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인터뷰
사회역학 연구 김승섭 교수
사회구조·제도가 건강에 미치는
영향 연구하는 사회역학자
세월호 참사, 천안함 생존장병,
쌍용차 해고노동자 등 연구 주목
“돈·권력 없는 사람 삶 대변하는
지식 생산해내는 데 과학자 도움”
“너만 힘드냐? 나는 더 힘들다
고통 올림픽이 펼쳐지고 있는 듯”
“절박하고 예민한 문제 다루되 과학자 태도 잃지 않는 학자 소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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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섭 고려대 교수(보건과학대학)가 지난달 10일 서울 안암동 고려대 연구실에서 <한겨레>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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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섭 고려대 보건과학대학 교수(40)는 ‘숫자’를 다루는 일을 한다. 50%, 75.2%, 20.6%. 이 숫자들은 차례로 지난 1년 심각하게 자살을 생각해본 천안함 생존장병의 비율(2018년 연구), 우울 및 불안장애를 겪는 쌍용차 해고 노동자의 비율(2015년 연구), 백화점·면세점 노동자들이 화장실을 가지 못해 1년 동안 방광염을 진단 받은 비율(2018년 연구)이다. 그의 전공은 사회구조와 제도 등이 건강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하는 ‘사회역학’이다. 2017년에 자신의 연구를 바탕으로 출간한 <아픔이 길이 되려면>은 그해 14개 출판상을 받으며 주목을 받았다. 지난해 12월 자신의 강의인 ‘공중보건의 역사’를 정리해 쓴 <우리 몸이 세계라면>도 화제가 됐다. 김 교수는 올해 안식년을 맞아 1년 동안 자신이 박사학위를 받은 미국 하버드대에서 연구교수로 일한다. 농산물을 생산하는 저임금 이주노동자들을 연구할 계획이라고 한다. 출국하기 전인 지난달 10일 서울 성북구 고려대 보건과학대학 교수실에서 그를 만나 지금까지 연구 작업의 의미와 앞으로의 계획을 물었다.
<전태일 평전> 사놓고 못 읽었던 모범생
2013년 고려대 교수가 된 뒤 김 교수의 시선이 머무는 곳은 곧 고통이 자리한 곳이었다. 쌍용차 해고노동자, 세월호 생존학생, 성소수자, 천안함 생존장병, 백화점·면세점 판매직 노동자…. 짐작만 하던 아픔들은 그를 거쳐 딱 떨어지는 숫자로 변신한다. 그 숫자를 그는 “우리 이만큼 더 살릴 수 있었어요”라는 의미라고 말했다. ―지난해 12월 태안화력발전소 비정규직 노동자 김용균씨의 죽음 뒤 많은 좌절감을 느꼈던 것으로 안다.
“좌절감이라고 하면 너무 멋진 표현인 것 같다. 그냥 숨이 막혔다. 랜턴이 없어 휴대전화로 어두운 곳을 비추며 일했던 환경, 그의 주검이 수습되지 않은 상태에서 돌아갔던 옆 컨베이어벨트, 주검을 수습해야 했던 동료 노동자…. 비현실적인 수많은 장면이 실제로 벌어졌고 이런 상황이 바뀌지 않을 것 같다는 두려움이 너무 컸다.”
―그동안 많은 고통을 목격했다. 김용균씨가 특별했던 이유가 있나?
“나는 어쨌든 비정규직 산업재해와 건강연구를 하는 사람이다. 이 문제를 몰랐나? 아니다. 연구가 부족했나? 그것도 아니다. 하지만 비정규직 문제는 학자 입장에서 어떤 말을 해도 진부한 판이 되어버렸다. 그렇다고 한국 사회가 원래부터 엉망이었고, 지금도 엉망이라고 냉소할 수는 없다. 나는 교수라는 기득권을 가지고 연구를 하는 사람이다. 김용균씨의 죽음은 내 책임이기도 하다. 앞으로도 비슷한 일이 벌어질 것이다. 그런데 뭘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이른바 ‘위험의 외주화’ 등 한국 사회의 고질적인 문제가 한번에 해결될 리는 없지 않은가.
“물론 어떤 문제도 쉽게 해결되지 않는다. 2015년 미국의 모든 주에서 동성결혼이 법제화됐다. 하지만 동성애 차별과 낙인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다. 다만 그런 발전이 있으면 더 나은 질문과 새로운 문제를 가지고 논의하고 싸울 수 있다. 비정규직 문제는 그런 상황이 아니다. 오히려 과거보다 더 악화됐다. 언어가 초라해지는 것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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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섭 교수가 2015년 6월4일 서울 성북구 고려대 하나과학관 강의실에서 쌍용자동차 해고자 142명의 건강 상태를 설문조사한 연구 결과를 노조 관계자들에게 설명하고 있다.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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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자신이 노동 문제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때를 꼭 집어 말하긴 어렵다고 했다. ‘구로공단’이 있는 서울 신도림동에서 초·중·고 시기를 보냈다. 사는 곳 근처에는 큰 서점이 없었다. 책 읽기를 좋아했던 그는 종종 서울 영등포구에 있는 서점을 다녔다. 영화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이 개봉한 직후인 고등학교 2학년 때 그 서점에서 <전태일 평전>을 샀다. 일주일 동안 책을 책상에 올려놓았지만 끝내 못 읽고 반품했다. 그는 “중요한 이야기인 것 같아서 책을 사긴 했는데, 막상 사니까 무서웠다”며 웃었다. ‘독서 미수 사건’을 제외하면 전형적인 모범생으로 고등학교 시절을 보냈다. 1998년 연세대 의대에 입학했다. 입학 발표 뒤 일기장에 2개의 꿈을 적었다. ‘공부를 마음껏 하면 좋겠다.’ ‘약자에게 도움이 되면 좋겠다.’
―인턴·레지던트 과정을 거쳐 전문의 자격을 따고 임상의를 하는 일반적인 길과 다른 길을 걸었다.(김 교수는 졸업 뒤 서울대 보건대학원에서 석사, 하버드대에서 박사학위를 땄다.)
“고등학교 때는 하고 싶은 일이 ‘해야 했던 일’이었다. 공부가 그랬다. 또 교과서에서 훌륭한 사람이 되라고 하니 훌륭한 사람이 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런데 대학에 가서는 우리 사회에 필요한 모범과 의대 과정을 밟아가는 것이 다를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대학 1학년 때 산업재해를 연구하는 학회에서 활동했는데, 노동자들과 기타를 치면서 놀던 날이 있었다. 문득 주변을 둘러봤는데, 그곳에 열 손가락이 모두 있는 사람이 나뿐이더라. 그런 모습을 목격하면서 직업환경 전문의가 되거나 사회역학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키워간 것 같다.”
―사회역학은 신생 학문으로 안다.
“맞다. 2000년에야 첫 교과서가 나왔다.
―사회역학으로 무엇을 할 수 있나?
“어떤 입장을 옹호하는 언어는 결국 지식이다. 돈과 권력이 있는 사람은 자신의 논리와 언어를 우아하고 세련되게 내놓는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의 삶을 대변하는 언어는 제대로 없다. 면세점 노동자들이 의자에 앉지 못해 하지정맥류에 걸리고, 천안함 생존장병들의 외상후스트레스증후군(PTSD) 유병률이 높고, 성소수자들이 자살을 생각하는 비율이 높다는 것은 중요한 지식이라고 생각한다. 과학자가 도움 될 수 있는 지점도 바로 그 부분이고, 내 역할은 그런 지식을 생산해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삼성반도체 직업병 등 여러 재판에서 법정 증언을 하거나 전문가 소견서를 제출했다.
“기업 등 상대 쪽은 돈 많은 법무법인들이 있으니까 한국이나 심지어 외국의 권위 있는 학자에게 자문한 내용을 담은 소견서를 재판부에 제출한다. 반면 이쪽은 자문료를 줄 수 있는 돈이 없으니 그런 방식으로 대응하기가 어렵다. 사회적 약자를 연구하는 연구자들이 계속해서 나올 수 있냐도 문제다. 인공지능, 유전자 빅데이터, 이런 분야는 갈 곳이 상대적으로 많은데 같은 수준의 역량이 있더라도 사회적 약자를 연구하는 이들은 갈 곳이 없다. 우리 연구실에도 정의감 있고 똑똑한 젊은 제자들이 많은데 연구를 지속할 수 있을지 걱정이 된다. 적어도 박사학위를 받고 몇년은 걱정 없이 일할 수 있는 시스템이 마련될 필요가 있는데…. 앞으로 더 힘든 싸움이 될 것 같다.”
김 교수는 “링 위에 서 있다”는 표현을 즐겨 썼다. 링 위에 올라선 순간, 도망갈 곳은 없다. 김 교수 역시 그 링을 내려올 생각이 없다. 지난 6년 동안 그는 링 위에서 하나같이 아프고 고통받는 이들에 대한 연구를 해왔다. ―고통에 대한 연구들을 계속 이어서 했다.
“아픈 이야기들은 자석 같은 힘이 있었다. 하나가 다른 하나를 끌어왔다. 세월호 생존학생 연구가 천안함 생존장병 연구를 끌고 왔다. 쌍용차 해고 노동자에 대한 연구가 백화점·면세점 판매직 노동자 연구와 손해배상·가압류 노동자 연구로 이어졌고. 동성애·트랜스젠더 연구는 에이치아이브이(HIV) 낙인 연구 등으로 이어졌다. 연구하면서 한국사회가 참 잔인하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세월호 참사를 봤을 때 피해자를 대하는 태도나 정부와 언론의 대응, 지원의 방식 등 모든 측면에서 문제가 많았다. 그런데 나중에 천안함 생존장병 연구를 했더니 비슷한 문제가 그때부터 있었던 거다. 세월호 생존학생들이 병원에 갔는데, 증상이 사고와 관련이 있는지 증명이 안 된다는 이유로 치료를 못 받을 뻔했던 적이 있었다. 그런데 천안함 생존장병들도 군대에서 정신과 치료를 받기 어려웠던 거다. 언론이 자극적인 기사를 쓰기 위해 피해자들에게 상처를 남기는 방식으로 취재한다거나, 두 사건과 관련한 기사에 많은 이들이 그들의 고통을 함부로 이야기하는 댓글을 남기는 것도 비슷했다. 세월호 참사 때 벌어졌던 숱한 일들은 우리 사회가 오랫동안 비극의 피해자들을 대해온 실력이 고스란히 드러한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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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24일 서울 중구 국가인권위원회에서 열린 손배가압류 피해노동자 236명 첫 실태조사결과 발표회에서 김승섭 교수(왼쪽)가 사회를 보고 있다. 강창광 기자 cha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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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관도 비관도 하지 않고
―최근에 낸 책 <우리 몸이 세계라면>을 보면 조선 때 중종이 백성들이 전염병으로 죽어가는데도 제대로 보고하지 않는 지방 관리를 쫓아내는 장면이 나온다. ‘죽음에 마음이 움직이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이유였다. 우리 사회가 그런 상황이 아닌가 싶다.
“우리 사회가 피해자를 바라보는 시선에는 하나의 패턴이 있다. ‘너만 힘드냐? 나는 더 힘들다.’ 서로의 고통을 겨루는 ‘고통 올림픽’이 매일매일 펼쳐지고 있는 셈이다. 타인의 고통에 대해 모두 공감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고통에 감정 이입하는 것이 정말 힘든 일이라는 것을 아니까. 다만 함부로 말하지 않는 것, 자신이 던진 돌이 얼마나 아픈 돌인지 아는 것. 우리한테 부족한 것은 그런 것 같다. 공부를 하다 보면 그런 감수성을 아무런 진통 없이 확보한 사회는 없다. 더 나은 실력을 갖추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낙관할 수 있나?
“쉽게 낙관하지도 비관하지도 않으려고 한다. 박정희 정권 때 민주화 운동을 했던 천영초의 삶을 다룬 책 <영초언니>를 봤다. 그때보다 분명 지금이 나아졌다. 내가 학문을 하면서 싸울 수 있는 건 그때 그렇게 희생된 사람 덕택이라고 생각한다. 그들 때문에 훨씬 더 나은 링에 오를 수 있었던 거다. 나도 다음 세대가 더 나은 링에서 더 나은 적과 싸우도록 하고 싶다.”
―그동안 발견해낸 숫자들은 우리 주변의 고통을 직관적으로 알 수 있게 해준 훌륭한 지표였다. 하지만 이 숫자들이 시간이 흐르면서 피로감을 가져올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적어도 제도권에서는 한번도 드러나지 않았던 고통을 드러냈다는 점에서 지난 연구들이 의미가 있었던 것 같다. 당시에는 많은 이들이 절박하게 죽어가고 있었고, 싸우고 있는 당사자의 현황을 파악할 수 있는 언어와 데이터를 만드는 것이 필요한 일이었다. 그렇다면 그다음 단계는 무엇이 되어야할지 나 역시 고민이다.”
―여러 연구를 하면서 학자로 유지해야 할 거리를 지키기가 쉽지 않을 것 같다.
“나는 사회운동가가 아니다. 때로는 연구 결과가 현장에 있는 사람들이 알려지기 원하는 내용과 어긋날 때도 있다. 그런데 거기서 연구자의 정체성을 지켜내지 못하면 짧게는 과학적으로 튼튼하지 못한 지식이 만들어지고 장기적으로는 연구자로서의 방향을 잃게 된다고 생각한다.”
―앞으로는 무엇을 하고 싶나?
“‘나에게 몇년의 시간이 주어졌을까’라는 질문을 자주 한다. 인간은 언젠가 죽는 유한한 존재이지 않나. 교수라는 직업을 가진 유한한 존재가 할 수 있는 가장 의미 있는 일이 무엇인지 생각을 해보니 내 성격이나 역량상 연구보다 교육이라는 생각을 했다. 지금 연구실에 10여명의 제자가 있다. 10년 뒤나, 20년 뒤 이들이 내 바통을 이어받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힘든 길을 가게 될 거다. 그때 버팀목이 돼줄 수 있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개인적으로는 마지막까지 보기 싫지 않은 성실한 학자로 남았으면 좋겠다. 절박하고 예민한 문제를 다루되 과학자의 태도를 잃지 않는 학자가 되고 싶다.”
김 교수는 스스로 ‘순발력으로 승부를 하는 캐릭터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저는 세상에 내놓을 수 있는 언어를 모으는 성격이에요. 그래서 꼭 필요한 조언을 해주는 아내에게 모든 이야기를 먼저 해요. 주변에도 많이 물어요. 그렇게 해서 오랜 시간에 걸쳐 고민을 쌓아 올린 뒤에야 제 언어로 이야기를 할 수 있어요.” 그가 1년 동안 모아올 언어가 무엇인지 궁금하다.
정환봉 기자 bon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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