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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7.07.23 10:06 수정 : 2017.07.23 10:18

이정미 정의당 대표가 2017년 7월19일 국회의원회관에서 인터뷰 도중 정의당의 비전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왼쪽 가슴의 브로치는 지난해 국회의원에 당선됐을 때 인천의 노동자들이 선물해준 세월호 손뜨개 배지다. 그는 지금까지 한번도 배지를 빼지 않고 달고 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토요판] 인터뷰
이정미 정의당 대표

이정미 정의당 대표가 2017년 7월19일 국회의원회관에서 인터뷰 도중 정의당의 비전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왼쪽 가슴의 브로치는 지난해 국회의원에 당선됐을 때 인천의 노동자들이 선물해준 세월호 손뜨개 배지다. 그는 지금까지 한번도 배지를 빼지 않고 달고 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유일한 원내 진보정당인 정의당의 선장이 바뀌었습니다. 오랫동안 한국 진보정치를 이끌어왔던 심상정 의원이 물러난 당대표 자리에 신예인 이정미(51) 의원이 선출됐습니다. 그는 “비정규직 등 사회적 약자들의 삶을 실제로 해결하는 정당”을 만들어 “2020년 총선에서 제1야당이 되겠다”는 목표를 내걸었습니다. 이 대표를 지난 19일 오후 국회의원회관에서 만나 정치적 포부와 살아온 얘기를 들어봤습니다.

‘2020년 제1야당’ 내걸고 대표 당선
“집권 꿈꿀 수 있는 기반 갖춰야
약자 삶 실제로 바꾸는 정치 할 터
대통령 꿈, 진보정당 집권 위해 당연”

대학 1년때 전태일 얘기 듣고 충격
‘데모냐 학업이냐’에서 운동 선택
학교 중퇴 뒤 공장취업 노조 만들어
10여년 노동운동…2003년 정치 입문

정치인들은 보통 야심이 있더라도 숨긴다. 장차 대선 주자가 되고 싶은 마음이 있어도 아닌 척한다. 그래야 경쟁자한테 견제를 덜 받고, 유권자한테는 착실한 인상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지난 11일 정의당 대표에 선출된 이정미 대표는 다르다. 오히려 속생각을 솔직히 드러낸다. 국회의원 2년차에 불과한 새내기 정치인이지만, 그는 “대통령이 되고픈 꿈이 있다”고 과감하게 말했다.

그러나 그는 웃음이 풍부하고 소탈하다. 인터뷰 동안에도 근엄하게 굴거나 쓸데없이 무게를 잡는 대신 발랄하게 자주 웃었다. 표정은 가식적이지 않고 자연스러웠다. 이웃집 누나나 언니 같은 느낌이었다.

-문재인 정부 두달에 점수를 매긴다면?

“취임 직후에는 90점이라고 말한 적이 있는데 지지율이 80%를 왔다 갔다 하는 지금은 대략 80점까지 줄 수 있을 것 같다. 이 정부에 국민의 기대 수준이 원체 높은 만큼 모자라는 20점을 앞으로 채워나가는 데 방점을 뒀으면 좋겠다.”

-모자라는 부분은 어떤 점인가?

“우선 인사에서 초반 원칙이 제대로 안 지켜진 것이 문제다. 사람이 하는 일이 완벽할 수 없지만, 인사 5원칙을 준수해서 새 정부에 거는 기대에 부응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나머지는 대체로 잘하고 있지만, 외교안보 분야에서 사드 문제를 굳이 한-미 정상회담에서 성급하게 얘기할 필요가 있었을까 싶다. 노동 분야에서는 민간부문의 비정규직 문제 해결에 신경을 더 썼으면 좋겠다. 대통령이 인천공항공사를 방문해서 공공 부문 비정규직 문제 해결에 희망을 준 것처럼 민간 현장도 방문해서 자극을 줬으면 좋겠다. 정규직이 제로인 민간 기업이 꽤 있다.”

“비례대표 선거구제에 사활 걸겠다”

-조대엽 고용노동부 장관 후보자가 자진 사퇴한 이후 후임에 정의당의 심상정, 노회찬 의원을 발탁하는 게 어떠냐는 의견이 일반 시민들 사이에서 나오고 있는데?

“정의당이 진짜 노동 문제를 잘 다룰 수 있는 당이라는 국민의 신뢰가 있는 것 같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그런 일이 이뤄지려면 집권당 및 정부와 정의당 간에 정책적인 합의가 먼저 이뤄져야 한다. 그런 논의나 움직임은 없다.”

-문재인 대통령도 내년 6월 지방선거 때 개헌안을 국민투표에 부치겠다고 얘기했다. 개헌에 대한 정의당의 입장은 뭔가?

“다른 당에서는 자꾸 권력구조에 대해서만 관심이 많은데 실제로는 권력구조보다 선거제도가 더 중요하다. 선거제도 없는 권력구조 개편은 앙꼬 없는 찐빵이다. 선거구제 개편은 특정 당의 유불리를 떠나서 대한민국 정치시스템을 정상화시키는 일이다. 흔히들 선거의 4원칙(보통·비밀·평등·직접)이라고 하는데 여기에 비례 하나를 더 넣어 5원칙을 세워야 한다. 선거제도 개혁에 사활을 걸려고 한다. 기본권에서는 노동 존중의 정신을 헌법에 담았으면 좋겠다.”

한국의 진보정치는 1959년 진보당의 조봉암이 이승만에 의해 억울하게 사형당한 뒤 오랫동안 암흑기였다. 1997년 ‘국민승리21’(총재 권영길)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재건이 시작됐으며, 2004년 총선에서 민주노동당(대표 권영길)이 10석의 당선자를 냄으로써 마침내 원내에 진출했다. 하지만 일심회 사건에 연루된 당원 제명 여부 등 북한에 대한 견해 차이로 2008년 진보신당(공동대표 노회찬 심상정)이 민주노동당에서 갈라져 나왔다. 2011년 말 민주노동당, 국민참여당, 진보신당 탈당파가 모여 통합진보당으로 통합했으나, 이듬해 비례대표 후보 부정선거 사건을 계기로 또다시 노회찬, 심상정, 유시민 등이 탈당해서 진보정의당을 만들었다. ‘인천연합’(민족을 중시하는 운동권인 엔엘(NL)의 한 계보)의 이 대표도 이때 함께 통합진보당을 탈당했다. 이후 진보정의당은 2013년 정의당으로 이름을 바꿨으며, ‘경기동부연합’이 주축이 된 통합진보당은 2014년 헌법재판소에 의해 해산됐다.

이정미 정의당 신임 대표(왼쪽)가 지난 13일 오전 국회에서 열린 3, 4기 지도부 이취임식에서 심상정 전 대표와 손을 잡은 채 하트를 만들어 보이고 있다. 이 대표는 심 전 대표에 대해 “친한 언니이자 정치 멘토”라고 말했다. 이정우 선임기자 woo@hani.co.kr

“자기 이익 우선하는 계파는 이제 없어”

-이 대표를 3세대 진보정치인으로 부르는 사람들도 있다. 권영길 전 대표가 1세대였다면 심상정, 노회찬 의원이 2세대, 이 대표가 3세대라는 구분인데 전임자들과 어떤 차이가 있나?

“그런 기준으로 본다면 1세대는 진보정치를 만드는 리더십이었고, 2세대는 지키는 리더십이었다고 볼 수 있다. 2세대가 끌어오는 동안 진보정당에는 많은 부침이 있었지만 그래도 절대로 포기하지 않고 지켜왔다. 난관을 헤쳐왔던 기반 위에서 저는 진보정당을 키우는 리더십이 되려고 한다. 그래도 우리가 존재해야 한다고 국민들에게 그동안 설명했다면 이제는 우리가 집권을 꿈꿔보겠다는 얘기를 할 수 있도록 당을 키울 임무가 나에게 주어졌다고 본다. 이번 대선에서 정의당과 심상정은 우리 사회의 정치적 무관심층인 여성이나 청년, 비정규직 노동자의 이름을 불러줬다. 그로 인해 우리 사회의 다수인 이분들이 처음으로 자신들의 삶을 놓고 우리 당과 얘기하기 시작했다. 이들을 우리 정치의 주류로 끌어들인다면 진보정치가 만년 소수정당이라는 오명을 탈피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당대표에 선출된 뒤 “2020년 총선에서 제1야당이 되겠다”고 말했다. 목표가 엄청난데 달성 가능하다고 보나?

“지금 집권 정당을 뺀 나머지 정당들의 지지율이 비슷비슷하다. 국민들이 정당 재배열 내지는 체제 전환의 시기로 보는 게 아닌가 싶다. 우리 사회가 한 단계 업그레이드 되려면 민주당 왼편에 정의당이 있고 오른쪽에는 바른정당 정도가 있어야 한다. 내년 지방선거에 이런 구도로 임하려고 하며, 선거제도 개혁은 그러한 질서를 만들어 나가기 위한 방편이다.”

-지난해 메갈리아 사태로 인한 탈당 소동에서 보듯 당의 노선이나 방향을 둘러싼 논쟁이나 계파 문제 등도 있는 것 같은데.

“제가 정의당에 대해 가장 큰 자부심을 갖는 것은 당 전체의 이익이 아니라 계파의 이익을 우선하는 계파가 없다는 점이다. 사실 예전의 진보정치는 이러한 문제들 때문에 아픔을 겪었는데, 저희는 그런 게 없다는 자부심 하나는 있다. 저희는 창당 과정에서 이제 더 이상의 실패가 있어서는 안 되며, 성공하는 진보정치를 위해 서로 경험이 달라도 같이 가야 한다는 공통 목표에 도달했다.”

-이 대표께서는 대표 경선 때 장차 대통령을 꿈꾼다고 얘기한 적 있다.

“그렇다. 당대표에 왜 출마하는가를 고민하면서 이제는 정말 정의당을 집권을 꿈꾸는 유력 정당으로 키워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다면 나는 이 당에서 무엇을 할 것이냐를 생각하게 됐고, 그런 리더십을 가지려면 나 스스로도 정치적인 꿈을 가져야 하는 것이 아니냐고 판단하게 됐다.”

-다른 정치인들은 그런 포부나 생각이 있어도 보통 숨기는데 당당하게 드러내는 모습이 특이한데.

“정의당을 그렇게까지 끌고 가고 싶다는 제 강렬한 열망이라고 보면 될 것 같다. 제 개인이 대통령이 되고 싶다 아니다를 뛰어넘는 얘기로 들어주면 좋겠다.”

-정치를 하면서 두가지 큰 고비가 있었다. 하나는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이 갈라질 때였고, 다른 하나는 통합진보당과 진보정의당(정의당의 전신)이 갈라질 때였다. 첫번째는 잔류를 택했고, 두번째는 탈당을 했는데.

“간단하게 얘기하면 첫번째는 진보정당을 분열시킬 만한 일이 아니었다. 충분히 당 안에서 함께 해결할 수 있는 일이라고 판단했다. 두번째는 진보주의자는 가장 민주주의자여야 하는데 제가 탈당을 결심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당내) 폭력사태였다. 그것을 정당화하는 사람들하고는 진보를 꿈꾸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그 차이다.”

비례대표 경선 부정선거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열린 통합진보당 중앙위원회(2012년 5월12일)에서 당권파(‘경기동부연합’ 주축)는 심상정, 조준호, 유시민 공동대표 등을 폭행했다.

이정미 대표는 한국외국어대(신문방송학과) 1학년 2학기 때인 1984년에 학교를 그만두고 노동운동에 뛰어들었다. 그 뒤 인천에서 죽 활동하다가 2003년 민주노동당 당직자로 차출돼 정치권에 발을 들여놓았다. 민주노동당 최고위원과 통합진보당 대변인, 정의당 심상정 후보 선대위 전략기획본부장 등 10여년 동안 진보정치의 일선에서 일했다. 총선 직전인 2007년 입당해 의원이 되고, 신데렐라처럼 당대표에 오른 이정희 전 통합진보당 대표와는 비교되는 행적이다.

2013년 2월5일 서울 여의도 동아빌딩 5층에서 열린 진보정의당 중앙당 현판식에 이정미 당시 최고위원(왼쪽 셋째)이 참석하고 있다. 이 최고위원은 2012년 통합진보당의 비례대표 경선 부정 사건과 관련한 당내 폭력 사태 이후 심상정, 노회찬, 유시민 등과 함께 통합진보당을 탈당했다. 이 최고위원의 왼쪽은 박창완 서울시당 공동위원장, 오른쪽으로 노회찬 공동대표, 조준호 공동대표, 박원석 원내수석부대표 등이 보인다. 김봉규 <한겨레21> 기자 bong9@hani.co.kr

신입생 때는 날라리 대학생

-대학 1학년 말부터 노동운동을 했으니 매우 빠르다. 당시 대개는 4학년을 마칠 때쯤 노동 현장으로 가지 않았나?

“저는 대학생이 되자마자 화장을 하고 다니면서 멋을 부리던 날라리였다. 선배들이 쟤는 학생운동을 할 애가 아니라고 생각해서 아예 건드리지도 않았다. 입학한 지 한달이 막 지났을 때 교내에서 4·19 집회가 열렸다. 학생들이 노래를 부르면서 운동장을 돌고, 경찰은 교문 밖에서 페퍼포그차를 동원해 최루액을 쏘아대는 모습을 점심 먹고 들어오면서 봤다. 그 장면이 너무 슬퍼서 앉아서 울고 있었다. 그때 1년 선배 언니가 다가와서 차 한잔 마시자고 해서 학교 앞 다방에 따라갔다. 그의 첫마디가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앉자마자 ‘넌 전태일이라는 사람을 아니?’라고 물었다. 전태일 이야기를 듣고 전철을 타고 집으로 가는 동안 내내 멍한 상태였을 정도로 충격을 받았다. 노동자들이 진짜 그렇게 살고 있다면 바꿔야 하지 않을까를 생각하면서 휴학할 때까지 밤마다 마음이 계속 엎어졌다 뒤집어졌다 했다. 그러다 휴학을 하고 겨울에 공장에 갔는데 어머니가 알고는 ‘니가 이 짓을 계속할 거냐 학교를 다닐 거냐 결정해라’고 해서 저는 ‘이 일을 그만두지는 못할 것 같다’고 답했다. 엄마는 ‘그러면 학교를 때려치우라’고 했고, 저 역시 쿨하게 그만두고는 어린 나이에 사회운동으로 나간 것이다.”

-휴학할 때도 어머니와 담판을 했다고?

“그 선배를 만난 뒤 여름방학 때 시위에 참가했다가 5일 동안 구류를 산 적이 있다. 그때 어머니가 데모할 건지 학교 다닐 건지를 결정하라고 했다. 저는 시위를 그만두지는 못하겠다고 했다. 2학기 등록금이 끊겼고 할 수 없이 휴학했다.”

-보통 그럴 때 시위 안 하겠다고 거짓말하고 계속 자기 할 일을 하지 않나?

“우리 언니가 가끔 나보고 엄마랑 똑같다고 한다.(웃음) ‘네, 알겠습니다’ 하고 뒤에서 몰래 할 수도 있는데 제가 지지부진한 것을 싫어한다. 그런 게 엄마를 닮은 것 같다.”

-노동운동 현장에 가서 어려움을 많이 겪었는데 후회를 한 적은 없나?

“후회는 없었는데 복학 안 한 것은 지나고 보니 아쉽더라. 1992년도엔가 민주화운동으로 제적당한 학생들을 복귀시켜준 적이 있다. 그때 학교를 다시 갔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많이 난다. 제도 교육도 정말 중요하고, 거기서 맺어지는 여러 인간관계도 사람을 성숙시키는 데에는 도움이 된다는 것을 나이가 들면서 점점 느끼게 됐다. 그래서 제가 뒤늦게 방통대(경제학과)에 입학해서 4년을 꼬박 다니고 성공회대 엔지오(NGO)대학원도 다녔다.”

부산에서 태어난 이 대표는 초등학교 입학 때까지 인천의 외할머니 밑에서 자랐다. 두번째도 딸이 태어나자 친할머니가 어머니를 심하게 구박했기 때문이다. 초등학교는 부산 친가로 돌아가 다닌 뒤 중학교 때 가족이 모두 인천으로 이사했다. 그는 나홀로족이다. “진보정치랑 결혼한 것이냐”고 짐짓 물었더니 “언젠가는 좋은 사람을 만날 수 있기 때문에 그런 말을 좋아하지 않는다”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김종철 선임기자 phill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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