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인터뷰
노무현 정신 잇는 봉하마을 지킴이들
정치 무관심했던 노동자 박성민씨
노 대통령 귀향 뒤 진솔한 모습 끌려
회사 접고 봉하마을서 자원봉사 시작
“그 분은 가식이 하나도 없었어요”
대구 금형노동자 출신 김영호씨
2002년 경선 보며 노사모에 가입
사진 봉사활동하다 서거 뒤 정착
“만나는 사람 항상 배려하셨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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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동안 봉하마을에 남아 있는 것은 순전히 좋아서죠.” “저(김영호)는 봉하마을에서 행복지수가 가장 높은 사람입니다.” 지난 10년 동안 노무현 전 대통령의 고향인 경남 김해 진영의 봉하마을을 지키고 있는 박성민·신미자씨 부부(왼쪽 두 명)와 김영호씨가 지난 14일 <한겨레>와 인터뷰 한 뒤 부엉이 바위를 배경으로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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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는 23일은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서거한 지 10년 되는 날이다. 그는 정치인 시절 지역주의 청산을 위해 싸웠고, 퇴임 후에는 농촌 살리기에 앞장섰다. 당장은 아니더라도 끝내는 이루리라는 ‘우공이산’ 같은 실천이었다. 노 전 대통령이 떠난 뒤에도 지난 10년 동안 변함없이 그의 그런 뜻을 지키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진영지기’ 박성민·신미자씨 부부와 ‘봉하찍사 문고리’ 김영호씨다. 지난 14일 오후 경남 김해시 봉하마을에서 이들을 만났다.
“친구들이 나한테 미쳤다고 했어요. 그들이 볼 때는 정말 정신이 어떻게 되지 않고는 그런 선택을 할 수가 없었던 거죠.”
박성민(51)이 ‘전업’ 자원봉사자로 나설 당시를 회상했다. 대통령 임기를 마친 노무현이 고향으로 내려온 지 8개월째인 2008년 10월이었다. 박성민은 3년여 동안 일했던 경남 합천의 돼지 사료공장에 사표를 던졌다. 그 전 10년은 경남 김해시 진영읍 본산공단에 있는 사료공장에서 일했다. 초등학생 두 딸에 홀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갓 마흔살의 가장이 돈 안 나오는 일을 위해 돈벌이를 그만둔다니 이웃들의 눈에 비정상으로 비치는 것도 당연했다.
“직장 때문에 처음에는 주말에만 와서 봉사활동을 했죠. 노 대통령이 귀향한 뒤 장군차(김해에서 나는 차)를 뒷산에 많이 심었는데 그 일을 돕고, 화포천 청소도 하는 등 주말마다 할 일이 정말 많았어요. 간벌로 나온 목재로 마을 정자를 만드는데 주말에만 가서 일을 하니까 진도가 안 나가는 거예요. 회사를 관두고 1년 동안만이라도 제대로 봉사활동을 하자고 집사람한테 얘기했지요.”
아내 신미자(45)가 그의 말을 받았다. “저도 남편을 따라 주말에는 봉하마을에 와서 여러가지 자원봉사 활동을 했어요. 그때 제가 놀라고 충격받은 게 서울과 광주 등 전국에서 오는 자원봉사자들이었어요. 멀리서 매주 와서 땀 흘리면서 일하고 돌아갈 때는 웃으면서 가는 것을 보고는 저분들은 어떻게 저러나 싶어 놀랐어요. 그런 분들도 있는데 이웃동네 사람인 남편이 1년간만 열심히 돕겠다는데 말릴 수 있나요. 그때는 저도 공장에 다니면서 돈을 벌 때여서 우리 식구 먹고사는 걱정은 전혀 안 들었어요. 한살이라도 젊었을 때 하고픈 일을 하는 게 좋잖아요.”
정말 약속대로 고향에 왔던 그
박성민은 봉하마을에서 멀지 않은 진영읍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부모님이 하루 벌어야 하루 먹고 사는” 집안의 2남5녀 중 장남이었다. 고1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는 바람에 집안을 건사할 책임은 일찍부터 그의 어깨에 떨어졌다. 김해의 실업계 고교를 졸업한 뒤 이 공장 저 공장에서 노동자로 밥벌이를 해야 했다. 먹고살기에도 바쁜 그에게 정치 등 세상일은 딴 나라 얘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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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민씨와 신미자씨 부부는 2008년 2월 노무현 전 대통령이 고향으로 내려오기 전까지는 노 전 대통령과 아무런 인연도 없었지만, 노 전 대통령의 진솔한 모습에 반해 10여년 다니던 회사도 관두고 자원봉사활동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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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 때는 투표 자체를 하지 않았어요. 이 당이고 저 당이고 이 후보고 저 후보고 간에 관심이 아예 안 갔죠. 그래서 선거일은 그냥 하루 쉬는 날이었어요.”
노무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2002년 대선후보로 나왔을 때 같은 고향 사람이고 초등학교(대창초) 선배라는 것은 들어서 알았지만, 그걸로 끝이었다. 노사모(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니 뭐니에는 관심조차 없었다. 그런 그가 노무현에게 끌리기 시작한 것은 노무현의 귀향 뒤부터였다.
“노 대통령은 대통령으로 계실 때도 그동안 봤던 대통령들과는 많이 다른 것 같았어요. 진솔하고 서민적이고 꾸밈이 없는 모습에 호감이 갔었죠. 그런데 퇴임 후에 본인이 약속한 대로 정말로 고향으로 돌아오시더군요. 강원도 등 산수 좋은 데를 두고 아무 볼 것도 없는 이곳으로 말이죠. 고향에서 이웃을 만나서 하는 거나 방문객들을 맞이하는 모습 등에 가식이 하나도 없었어요. 이분은 다른 전직 대통령들과는 진짜로 다르구나하는 생각에서 얼굴이라도 한번 보자고 식구들 데리고 주말에 왔었죠.” (박성민)
“대통령께서 방문객 중에서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온 사람들과는 특별히 사진을 찍어주는 것을 보고는 저도 애들 데리고 줄을 섰죠. 남편은 그러지 말라고 말렸지만, 서민적이고 소탈한 모습을 가까이서 뵙고 싶었어요. 그렇게 갔다가 봉사활동 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우리도 참여하기 시작했어요.” (신미자)
“제가 좋아서 한 일이지 대통령님과 어떤 인연이 있어서 그랬던 것은 아닙니다. 장군차를 심었을 때나 정자를 완성했을 때 여러 자원봉사자들과 함께 대통령님이 따라주신 막걸리를 마신 적은 있지만, 아마 노 대통령께서는 제가 누군지 기억도 못하실 겁니다.”(박성민)
옆에서 별말 없이 함께 점심을 먹던 김영호(49)가 말을 거들었다.
“노 대통령은 만나는 사람들을 항상 배려했어요. 방문객들과 만날 때 당신 말씀만 하고 손 한번 흔들고 끝내는 게 아니라 행사 전에 먼저 사진을 같이 찍었어요. 사람들이 가장 바라는 게 함께 사진 찍는 거라는 것을 아셨기 때문이죠. 또 사진 찍을 때는 아이들과도 눈높이를 맞췄어요. 자원봉사자들한테 술을 따를 때도 꼭 두 손으로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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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4월 장군차를 심은 뒤 새참 시간에 자원봉사자들에게 무릎 한쪽을 꿇은 채 두 손으로 술을 따르고 있는 노무현 전 대통령. ‘봉하찍사 문고리’ 김영호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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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호는 대구의 한 인문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공장에서 금형 노동자로 일했다. 대학 문턱에도 가 보지 못했고, 노조활동을 한 적도 없었다. 사진에 관심이 있어 혼자 취미로 사진기를 들고 다니던 청년은 2002년 민주당의 대선 경선을 보면서 노무현을 좋아하게 됐고, 자연스럽게 노사모에 가입했다.
“사진으로 노무현과 세상과 연결하는 일을 하자는 뜻에서 문고리라는 이름을 썼어요. 문이라는 게 이곳에서 저곳으로 통하고, 서로를 이어주는 역할을 하잖아요. 노사모에서 저를 모르는 사람은 간첩이라고 할 정도로 2002년 대선 경선 때부터 사진 봉사활동을 열심히 했어요.”
‘봉하찍사 문고리’라는 닉네임을 사용하는 김영호는 2008년 노무현의 귀향 때 처음 봉하마을을 찾았다. 대구가 집인 그도 보수적인 가족들의 눈을 피해 공장이 쉬는 주말에만 봉하에 갔다. 그렇게 1년여 동안 숨바꼭질하듯 봉하마을을 드나들던 김영호는 2009년 5월 노무현의 서거 이후에 아예 봉하마을에 눌러앉았다.
“노짱(노 대통령)이 안 계시니까 도리어 떠날 수가 없더라고요. 마침 공장 일도 재미가 없던 때여서 노 대통령이 봉하에서 하려고 했던 유업, 즉 생태농업이라든지 자연환경 지키기, 마을 살리기 등을 이어가는 데 제가 할 수 있는 방법으로 힘을 보태야겠다 마음먹었어요. 그것은 사진으로 기록하는 것이었죠. 돌이켜보면 봉하를 지키는 게 제 운명인가 싶기도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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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4월 어느날 봉하마을 뒷산에 장군차를 자원봉사자들과 함께 심고난 뒤 휴식시간에 활짝 웃고 있는 노무현 전 대통령. ‘봉하찍사 문고리’ 김영호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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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호는 지난 10년 간 티스토리에 ‘문고리의 봉하사진관’이라는 온라인 공간을 열어 봉하마을의 자연과 노무현 묘역 일대의 사계를 찍은 사진을 꾸준히 올리고 있다. ‘봉하마을의 세밀화’라고 할 수 있는 그의 사진은 부산경남지역의 민영방송인 <케이엔엔>(KNN)이 만든 다큐멘터리 영화 <물의 기억>의 토대가 됐다. 오는 23일 개봉되는 또다른 노무현 관련 영화인 <시민 노무현> 제작도 도왔다.
“노 대통령은 나 누군지도 모르지만
비겁하지 않았던 그 닮고 싶어”
“내가 찍어 올리는 사진 통해
한사람이라도 더 그 뜻 알았으면”
박성민은 봉하마을을 포함한 진영 일대를 지키겠다는 뜻에서 ‘진영지기’를 자신의 별명으로 삼았다. 진영지기의 진가는 봉하마을 일대의 친환경농업을 뒷받침하는 ‘농업법인 봉하마을’이 설립된 뒤에 드러났다. 그는 2009년 10월 봉하들판의 친환경 쌀을 전문으로 도정하는 방앗간이 세워지면서 공장장으로 취업했다. 아내 신미자도 몇년 전에 다니던 공장을 정리하고 ‘농업법인 봉하마을’에서 일하다가 요즘은 순수 자원봉사를 하고 있다.
“노 대통령이 돌아가신 뒤에 주변에서는 이제 봉하마을을 떠나서 다른 일을 찾으라고 했지만, 도저히 떠나지 못하겠더라고요. 대통령님이 갑자기 사라지고 난 어려운 상황에서 나 살자고 떠나는 것은 비겁하게 느껴졌어요. 제가 노 대통령을 좋아했던 이유는 서민적인 모습과 어떤 경우에도 비겁하지 않은 거였기에 저도 그를 닮고 싶었어요.” (박성민)
박성민은 지난해부터는 노무현 묘역 아래쪽의 봉하마을생태문화공원 관리소장으로 일하고 있다. 직함이 공원관리소장일 뿐 여전히 봉하마을의 살림꾼이자 해결사이다. 농업법인 봉하마을의 대표를 지내다가 지난해 김해을 보궐선거에 나가 당선된 김정호(59)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지난 10년 동안 봉화산 산림 관리부터 밀렵 감시, 화포천 지키기 등 마을 곳곳에 진영지기 부부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다”고 말했다.
흔들리는 봉하 들판 친환경농업
그러나 박성민은 요즈음 마음이 편치 않다. 노무현이 농촌마을 살리기의 핵심으로 여겼던 봉하들판의 생태농업이 흔들리고 있기 때문이다. 박근혜 정권 때인 2016년 정부는 봉하 일대의 농토를 농업진흥구역에서 해제하겠다고 발표했다. 농업법인 봉하마을과 봉하재단의 이의 신청과 김해시의 반대 의사 표명 등에 힘입어 결국 무산되긴 했지만, 이 과정에서 “봉하재단이 뭔데 반대하냐”고 항의하는 땅주인들과의 갈등이 쌓였다. 70%에 이르는 외지인인 땅주인들은 쌀농사보다는 주변 개발이 이뤄져 땅값이 오르길 원하고 있다. 한번 마음이 흔들린 탓인지 봉하들판의 상당수 땅주인들은 자기 논에 새 흙을 쌓아 논 대신 밭으로 바꾸거나 장기적인 개발을 기대하고 있다. 새 흙을 받으면 토양 성분이 바뀌어 설령 벼농사를 짓더라도 몇년간은 친환경쌀로 인정받을 수 없다.
“친환경농업 면적이 자꾸만 줄어가는 것을 눈으로 볼 때마다 속상하죠. 노무현 대통령이 살아계셨더라도 이랬을까라는 생각이 자주 들고, 그럴수록 그분이 그립습니다.”
이렇게 말하면서 박성민은 묘역 뒤쪽에 우뚝 솟은 부엉이 바위를 자꾸 쳐다봤다.
“땅 가진 사람들이 개발을 바라면서 친환경농업을 일부러 피하는 모습을 보면서는 안타깝고, 내가 지금 하는 일이 나중에 이들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는 회의가 솔직히 들기도 합니다.”
목소리가 활달한 김영호도 이 말을 하면서는 풀이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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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가을 봉하마을 전경. 구름 사이로 ‘평화가 온다’라고 쓰인 캐릭터논과 그 뒤로 노무현 전 대통령의 묘역과 사저가 보인다. ‘봉하찍사 문고리’ 김영호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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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하에서 행복지수는 최고”
하지만 봉하지킴이들은 ‘노무현 정신’의 확산에 대해서는 낙관하고 확신했다.
“제가 젊었을 때만 해도 진영은 정말 골수 보수적인 동네였어요. 그런데 지금은 달라졌어요. 선거 때마다 지역 유지들이 모인 단체들이 지역 분위기를 좌지우지했는데 지금은 그런 조직이 있어도 별 힘을 쓰지 못해요. 끼리끼리 해먹던 풍토도 많이 사라졌고요. 외부 사람들이 많이 이 지역에 들어왔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공정하고 공평한 세상을 강조한 노무현 대통령이 돌아와서 끼친 영향이 컸다고 봅니다. 제 동네 친구들이 변하는 것을 보면 알아요. 그들은 과거 저보다 더 투표를 안 했는데, 요새는 투표장에 꼭 가요. 물론 누구를 찍는지는 알 수 없지만,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서는 투표를 해야 한다는 것을 그들도 이제 알거든요.” (박성민)
“친정이나 시댁 식구들도 많이 변했어요. 전에는 봉하마을 간다고 하면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는데 요새는 저나 남편이 하는 일을 지지해줘요. 그런 게 지난 10년간 일어난 다행스러운 변화죠.” (신미자)
“남들은 저의 인생을 낭비로 보기도 하고 부모님도 안 좋게 여기지만, 저는 봉하마을에서 행복지수가 가장 높은 사람입니다. 돈 빼고는 다 가진 것 같아요. 하하. 여기서는 돈 들 일도 없으니 그것도 걱정거리는 아니죠. 제가 찍어서 올리는 사진을 통해 한 사람이라도 더 그분이 남긴 뜻을 알게 된다면 그것으로 만족합니다.” (김영호)
봉하마을 들판 들머리에서 떠나는 기자를 향해 손을 흔드는 세 사람이 ‘바보 노무현’을 닮은 ‘풀뿌리 바보’들 같아 보였다. 덕분에 봉하 들판 곳곳에 쌓인 새 흙더미 때문에 아릿했던 가슴도 훨씬 가벼워졌다.
김해/글·사진 김종철 선임기자 phill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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