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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헬로! 만화로 보는 한국사>를 펴낸 명랑만화 1세대 만화가 윤승운 화백이 22일 서울 강남구 삼성동 도서출판 이락에서 <한겨레>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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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인터뷰
새 역사만화책 낸 만화계 원로 윤승운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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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헬로! 만화로 보는 한국사>를 펴낸 명랑만화 1세대 만화가 윤승운 화백이 22일 서울 강남구 삼성동 도서출판 이락에서 <한겨레>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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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1980년대 초등학교를 다녔던 40~50대들은 <요철발명왕>과 <두심이 표류기>를 그린 윤승운 화백을 기억할 겁니다. 길창덕·박수동·신문수 화백과 함께 명랑만화 최전성기를 이끌었던 그는 지금도 역사만화로 왕성한 활동을 펼치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는 <헬로! 만화로 보는 한국사>라는 새 책을 펴내기도 했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본 만화를 그리는 비결을 데뷔 55년차인 ‘맹꽁이서당 훈장님’에게 들어봤습니다.
“고구마 백개 심자.”
공부에는 통 관심이 없고 말썽만 부리던 아들은 아버지가 방으로 들어오자 교과서를 거꾸로 들고 “고구려·백제·신라”를 외우는 척한다. 하지만 곧 ‘고구려·백제·신라’는 ‘고구마 백개 심자’가 된다. 아들의 ‘할리우드 액션’을 눈치챈 아버지가 회초리를 들고 불호령을 치자 아들은 우당탕거리며 달아난다.
1970년대 초등학교 시절 읽었던 윤승운(75) 화백이 그린 만화의 한 장면이다. 이 만화가 <요철발명왕>인지 <두심이 표류기>인지는 기억나지 않아도, 야단치는 아버지를 피해 걸음아 나 살려라 도망가던 주인공의 익살스러운 장면에서 낄낄거렸던 것은 또렷이 기억난다. 그 모습은 공부는 죽어라고 하지 않고 골목골목을 망아지처럼 뛰어다니며 남의 집 유리창과 장독대를 곧잘 깨먹던 어릴 때 내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아버지 몰래 만든 요철이의 지하 실험실은 자기들만의 공간인 ‘아지트’를 열망하던 내 또래 아이들의 꿈이기도 했다. 그래서 그의 옛 작품을 보면 잊고 지냈던 어릴 적 친구에게 전화를 받은 것 같은 아련한 느낌이 든다.
그러나 칠순이 훌쩍 넘은 윤 화백은 여전히 현역으로 활동중이다. 1963년 데뷔한 그는 길창덕·박수동·신문수·이정문 화백과 함께 1970~1980년대 우리나라 명랑만화 최고 전성기를 이끌었던 만화계의 원로이지만 1년 전까지 연재만화를 그렸을 정도로 활발한 작품활동을 해왔다. 그가 우리나라 역사를 소재로 그린 <맹꽁이서당>은 1982년부터 무려 25년간 연재됐고 지금도 꾸준히 나가는 스테디셀러다. 지난해 말에는 서울 정도 600년 기념 타임캡슐에도 들어간 <겨레의 인걸 100인>을 손본 <헬로! 만화로 보는 한국사>라는 신간을 내기도 했다. 그의 만화는 기억 저편에 있는 빛바랜 추억이 아니라 지금도 부모와 자녀들이 함께 보고 킥킥거리는 생명력을 가지고 있다.
데뷔 55년차에도 왕성한 활동을 하는 윤승운 만화의 인기 비결은 무엇일까? 22일 새 책을 펴낸 서울 삼성동 도서출판 이락에서 ‘맹꽁이 서당 훈장님’으로 불리는 윤 화백을 만나봤다.
“우당탕탕 요철이는 나의 모습”
-어릴 때 <요철발명왕> <두심이 표류기> 열심히 봤습니다.
“그건 제 모습이었어요. 제가 호기심이 많아서 어릴 때부터 뭘 뚝딱뚝딱 하는 걸 좋아해요. 지금도 기계톱을 종류별로 다 가지고 있죠. <요철발명왕>을 보면 요철이가 용접을 많이 하는데요, 제가 용접을 배우고 싶었는데 못 배웠어요. 지금 배우려니까 눈에 안 좋다고 해요.”
-어릴 때 악동이셨나 봐요?
“공부하기 정말 싫어했어요. 대신 힘껏 놀았죠. 공부는 내 머리랑은 안 맞아요. 특히 수학을 못했는데 방정식, 삼각함수, 그건 지금도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하지만 그림은 좋아했죠. 학교 다닐 때부터 그림을 그리면 선생님이 10개 중에 7개는 뒤에 붙여줬어요. 그런데 이렇게 만화를 그릴 줄은 몰랐죠.”
-선생님 강연에서 아이들 열심히 놀리라고 하신다면서요?
“나는 공부를 하나도 안 했고 영재가 아닌데 요즘 영재교육 강의를 많이 해요.(웃음) 그러면 나는 무조건 아이들을 놀리라고 해요. 놀리면 다 궁리가 생겨요. 말도 안 되는 걸 억지로 공부하라고 하면 부모 자식 간에 감정만 상하죠. 내가 지금 이렇게 만화를 그리는 것도 다 그때 놀아서일지도 몰라요.”
학창 시절 공부는 1도 안 하고 팽팽 놀았던 그는 고등학교 시절부터 만화를 그리고 싶어했다. 그래서 계속해서 신문사와 잡지사에 만화를 투고했지만 번번이 낙방했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투고를 했고 결국 63년 잡지 아리랑 공모전에 입선해 만화를 그리게 됐다. 하지만 그는 만화는 자신이 없고 얼른 시골로 가서 소를 키우고 싶었다.
-낙농업이 꿈이었다고 하던데요?
“25살인가 연세대 농업개발원을 다니면서 낙농을 꿈꿨죠. 소를 키우는 게 꿈이었어요. 제가 아버지가 안 계셔서 큰아버지에게 자랐는데 큰아버지가 원래 농업 쪽이셔서 저도 농사를 지을 생각이었어요. 저보다 한 살 많은 형은 사대를 나와 교사를 했죠.”
-그럼 만화는 접으실 생각이었나요?
“얼마 전 돌아가신 길창덕 선생이 제가 이곳저곳에 열심히 투고하는 걸 보고 한번은 집으로 부르셔서 갔는데 댁에서 신문수·오원석 화백을 만났어요. 길 선생이 명랑만화의 새 길을 뚫었다면 <도깨비 감투>를 그린 신문수는 그 길에서 다시 새로운 길을 냈거든요. 저는 그분들이 뚫어놓은 길을 걸었을 뿐이에요. <따개비>를 그린 오원석 화백도 아이디어가 많았죠. 우리 세 사람이 그 시절 사무실을 얻어서 같이 그렸는데 두 사람이 너무 잘 그리는 거예요. 제가 지금은 이렇게 자신감이 있어 보이지만 그때는 작고 말라서 열등감이 많았어요. ‘아 내 실력으로는 안 된다’고 생각했죠. 그리고 그때 제 머릿속에는 농사밖에 없었어요.”
63년 데뷔 55년차 윤승운 화백
70년대 명랑만화 전성기 주역
80년부터 역사만화 장르 개척해
최근에도 신간 내며 왕성한 활동
역사책 3천권 읽고 한학 배워
전국 답사…간첩으로 몰리기도
“중·일 앞다퉈 역사왜곡 하는데
우리는 우리끼리 싸우고 있어 답답”
젊을 때 열등감으로 만화 접을 생각도
-그런데 낙농을 포기하고 만화로 돌아선 계기가 있습니까?
“71년 제가 결혼하고 단칸방에서 신혼살림을 시작했는데 곧 아이가 생겼고 원고청탁이 들어와서 만화로 그럭저럭 먹고살 수 있었어요. 그런데 농업개발원 동기가 남양주에서 낙농을 시작해서 저도 1981년 그 옆에 땅을 샀어요. 집사람도 4살 어리지만 농업개발원 동기거든요. 함께 낙농을 하고 싶어 했어요. 그런데 큰아버지가 부르시더니 막연한 낙농보다 20년 그린 만화를 하는 게 더 낫다고 설득하셨어요. 그런데 그때 제가 역사만화를 막 시작할 때였어요. 그래서 그 말을 듣고 아차 싶었어요. 낙농보다는 만화를 계속 그려야겠구나 생각했죠. 결국 낙농은 접었죠.”
-아내분은 어떻게 만나셨나요?
“농업개발원 정원이 30명인데 여자 동기가 7명이었어요. 내가 여자에게 별 인기가 없었는데 아내를 사귀게 됐죠. 나중에 사귄 뒤 아내에게 물어보니 동기끼리 짜장면을 먹었는데 나만 얼굴에 다 묻혀가면서 먹었대요.(웃음)”
1981년 다시 만화를 그려야겠다고 생각을 고쳐먹은 그에게 기회가 왔다. 1982년 나온 만화잡지 <보물섬>이었다. 당시 <보물섬>은 파격 그 자체였다. 만화만 있는 첫 잡지인데다 그것도 전화번호부만큼 두꺼웠다. 닭튀김 한쪽쯤에 익숙한 아이들에게 양념 반 프라이드 반인 치킨 한 상자를 받는 충격과 희열을 줬던 책이다.(내 경험이다.) 윤 화백은 <보물섬>에 역사만화인 <맹꽁이 서당> 연재를 시작했다. 그의 스승인 길창덕 화백이 명랑만화의 새 길을 열었듯이 그는 역사만화라는 새 길을 개척한 것이다.
-역사만화를 그린 계기가 있나요?
“명랑만화를 지망하던 올챙이 시절에 할아버지 댁에 갔더니 역사책이 두꺼운 게 하나 있는데 그걸 읽어보는데 내용이 너무 좋은 거예요. 아 만화가가 되면 이걸 그려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는데 20년 지나니까 그런 그림을 그릴 기회가 오더라고요.”
-<맹꽁이 서당>이 처음이었나요?
“<가톨릭소년>이라는 잡지 편집장이 하루는 ‘역사물을 그리면 어떻겠냐’고 제안해서 그렸어요. 세종대왕·이순신 뭐 이렇게 두서없이 그렸는데 반응이 좋아서 1~2년 사이에 비슷한 청탁이 확 늘었어요. <맹꽁이 서당>보다 이 책이 먼저였죠. 위인 만화를 모아놓은 책이 <겨레 인걸 100인>이에요.”
-명랑만화보다 역사만화가 어렵지 않으셨나요?
“맨 처음 역사만화를 그릴 때 집에 역사책이 50권밖에 없었어요. 역사를 잘 모르니까 청계천을 다니면서 책을 사서 읽었죠. 그리고 우리나라 역사가 한문으로 기록돼 있으니까 한학 공부도 시작했죠. 성균관 한림원을 7년 다녔죠.”
윤 화백이 그렇게 사들인 역사책이 3000권이 넘는다고 한다. 작고한 소설가 최인호 선생이 그가 그린 역사만화에 나오는 조선의 거상 임상옥 일화를 보고 소설 <상도>를 쓸 자료를 얻으러 왔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다. 그렇게 노력해서 그린 만화가 알고 지내던 기자의 권유로 <겨레의 인걸 100인>이라는 책으로 묶여 나왔다. 그 책은 40만권이 팔리는 베스트셀러가 됐고 1991년 제1회 한국만화문화상을 받았다. 그 이후에 역사만화가로 그의 입지는 더욱 탄탄해졌다.
-선생님이 보신 3000권의 책 가운데 어떤 자료가 기억에 나시나요?
“정조 때 나온 <조선인물고>란 책이 있어요. 맨 처음에는 자전을 놓고 찾다가 한학을 배운 뒤에 자전 없이 그 책을 읽게 됐지. 그게 도움이 많이 됐어요. 이긍익의 <연려실기술>도 왕족과 반가의 집 평수 같은 조선의 풍습을 자세히 적어놓았는데 그것도 참고가 됐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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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승운 화백이 그린 백범 김구. 유년시절 효창공원 주변에 살던 윤 화백은 백범 김구의 사회장을 6살 때 목격했다고 한다. 도서출판 이락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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팩트는 팩트대로, 웃음은 웃음대로
-열심히 취재도 다니셨다고 하던데요?
“김삿갓 묘지가 잘 알려지지 않았을 때 강원도 영월을 다섯번 찾아갔죠. 안중근 의사를 하얼빈 역에서 안내했던 조카의 후손을 만나서 거사 당시 상황을 취재하기도 했죠. 어떻게든 많이 듣고 눈으로 직접 보려고 했어요. 내가 어릴 때부터 돌아다니는 걸 좋아했던 게 도움이 됐지. 1985년인가 충북 단양에서는 간첩으로 신고돼 경찰에서 조사를 받기도 했어요.”
-새로 펴낸 <헬로! 만화로 보는 한국사>에 나오는 인물 가운데 누구에게 제일 마음이 가세요?
“선조 때 역모로 죽은 정여립. 풍운아였거든요. 기축옥사 뒤 동인이 죽음을 당한 뒤 300년간 당파싸움이 이어졌죠. 또 영조 때 전남 장흥의 실학자 위백규는 실학자로 학문이 높았지만 촌놈이라고 한양 유생들이 반대해서 한미한 벼슬자리에만 있었죠. 그는 모든 백성들이 배워야 한다는 실용주의적 주장을 했던 양반이거든요. 또 노비였다가 신분을 속이고 과거에 급제해 현감이 됐다 발각된 이만강은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역사만화는 명랑만화와 달리 부담이 가지 않나요?
“저는 팩트는 팩트대로 충실히 그렸고 맹꽁이 서당 악동들이 훈장 말 안 듣고 까불고 장난치는 컷으로 웃음을 유도하는 방향이어서 부담감은 없었어요. 심혈을 기울여서 자료를 모으고 그걸 토대로 만화를 그렸던 덕에 지금까지도 큰 문제는 없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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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출판 이락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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팩트는 팩트대로 웃음은 웃음대로 그렸던 그의 만화 철학이 30년 넘게 그의 역사만화가 한결같은 인기를 끌고 있는 비결일지도 모른다. 북한에나 있는 국정 역사교과서를 만들려는 어수선한 현시점에서 그에게 역사에 대해 좀더 묻고 싶었다.
-국정교과서를 비롯해 역사 관련 논쟁이 불거지고 있잖아요.
“내가 거기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어요. 다만 우리나라 상고사를 쓴 <환단고기>를 놓고 강단사학에서는 ‘이 책은 가짜다 사기다’라고 이야기하는데 아쉬움이 있죠. 물론 (이 책에서 서술한) 역사가 국수주의로 흐를 수 있어요.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그래도 된다고 생각해요. 외세의 잦은 침입으로 역사책이 타고 없어진데다 우리가 고대사라고 인정하는 한서·당서도 전부 중국 책이잖아요. 중국은 정부가 나서서 동북공정을 하고 있는데 우리는 지금 우리끼리 긁어대고 있어요. 속이 터지죠. 여기에 일본 아베 정부가 계속 교과서로 독도 도발을 하고 있잖아요. 우리나라 실질적인 영토인데 거머리처럼 달라붙고 있어요. 이런 거 보면 아찔하죠.”
-읽으신 책 3000권 가운데 청년들이 꼭 읽었으면 하는 역사책은 뭔가요?
“<백범일지>죠. 이런 책은 교과서로 만들어서 어린이들에게 반드시 읽혀야 해요.”
-왜 백범일지죠?
“백범일지는 올곧은 우리 민족 정서를 그대로 담고 있어요. 그리고 백범 선생뿐 아니라 어머니와 가족들의 기개있는 삶이 잘 그려져 있어요. 어머니인 곽낙원 여사가 16살 때 백범을 낳고 투옥에 망명생활 같은 독립운동 하는 과정에서 한결같이 아들을 격려했잖아요. 백범이나 그 어머니 모두 대단하신 분이에요. 저도 이런 책을 마흔이 돼서 읽었다는 게 부끄러웠어요.”
<맹꽁이 서당>을 보면 논어·맹자 같은 사서삼경을 가르치면 딴전을 피우다가도 역사 이야기를 하면 눈을 또랑또랑하게 뜨는 악동들이 등장한다. 역사를 뜻하는 그리스어 ‘히스토리아’(historia)는 ‘진실을 찾는 일’이란 뜻이다. 우리처럼 시련이 많은 나라에서 역사는 정신의 뿌리일지 모른다. 그러나 맹꽁이 서당의 악동조차 훈장님의 회초리 없이도 역사에 몰두하는데 역사관조차 제대로 세우지 못하는 어른들이 못나 보였다. 악동들에게 맹꽁이 서당 훈장님이 있듯이 우리 어른들에게 매운 회초리를 들어줄 사람은 누구일까.
권은중 기자 detail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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