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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04.13 09:23 수정 : 2019.04.13 14:34

[토요판] 인터뷰
‘진짜 노동자’ 출신 여영국 의원
공고 나와 스무살부터 노동자 생활
문성현 위원장 만나 노동운동 시작
노회찬 의원 창원으로 부른 장본인
경남도의원 시절엔 ‘홍준표 킬러’

노 의원 방이었던 510호에 입주
“그의 속에 쏙 들어가 있는 느낌”
“노동정치에 더해 경제 등 전반
실력 갖춰야 진보 성장할 수 있어”

“권영길 노회찬 두 분에 비할 바는 못 되지만, 바닥에서의 소통 등 제가 잘할 수 있는 장점을 살리려고 합니다.” 지난 3일 경남 창원 성산 국회의원 보궐선거에서 당선된 여영국 정의당 의원이 지난 9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 510호실에서 <한겨레>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여 의원의 뒤로 노회찬 전 의원의 사진이 사무실 집기 유리에 비춰 보이고 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정의당 여영국 의원의 4·3 보궐선거 당선은 놀라운 일이었다. 민주당과는 단일화를 했지만, 19대 총선 때 43% 득표를 했던 민중당 후보는 독자 출마를 했다. 진보 거목인 권영길, 노회찬에 비해 후보의 지명도는 턱없이 모자랐다. 진보정치 1번지라는 창원 성산을 지켜낸 비밀을 알고자 지난 9일 오후 국회에서 여 의원을 만났다.

‘진성’ 노동자 정치인이 나타났다. 심상정, 이정미, 홍영표, 김영주, 김성태, 이용득 등 노동계 출신 국회의원이 지금도 여럿 여의도에 있지만, 지난 4·3 국회의원 보궐선거에서 당선된 여영국(54·경남 창원 성산)은 이들과 결이 조금 다르다. 심상정, 이정미, 홍영표 등은 이른바 학출(학생운동 출신)이었던 데 비해 여영국은 어릴 때부터 기계밥을 먹은 노출(노동자 출신)이다. 또, 비례대표로 국회에 들어왔던 단병호(17대 국회의원) 등 이전의 노출 정치인과 달리 그는 지역구로 여의도에 입성했다.

그의 행보는 아직 나직하다. 지난 9일 오후 여영국은 백팩만 매고, 고 노회찬 의원의 방이었던, 이제는 자신의 사무실이 된 의원회관 510호에 첫발을 디뎠다.

—지명도가 낮아 당선이 쉽지 않을 것이라는 관측도 없지 않았는데.

“선거운동하면서 유권자에게 솔직하게 얘기했다. ‘권영길 의원님, 노회찬 의원님을 쳐다보시다가 저를 보니까 영 눈이 아래로 깔리죠? 그분들은 진보정치를 넘어서 대한민국 정치를 대표하는 분이기에 감히 제가 그분들에게 비할 바가 못 됩니다. 그러나 저도 장점은 있습니다. 스무살 막 넘어서부터 이 지역에서 밑바닥 노동자부터 사회생활을 쭉 해왔기에 낮은 차원에서 소통을 잘 할 수 있습니다. 그분들이 가졌던 품격을 지키면서 제 나름대로 부족하지만 최선의 노력을 다하겠습니다’고 말했다. 제가 그분들을 흉내낸다고 될 일은 아니지 않나. 하하.”

창원 성산 보궐선거에서 당선된 여영국 정의당 의원이 지난 9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한겨레>와 인터뷰를 하기에 앞서 노회찬재단에서 보낸 축하 화분 옆에 서서 기자를 맞이하고 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발로 뛴 ‘창원 자영업 보고서’

진솔하지만 당당함이 묻어났다. 여영국의 정치 이력을 보면 그럴 만도 하다. 그는 2010년부터 18년까지 두차례 경남도의원을 지내면서 홍준표 당시 경남도지사와 맞짱을 떴다. 경남도가 진주의료원 폐쇄(2013년)와 무상급식 폐지(2015년)를 막무가내로 밀어부칠 때 여영국이 나서 단식 투쟁 등으로 맞섰다. 무상급식 싸움에서는 결국 그가 이겼다.

—이 방에 들어온 느낌이 남다를 것 같다.

“노회찬 의원님이 살아 계실 때 이 방에 자주 와서 얘기를 나눠서 모든 게 낯익다. 서류와 책만 없을 뿐 책상이나 의자 배치가 다 그대로다. 마치 제가 지금 노 의원님 속에 쏙 들어가 있는 느낌이다.”

20대 총선(2016년) 때 노회찬을 창원 성산구로 불러들인 사람이 바로 여영국이었다. 오래 전부터 서로 알고 지내긴 했지만, 노동운동의 계보가 달라서 그전까지는 아주 친한 관계는 아니었다. 여영국은 지역구(서울 노원병) 옮기는 것을 꺼리는 노회찬을 공들여 설득해 냈다.

—정치인들은 보통 당선이 어렵더라도 자기가 출마하려고 하지 다른 정치인을 데려오지 않는다. 왜 그랬나?

“물론 제 지인들은 ‘네 앞길을 왜 스스로 막느냐’면서 노회찬 영입에 반대했다. 저한테 출마하라는 권유도 있었다. 그러나, 저는 도의원 임기 도중에 사퇴하고 다른 자리에 나선다는 생각 자체를 단호하게 머릿속에서 지웠다. 당시 제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진보정치 1번지’를 살려내는 일이었다. 권영길 의원님이 세웠던 진보정치 1번지를 회복해서 영남의 노동벨트를 지켜내기 위해서는 노회찬 의원이 적임이라고 판단했다. 게다가, 노원병은 안철수 의원이 차지하고 있어서 노 의원님이 출마하기가 곤란한 상황이었다. 한국정치를 위해 의원님을 꼭 국회에 들여보내고 싶었다.”

2019년 4월 3일 치뤄진 창원 성산 보궐선거에서 당선된 여영국 정의당 의원의 당선증이 지난 9일 오후 국회 의원회관 510호실 책상 위에 고 노회찬 의원의 사진 옆에 놓여 있다. 이 방의 직전 주인인 노 의원은 2016년 총선 때 여 의원의 설득과 도움으로 서울에서 창원에 내려가 당선됐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여영국은 도의원 시절 투쟁력 못지않게 정책 능력도 발휘했다. 자신의 지역구인 창원 상남동 일대의 자영업자 1500명을 직접 만나 조사한 ‘2013 창원지역 자영업 실태조사 보고서’는 전문가들도 놀랄 정도로 내용이 알찼다. 현장조사를 하면서 깊이 인터뷰한 사람들의 얘기를 담은 책(<상남동 사람들-자영업자 그들의 빛과 그림자>)도 이듬해 펴냈다.

—행정안전위원회를 희망했는데 상임위는 정해졌나?

“교육위원회밖에 자리가 없는 것 같더라. 창원시의 숙원인 특례시 문제 해결을 위해 행안위를 희망했는데 자리가 없다니 그렇게 하자고 했다. 도의원을 할 때 교육위에서 2년 활동한 적은 있으나, 국회 소관은 훨씬 광범하니까 앞으로 공부를 많이 해야 한다.”

—진보정치인으로 어떤 정치를 할 건가.

“우선 제가 노동자 출신이니까 많은 분들이 기대하는 노동정치를 빼고 갈 수는 없다. 그러나 그것만 가지고는 정의당이 성장하고 확장하는데 상당한 한계가 있다고 보여진다. 진보정치의 뿌리를 지역에서 더 깊이 내리려면 노동문제만으로는 안 된다. 경제 등 전반의 활동을 해 나가야 하고, 대한민국의 근본 자체를 바꿔야 한다. 노회찬이 50년된 불판을 갈자고 한 맥락처럼 저도 나라의 근본을 바꾸는 정치를 하고 싶다. 그렇게 해야 세상을 조금씩 변화시킬 수 있다.”

—근본적 문제는 뭐라고 생각하나?

“우선은 경제민주화가 가장 큰 문제다. 경제민주화를 이뤄내는 것은 대통령선거에서 권력을 잡는 것보다 힘들다. 그것을 위해서는 주체가 되는 노동자들의 단결된 힘이 강화되어야 한다. 다만, 국민 눈에는 자칫 반기업 이미지로 비칠 수 있으니 진보진영이 설득력 있는 논리적 근거와 경제민주화가 이뤄졌을 때의 구체적인 모습을 제시할 필요가 있다.”

—문재인 정부에 대해서는 어떻게 보나?

“‘정의로운 대한민국을 만들겠다’고 출발할 때는 좋았고, 많은 기대도 했다. 그런데 그동안의 과정에서 여러 우려가 나온다. 특히 노동분야의 퇴보가 우려스럽다. 노무현 정부 시절에도 유사했는데 그 현상이 빨리 나타나고 있는 것 같다. 촛불정부의 성공을 위해서라도 지금 박수만 치고 있을 수는 없다. 잘하는 것은 협력하겠지만 못하는 것에 대해서는 비판과 견인하는 역할을 하려고 한다.”

쌀뜨물 먹고 자란 노동투사

여영국은 1964년 12월(양력으로는 65년 1월) 경남 사천의 가난한 농가에서 6남1녀의 막내로 태어났다. 마흔이 넘은 어머니의 젖이 나오지 않자, 아버지는 “사람되기 글렀다”면서 갓난애를 집 뒤켠 대나무숲에 갖다 버렸다. 친할머니가 아이 울음소리를 듣고 다시 데려와서 사카린을 탄 쌀뜨물을 먹여 키웠다.

여영국은 집안 형편을 생각해 1980년 수업료가 무료였던 국립 부산기계공고를 선택했다. 졸업(1983년) 뒤 창원의 방위산업체인 동양기계에 입사했다. 동양기계는 ㈜통일에 인수돼 나중에 통일중공업(현 S&T중공업)이 됐다. 그곳에서 문성현(67·현 경제사회노동위원장)을 만난 게 인생의 전환점이었다. 서울대 경영학과 출신의 문성현은 노동운동을 위해 출신을 감춘 이른바 ‘위장취업자’로 일하고 있었다.

4·3 보궐선거에서 당선된 여영국 정의당 의원은 지난 9일 <한겨레>와의 인터뷰에서 “저는 포장은 못 합니다. 앞으로도 보여주기 위해서 마이크 앞에 서지는 않을 겁니다”라고 말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노동운동에는 어떻게 발을 들여놓게 됐나.

“처음에는 일 마치고 술 한 잔 하고 싶은 생각만 가득한 젊은 노동자였다. 잔업에 빠지고 싶은데 작업반장이 허락을 안 해줬다. 제 생일인 어느 토요일 저녁에 친한 형님이 파티를 열어줘서 술을 먹고 야근조로 들어갔는데 술이 취해 일을 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도 조퇴를 안 내주길래 화가 나서 철조망 담을 넘어서 도망갔다. 퇴사 당할 줄 알았는데 다른 작업반으로 보내더라. 그 반에 문성현 위원장이 있었다. 그와 친해지면서 노동 문제에 눈을 떴다. 중학교 친구가 사무직으로 있던 노조에도 들락거리면서 책을 빌려 읽었다. 그때 처음 읽은 책이 <암태도 소작쟁의>(박순동 저)였다.”

여영국은 문성현을 도와 어용이던 통일중공업 노조를 민주화하는데 앞장섰다. 1985년 문성현은 노조위원장에 선출됐고, 여영국은 22살 나이에 노조 대의원에 뽑혔다. 그러나, 전두환 정권 말기인 당시는 노조 민주화라는 말 자체가 금기였으며, 탄압 대상이었다. 문성현은 위장취업 혐의로 구속되고, 여영국은 다른 동료들과 함께 1986년 파업을 벌였다가 구속되고 해고됐다. 이 때부터 그는 본격적인 노동운동가의 길을 걸었다. 인근 마산의 유명한 노동운동가였던 부인(한경숙)도 이때 만났다. 당시 노동운동은 말이 좋아 운동이지 실제로는 피가 튀는 전투였다. 무술유단자로 구성된 구사대가 쇠파이프를 휘둘렀으며, 이에 맞서 노동자들도 쇠파이프 등으로 무장한 선봉대를 꾸렸다. 대부분 사람들은 앞장서길 꺼렸지만, 여영국은 투쟁 현장에서 몸을 사리지 않았다. 그가 전과 7범이라는 화려한 타이틀을 갖게 된 이유이기도 하다.

—왜 몸싸움하는 일에도 앞장섰나?

“모든 투쟁에서 선봉대가 됐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누군가 책임지고 일을 해야 하는 상황이면 제가 나서려고 했다. 어정쩡하게 해서 다른 사람까지 다치게 하고 싶지 않았다.”

—노동운동 전사로 활약하다가 정치에 발을 들여놓은 계기는 뭐였나.

“2003년 두산중공업 노동자 배달호 열사가 가압류 등 노동 탄압에 항의해 분신 자살했을 때 64일 간 이어진 투쟁에 참여했다. 그때 노동자를 대표하는 정치인이 한 명이라도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면서 정치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직접 공직선거 출마를 결심하게 된 계기는 2008년 노무현 대통령의 서거였다. 세번째로 나선 민주노총 경남본부장 선거에서 떨어진 뒤 집에서 놀고 있을 때였는데 서거 소식을 듣고 머리를 세게 한 대 맞은 것 같았다. 아, 내가 이대로 있으면 안 되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다시 투쟁 현장(대림자동차 정리해고)에 돌아가서 천막농성을 벌이고, 2010년 지방선거 출마를 결심했다.”

2015년 3월 홍준표 경남도지사의 무상급식 중단 조처를 막기 위해 창원시 경남도의회 앞에서 단식 농성을 벌이고 있는 여영국 당시 경남도의원. 사진 여영국 페이스북
“된장 뚝배기 같은 사람”

진보신당 후보로 나선 첫 선거에서 그는 한나라당(현 자유한국당) 후보를 꺾는 파란을 일으켰다. 4년 뒤 2014년 선거에서는 원외 군소정당인 노동당 후보로 나섰음에도 거뜬히 재선에 성공했다. 통합진보당의 비례대표 경선 부정사건(2012년)의 여파로 진보 후보들이 추풍낙엽처럼 나가떨어지던 때였다. 당시 진보 정당 소속 후보로는 유일하게 지역구 광역의원에 당선됐다. 4년 간 발로 뛰어다닌 그의 성실함과 진실됨을 유권자들이 알아봤던 것이다. 2018년 지방선거 때도 그의 당선을 다 점쳤지만, 거센 민주당 바람에 떨어졌다. “지역구 주민들이 저의 낙선을 도리어 미안해했다. 그런 마음이 이번에 노회찬 의원을 상실한 데 대한 안타까움과 결합돼 좋은 결과가 있었던 것 같다”고 그는 말했다.

—당선되자 마자 총선이 1년밖에 안 남았다. 정치인으로 성장하려면 내년에 당선되는 게 무엇보다 중요한데 대책이 있나.

“국회의원으로서 일을 제대로 해내는 게 중요하다. 그런 기본이 제대로 안 된 상태에서 선거구도만 짜는 것은 필패전략이다. 일하는 과정과 모습을 유권자들에게 제대로 보여주려고 한다. 물론 무엇을 일부러 보여주기 위해 마이크 앞에 서지는 않을 것이다. 시커먼 제 얼굴 그대로 다니듯이 저는 원래 포장을 잘 못한다.”

여영국을 잘 아는 이들은 “바탕이 단단하고 심지가 굳다”(심상정 의원) “된장 뚝배기 같은 사람”(한석호 전 민주노총 사회연대위원장)이라고 평했다. 짧은 인터뷰만으로는 진면목을 다 알 수 없지만, 시원시원한 답변을 들으면서 꾸밈없는 사람인 것만은 분명해보였다. 노회찬의 상실이라는 큰 아픔을 겪은 뒤 새로 등장한 진보 정치인의 성장을 지켜볼 기회를 가진 것은 그나마 다행일 것이다. 김종철 선임기자 phill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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