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인터뷰
최기상 전국법관대표회의 전 의장
2017년 ‘판사 블랙리스트’ 파동 뒤
8년 만에 법관대표회의 소집돼
판사들 의견 모아 사법개혁 방향 제시
“법관대표회의 향한 공격들
‘기대와 관심’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출신·소속만으로
사람 규정은 인간존엄 무시 태도”
“사회 급변하며 분쟁 내용도
상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변화 중
이를 맡은 젊은 판사들이
목소리 내는 것 국민 위해 바람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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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법관대표회의 최기상 전 의장(서울북부지법 부장판사)이 지난 8일 서울 강남의 한 카페에서 <한겨레>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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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그리고 법관 여러분께.”
지난해 5월28일 최기상 당시 전국법관대표회의 의장(서울북부지법 부장판사·사법연수원 25기)은 무거운 마음으로 컴퓨터 앞에 앉았다. 앞서 5월25일 발표된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 관련 특별조사단’의 조사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박근혜 정부 시절 법원행정처가 재판을 정부와의 흥정 수단으로 삼아 재판에 개입하려 했고, 사법행정에 비판적 목소리를 낸 법관들을 ‘블랙리스트’에 올렸다는 내용이었다. 그는 고심을 거듭하며 한 문장 한 문장을 적어 내려갔다. “… 사법부의 사법행정권 남용 행위로 인해 직접 고통을 겪으신 분들, 그리고 사법부와 법관에 대해 신뢰를 보내주신 국민들께도 깊은 사죄의 말씀을 올립니다. … 오로지 법과 원칙에 따라 사법행정권 남용 사태가 처리되도록 전국 법관대표들과 함께 반성하고 토론하며 고민함으로써 주어진 사명과 책임을 다하겠습니다.” 그는 5월28일 법원 내부전산망에 이 ‘사과문’(사법행정권 남용에 관해 드리는 말씀)을 올렸다.
판사 개개인은 흔히 독립된 사법기관이라 불린다. 공정성을 담보하기 위해 홀로 판단해 결정하는 외로움을 숙명처럼 떠안는다. 독립성이 생명인 법관 사회에 등장한 ‘블랙리스트’ ‘재판 개입’이라는 말은 일선 판사들을 분노하게 했고 머리를 맞대게 만들었다. 2017년 3월 ‘사법부 블랙리스트’ 의혹이 처음 불거진 뒤, 신영철 대법관의 촛불시위 관련 재판 개입 사태 이후 8년 만에 전국법관대표회의(법관대표회의)가 소집돼 출범한 이유다.
지난 8일 서울 강남구 한 카페에서 만난 최기상 전 법관대표회의 의장은 “사법부가 행정권 남용 사태로 국민과 헌법의 법정에서 재판을 받는 것과 같은 엄중한 상황이다. 마치 저희가 법정에 서 있는 느낌”이라며 “법관대표회의는 사법부의 뼈저린 자기반성과 함께, 환골탈태를 위한 제도적 방안을 마련하려 노력했다”고 지난 1년을 회고했다. 2017년 6월 출범한 법관대표회의가 지난해 2월 상설화된 뒤 최한돈 전 부의장(사법연수원 28기)과 함께 의장단으로 선출됐던 최 전 의장은 지난달 24일 1년여의 임기를 마무리했다.
“저희가 법정에 서 있는 느낌”
법관대표회의는 전국 법원별·직급별 판사 대표 119명이 모여 머리를 맞대는 회의체다. 2년 가까이 ‘사법농단’ 사태에서 법원 구성원이 자정의 목소리를 내고 대안을 제시하는 방향키 구실을 했다. 2017년 2월16일 이탄희 판사가 낸 사표로 드러난 ‘판사 뒷조사 파일’ 파동은 이후 사법부 블랙리스트 의혹→사법행정권 남용 사건→사법농단 사태로 확대됐다. 법관대표회의는 이 과정에서 법원의 추가 조사(2017년 6월19일), 형사 절차 포함한 성역 없는 조치(2018년 6월11일),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 문건 추가 공개(2018년 7월23일), 국회에 ‘탄핵소추 검토’(2018년 11월19일) 의결 등 주요 국면마다 법원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했다. 2·3차 추가 조사가 이뤄지는 등 김명수 대법원장과 법원행정처는 법관회의 의결 사항을 상당 부분 수용했다.
“일련의 사법행정권 남용 행위가 형법상 범죄이든 아니든, 명백한 건 공정한 재판에 대한 국민의 기대를 저버렸다는 것이고 법관 독립이란 가치를 부정했다는 점입니다. 해결책, 검찰 수사에 대한 견해는 저마다 다를 수 있겠지만, 다수 법관은 이 사태의 심각성을 같은 관점에서 바라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법관대표들은 사법농단을 초래한 근본 원인으로 지목된 대법원장의 제왕적 권한 문제와 ‘사법 관료화’를 해결하기 위해서도 머리를 맞댔다. 지난해 9월 법원행정처를 폐지하고 법관 인사를 심의하는 독립 기구를 설치해야 한다는 목소리를 냈다.
하지만 실제 사법부 개혁은 법관대표회의가 내놓은 개혁안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법관대표회의는 ‘일선 법관의 의사를 반영해 법원장을 보임해야 한다’고 의견을 내놨지만 법원장 추천 제도는 ‘절반의 성공’에 그쳤다. 지난 2월 의정부지법 법원장으로 신진화(29기) 부장판사가 단독 추천됐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법관대표회의가 탄핵 검토를 의결한 지 석달이 넘었지만 국회 또한 감감무소식이다.
이에 대해 최 전 의장은 “30년 동안 병이 들었다면 30년을 치료에 쓸 생각을 해야 한다. 빠른 걸음은 아닐지라도 대담하고 단호한 걸음이니, 김명수 대법원장의 남은 임기 내에 뚜렷한 성과가 있으리라 기대한다”고 말했다. 지난 1월 법원행정처는 법관대표회의에 ‘법관대표회의 의결사항 집행 현황과 계획’ 문건을 전달했다. 이 문건엔 의결 사항 상당수가 사법행정에 반영됐고 일부는 집행 논의 중이라는 내용이 담긴 것으로 알려졌다.
최 전 의장은 국회의 지지부진한 상황에 대해서는 말을 아꼈다. 그는 “‘국회의 법관 탄핵 검토’는 권력분립 등 헌법 원칙을 거스르지 않는 범위 안에서 신중하게 의결했다. 실제 탄핵 여부는 국회와 헌법재판소의 권한이어서 그 판단을 기다리는 것이 순리”라면서도 “헌법기관이 헌법 정신을 훼손하는 결정을 하지는 않을 것이라 믿는다”고 덧붙였다.
법관대표회의가 지난해 2월 상설화되면서 위상이 높아지자 그 정당성을 흔들려는 시도도 잦아졌다. “법원 내 연구모임인 국제인권법연구회가 법관대표회의의 운영진과 구성원 다수를 장악했다”는 주장이 대표적이다. 지난해 10월29일 최 전 의장은 국정감사에 출석해 법관대표회의의 편향성을 따지는 공세에 시달렸다. ‘김명수 대법원장의 오른팔’ ‘친위대’라는 모욕적 표현도 들었다. 하지만 법원행정처가 조사해 국회에 제출한 자료를 보면, 대표 법관 중 국제인권법연구회 소속은 24%로 전국 판사 3천여명 대비 비율(16%)과 큰 차이가 없다.
그는 “이런 수치까지 언급할 필요도 없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국제인권법연구회 소속 판사들이 단일한 정체성으로 움직이지도 않습니다. 법관을 떠나 사람을 어디 출신, 소속인지만으로 규정짓는 행위는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무시하는 저열한 태도라고 단호히 말하고 싶습니다.” 최 전 의장은 2015년 우리법연구회(지난해 말 해산) 회장을 맡은 바 있고, 현재는 헌법연구회 회원이다. 인권법연구회엔 가입한 적이 없다. 그는 “차라리 전국 판사 3천여명이 인권법연구회에 다 가입해버리면 어떨까 싶은 생각이 들 정도다. 언제까지 그런 이야기를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최근 김경수 경남도지사 1심 재판을 맡아 실형 선고를 내린 성창호 부장판사에 대한 정치권의 공격에 대해서도 같은 취지의 생각을 밝혔다. “법관이 당사자의 출신 지역, 경력, 성적 지향 등을 이유로 판단을 달리해선 안 되듯, 법관에 대해서도 경력, 소속 단체를 그 결과와 결부해 판단하는 것은 극히 신중해야 합니다.” 법관대표회의는 온라인투표를 거친 끝에 이 문제에 대한 의견을 내놓지 않기로 결론을 내렸지만, 최 전 의장은 앞선 논란 모두 같은 맥락의 문제라는 생각이다.
하지만 최 전 의장은 법관대표회의를 둘러싼 각종 비판이나 논란에 대해 전체적으로는 유연한 태도를 보였다. “법관대표회의가 출범한 지 2년이 안 됐습니다. 법원 내 민주주의를 막 실현하려는 상황에서 이 정도 논의는 ‘기대와 관심’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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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6월11일 경기 고양시에 있는 사법연수원에서 전국법관대표회의가 열리고 있다. 이날 전국법관대표회의에는 각급 법원 판사회의에서 선출된 법관 대표 115명이 참석해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 사태에 대한 처리 방안을 논의했다. 고양/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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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사직 향한 과분한 평가 부끄러웠다”
1999년 임용된 최 전 의장은 올해로 법관 생활 21년째다. 광주지법 판사를 시작으로, 인천지법, 서울중앙지법 등을 거쳤고 두차례 헌법재판소 파견을 다녀왔다. 그는 “판사가 되기 위해 들인 노력과 판사가 된 뒤 들이는 정성에 비해 사회의 평가가 과분해 늘 부담스럽고 조금은 부끄러웠다”고 말했다. 그래서 매 사건 당사자들이 어떤 여정을 거쳐 법정에 이르렀을지, 5분도 채 안 되는 재판을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과 비용을 들였을지 고민한다고 한다. 서울지방변호사회가 발표한 ‘2010년 법관평가’에서 만점을 받고 상위 평가 법관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2016년 8월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부 시절, 미쓰비시중공업이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에게 손해를 배상해야 한다는 판단을 내렸고 이듬해 8월 이명박 정부 당시 민간인 불법사찰 피해자에게 국가가 지급한 손해배상액 일부를 사찰에 관여한 공무원들이 분담해야 한다는 판결을 하기도 했다. ‘좋은 재판’을 위한 그의 고민은 ‘사법행정’에 대해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고 행동에 나서는 동력이 됐다.
법관대표회의는 법원이 자정작용을 할 수 있다는 점을 외부에 증명해 보인 동시에, 내부적으로는 재판 외 업무에는 침묵을 지키던 판사들이 사법행정에 주체적으로 의견을 내는 결과로 이어졌다. 특히 과소대표됐던 젊은 판사들이 자유롭게 목소리를 내는 통로 구실을 했다. “지난해 법관대표회의 구성원 119명 분포를 보면, 전국 전체 법관의 기수별 현황을 거의 정확하게 반영하고 있어요. 오랜 경력의 법관이 과도하게 사법부를 대표하고 사법행정을 독점하던 과거에서 나아가 전체적인 균형을 맞추게 된 거죠.”
또한 법관대표회의는 ‘좋은 재판’에 대해 법관들이 토론하는 물꼬를 텄다고 최 전 의장은 평가했다. 언론 등의 관심은 항상 고등법원·대법원 등에서 진행되는 사회 유명 인사의 재판에 쏠린다. 하지만 일반 서민이 맞닥뜨리는 재판은 소액 재판이나 형사단독 재판이다. 주로 젊은 법관이 담당한다. “사회가 급변하면서 분쟁의 종류나 내용도 상상하지 못하는 방향으로 변화하고 있습니다. 이에 공감해야 하는 젊은 판사들이 사법 개혁에 목소리를 충분히 내는 것이 다수 국민에게도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지난해 선출된 법관대표들의 임기가 마무리되면서 법관대표회의는 15일까지 새로운 대표자를 선출해달라고 권고했다. 전국 각급 법원에서 대표자 선출 절차가 마무리 수순을 밟고 있다. 최 전 의장은 1년 동안 짊어진 의장직을 내려놓았지만 또 다른 법관들이 올해도 바통을 이어간다. 최 전 의장은 지난해 취임하면서 법관대표회의에 대해 이런 표현을 쓴 바 있다. ‘시작은 있지만 끝은 없는 이어달리기.’
“사법행정권 남용 사태로 사법부가 기득권화됐다는 비판이 거셉니다. 도망가서도, 막연하게 대처해서도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어려운 일이지만 법관대표회의에서 머리를 맞대면 새로운 방법들이 떠오르더라고요. 올해도 법관대표회의가 국민 신뢰를 회복하는 길을 걸어갔으면 좋겠습니다.”
고한솔 장예지 기자 so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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