”이라고 설명한다. “유엔헌장이 만들어지기 전인 1945년까지 강대국이 약소국을 약탈하는 ‘힘의 논리’만 있었을 뿐 국제법은 없었다. 그 와중에 1,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났고 끔찍한 일들이 벌어졌고 평화를 구현하기 위해 유엔헌장이 만들어졌다.” 롤랑 베이는 유엔헌장 전문의 주어가 “우리 연합국 국민들(peoples)”이라는 점에 주목했다. “두 차례의 거대한 전쟁으로 말할 수 없는 슬픔과 고통을 겪은 국민들이 나서서 더 이상은 불행이 반복되지 않아야 한다며, 그 불행에서 다음 세대를 구하겠다고 주체적으로 결의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유엔헌장 이후 발발한 한국전쟁은 어떻게 평가하나.
“유엔헌장 27조 3항을 보면,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안보리)가 개입하려면 5개 상임이사국이 만장일치로 동의해야 한다. 1950년 당시 한국전쟁 참전에 별로 동의하지 않았던 소련은 불참했는데 미국은 이를 ‘소련은 어떤 결정이 나든 동의한다’는 입장이라고 자의적으로 해석했다. 한국전쟁 참전은 만장일치의 원칙이 지켜지지 않아 국제법 위반이라고 본다.”
―최근 남북정상회담 등 남북 교류가 활발해지고 있다.
“평창동계올림픽에서 남북이 단일팀을 구성하고 단일기로 하나 된 모습이 멋졌다. 한국 정부가 잘하고 있다고 본다. 이러한 만남이 많아져야 한다. 예를 들어 국제전시회에서 남북으로 나뉘지 않고 하나로 참여할 수 있다. 일본 위안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남북이 공동으로 대응할 수도 있다. 남북이 직접 분단 상황을 해결해야 한다. 2016년 ‘북한식당 종업원 탈북 사건’의 경우 어떤 사람은 납치라고, 다른 사람은 간첩이라고 주장한다. 어찌 됐든 그 사람들은 분단의 비극적인 피해자다. 그런 문제를 함께 풀어나가야 한다.”
북한식당 종업원 집단입국 사건은 2016년 4월8일, 중국 닝보에 있는 북한식당(류경식당) 남성 지배인 1명과 여성 종업원 12명 등 총 13명이 집단 탈북해 동남아시아를 거쳐 국내로 입국한 사건이다. 당시 통일부가 이들이 입국한 지 하루 만이자 20대 총선을 닷새 앞둔 시점에 이 사실을 발표해, 일각에서는 “국정원의 선거용 기획 탈북이 아니냐”는 의혹이 일었다. 박근혜 정부는 이를 부인했지만 북한은 “남쪽의 납치”라고 주장하며 이들의 송환을 요구해왔다. 국제민주법률가협회는 아시아·태평양 법률가연맹과 함께 이 사건의 내막을 밝히기 위한 국제진상조사단을 꾸릴 계획이다. 두 단체는 지난 24~28일 한국에서 준비모임을 갖고 오는 9월 한국 조사에 이어 평양에 들어가 탈북 종업원 가족들과 탈북하지 않은 식당 종업원 등을 만나는 진상조사 활동을 펼치려 하고 있다.
진상조사단의 일원인 롤랑 베이는 국제민주법률가협회를 유엔의 “쌍둥이 자매”라고 설명했다. 협회는 세계 90개국 법률가단체와 법률가가 활동하는 국제 평화·인권단체로, 유엔헌장의 큰 원칙인 평화와 민주주의, 인권, 자유 등을 구현하기 위해 창립됐다. 초대 대표인 프랑스 법률가 르네 카생은 1948년 세계인권선언문 초안 작성에 참여하고 1968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현재는 유엔 경제사회이사회와 유엔 교육과학문화기구의 자문기구이다. 롤랑 베이는 국제민주법률가협회 창립총회 참여자 중 마지막 생존자로서 현재 수석부대표를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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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100살인 프랑스 변호사이자 평화활동가인 롤랑 베이가 지난 5월29일 서울 동대문구 회기동 경희대에서 ‘평화를 말하는 법’이라는 주제로 강연하고 있다. 정은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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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엔 헌장을 공부하세요”
―변론 활동도 계속하나.
“귀국하면 6월6일에 재판이 있다. 팔레스타인 출신 프랑스 변호사가 재판 없이 몇 년 동안 이스라엘에 구금돼 있어 프랑스의 한 지방자치단체가 그의 석방을 요구하며 연대 활동을 펼쳤다. ‘유대인 유럽’이라는 단체가 이를 이스라엘에 대한 공격이며, 인종차별이라고 지자체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나는 지자체를 대리한다. 또 월세를 내지 못한 세입자를 강제추방하는 건물주에 맞서서 세입자의 살 권리를 보호하는 지자체가 있는데, 관련 소송도 맡고 있다.”
롤랑 베이의 수첩과 휴대전화에는 하루하루 스케쥴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그는 매일 오전 8시에 일어나 지하철, 기차를 타고 변호사 사무실과 법원에 간다고 했다. 해외 출장을 갈 때도 홀로 비행기를 이용한다. 평생 운동을 즐기지 않았지만, “한 세기 동안 공부를 게을리 않았다”고 말했다.
지난 29일 서울 동대문구 회기동 경희대에서 열린 ‘평화를 말하는 법’이라는 강연에서 롤랑 베이가 대학생들에게 당부했다. “왜 이렇게 유엔헌장을 모를까, 나는 (방한할 때마다) 참으로 의문이다. 모르면 행동하지 못한다. 반대로 알게 되면 활동할 힘이 생긴다. 그러기 위해선 공부가 필요하다. 내가 당부하고 싶은 말은 국제법 내용을 공부하고, 서로 나누라는 것이다.”
정은주 기자 eju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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