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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6.09.28 05:01 수정 : 2017.01.23 16:08

정치BAR_‘반기문 테마주’ 추적기

추석·설 같은 명절 밥상엔 ‘정치’가 빠지지 않는 반찬으로 오른다. 대선을 1여년 앞둔 올 추석엔 ‘다음 대통령이 누구냐’를 놓고 갑론을박을 벌인 사람들, 많을 거다. 특히 이번엔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이 흥행에 성공했다. 반 총장에 관한 뉴스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반 총장은 추석 연휴였던 지난 16일(현지시각 15일) 미국 뉴욕 유엔 본부에서 정세균 국회의장과 여야 3당 원내대표를 만나 유엔 사무총장직을 마친 뒤 “내년 1월 중순 이전에 귀국해 대통령과 국회의장에게 보고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정진석 새누리당 원내대표가 “국민들께 귀국 보고를 하는 것이 어떠냐”고 거들자, 반 총장은 “그런 기회가 있으면 영광”이라고 화답했다. 반 총장은 대권의 ‘대’자도 꺼내지 않았다고 하지만, 반 총장을 만나고 온 사람들은 ‘이심전심’ 반 총장이 대권 의지를 나타낸 것이라고 풀이했다.

대학생 때부터 시작해 10년간 주식투자를 해온 나는 반 총장의 언행이 주식시장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궁금해졌다. 하루 평균 7조~8조원가량이 거래되는 이 거대한 시장에 “1월 중순 귀국해 국민들께 보고하겠다”는 반 총장의 말 한마디가 어떤 파장을 낳았을까?

반 총장 귀국설에 22개 주가 고공행진

한국거래소에 의뢰해 9월1일부터 26일까지 1일 가격제한폭(30%)까지 주가가 오르거나 내린 기업 56곳을 추렸다. 종목을 자세히 살폈더니, 언론에서 정치인 테마주로 분류한 기업이 총 23곳이나 됐다. 이중 반 총장과 관련된 기업이 22곳, 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와 엮인 기업이 1곳이었다. 물론, 주식시장엔 문 전 대표, 안철수 전 국민의당 대표와 연관이 있다고 소문이 나도는 테마주도 이미 수십개에 이른다. 9월 한달 동안 ‘반기문 테마주’의 주가 변동이 도드라진 이유는, 대선 후보 중 지지율 1위의 반 총장이 내년 1월 돌아온다는 새 소식이 더해졌기 때문이다.

추석 연휴가 지나고 주식시장이 다시 열린 9월19일부터 이른바 반기문 테마주들은 일제히 주가가 오르기 시작했다. 증권업계에서 반기문 테마주로 분류되는 주식들은 해당 기업의 임원 중 누군가가 반 총장과 개인적 인연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서다. 경영진 또는 사외이사, 감사 등이 반 총장과 친인척 관계라거나 동향·동문이라는 것이다.

반기문 테마주 중 유독 관심을 끈 것은 반 총장의 친인척이라는 인사가 대표로 있는 자산운용사가 사모펀드를 통해 투자한 회사들이었다. 반 총장의 친인척으로 알려진 반기로씨가 대표로 있는 파인아시아자산운용은 지난해 12월~올 7월 사이 파인디앤씨, 부산주공, SC엔지니어링, 이큐스앤자루에 각각 39억원, 27억원, 28억원, 78억원을 투자했다. 이 회사들의 자산에 견줘보면 투자액이 큰 비중을 차지하지는 않았지만, 파인아시아자산운용이 투자했다는 사실에 반 총장의 귀국설이 합쳐지면서 폭발력이 생겼다. 이 회사들은 불과 1~2주 만에 주가가 2~5배 뛰었다. 하지만 정작 파인아시아자산운용의 반기로 대표가 반 총장과 어떤 관계인지는 불명확했다. 어떤 언론에선 반 총장의 ‘동생’이라고 보도했고, 다른 언론은 “사촌동생으로 알려진”이라고 보도했다. 또 다른 언론에서는 “반 총장의 외조카”라고도 했다. 반 총장의 외조카라면 ‘반씨’일 가능성이 적을 텐데도 이렇다 할 설명이 없었다. 어떻게 보도가 이리 제각각일까? 도대체 반기로 대표는 반기문 총장과 무슨 관계일까?

급등한 ‘반기○ 대표’ 관련 주식…“친척 아니야” 밝힌 순간 주가 반토막

파인아시아자산운용이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사이트에 올린 감사보고서를 통해 회사의 연락처를 찾아, 반기로 대표가 반 총장과 어떤 관계인지 문의했다. 그러나 회사 관계자는 “많은 기자들이 연락을 해왔지만, 어떤 입장도 밝힐 수 없다는 것이 우리 회사의 입장”이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이 관계자는 다만, “반 총장과의 관계를 묻는 기자의 전화가 왔었다는 것은 대표에게 전달하겠다”고 덧붙였다.

반기로 대표가 기자에게 보내온 문자 메시지.
반기로 대표에게 직접 연락해보기로 했다. 지난해 한국금융연수원에서 펴낸 <프로젝트 파이낸스>의 지은이인 반 대표는 최근 제주도의 한 대학교 석좌교수로 부임했다. 그의 지인을 통해 연락처를 찾아 문자를 보내놨다.

반기로 대표의 연락처를 수소문하는 와중에도 파인아시아자산운용이 투자한 회사들의 주가는 계속 비정상적인 흐름을 보였다.

반 대표와 통화가 되길 애타게 고대하던 26일 밤, 그가 휴대전화로 문자를 보내왔다. “죄송합니다만 제가 반가(家)라서 그런 오해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저는 반 총장의 사촌동생이나 외조카가 아닙니다. 그냥 같은 성씨일 뿐입니다. 답변이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반기로 배상.”

이튿날인 27일 아침에도 파인아시아자산운용이 투자한 기업들은 여전히 상승세였다. 가령 이날 오전 9시29분 SC엔지니어링은 전날보다 29.87% 오른 9260원에 거래되고 있었다. 오전 9시57분, 반기로 대표로부터 받은 문자를 근거로 반 대표가 반 총장의 친척이 아니라는 사실을 온라인 뉴스로 내보냈다. 보도가 되자마자 네이버 종목토론방에는 <한겨레>의 “반기로 대표, 반기문 총장과 친척 아니다”라는 보도가 큰 논란을 일으켰다. 이후 이 기업들의 주가는 줄줄이 주저앉았다. 부산주공과 파인디앤씨, SC엔지니어링은 오후 내내 가격제한폭(30%) 가까이 내렸다. 특히 SC엔지니어링은 오전에 상한가로 오르다가 오후에 하한가로 치달았으니, 불과 몇 시간 사이에 기업가치가 50% 넘게 바뀐 셈이다.

반 총장 친동생, 부회장 사임한 뒤 주가 급락

반기문 테마주 중 극적인 장면은 보성파워텍에서도 나타났다. 보성파워텍은 반 총장의 친동생 반기호씨가 부회장이었다. 전력장비 회사인 보성파워텍은 9월8일과 9일 이틀 연속으로 하한가(30%) 가까이 주가가 하락했다. 불과 이틀 만에 기업가치가 반토막이 났고, 시가총액이 3000억원 이상 감소했다. 이렇게 주가가 떨어진 직접적인 이유는 8일 오전부터 반기호 부회장이 사임했다는 소식이 퍼져서다. 주식 관련 카페와 네이버 종목토론방에서는 이날 오전부터 반 부회장의 사임 소문이 퍼졌고, 뒤따라 여러 매체에서도 이 소식을 알렸다. 보성파워텍은 9일 공식적으로 “2013년 11월15일부터 재직 중이던 반기호 부회장은 2016년 9월7일 일신상의 사유로 사직서를 제출하였음”이라고 공시했다. 보성파워텍의 공시담당 관계자는 <한겨레>와의 통화에서 “대표이사가 아닌 임원의 인사는 공시사항이 아니지만, 소문이 퍼지고 있어 공시했다”며 “부회장님이 사직서를 제출한 이후 연락두절인 데다 회장님의 전화도 받지 않고 있어 사임 사유를 확인하지 못했다”고 밝혔다. 반기호씨는 보성파워텍의 부회장이자 중장비 업체인 광림의 사외이사다. 이날 주식시장에서는 반기호씨가 사외이사직도 내려놓았는지가 논란이었으나, 광림 쪽이 “사외이사직을 유지하고 있다”고 밝히면서 논란이 일단락됐다. 하지만 광림에서도 언제든 보성파워텍과 같이 일부 투자자들만이 알고 있는 미공개정보(반기호의 사임)로 주가가 급락할 수 있는 가능성이 남아 있다.

반기로 대표와 반기호 전 부회장과 관련된 기업들은 ‘반기문주'의 일부일 뿐이다. 반기로 대표가 반 총장과 무관한 인물임이 밝혀지자, 증권 관련 카페에선 “이제는 ○○기업이 반기문 대장주다”, “○○기업의 ○○○ 대표가 반 총장의 진짜 조카다” 등등의 글들이 다수 올라왔다. 이들 기업들 중 상당수는 반 총장과의 개인적 관계가 확인되지 않았다.

‘경제정의’ 강조하며 테마주 보고만 있을 텐가

유력 대선 주자들은 누구나 테마주와 엮인다. ‘안철수 테마주’로 분류된 써니전자, 다믈멀티미디어 등은 4·13 총선 직후에 급등세를 보였다. 국민의당이 예상 외로 선전해 안 전 대표의 대권가도에 파란불이 켜졌기 때문이었다. 써니전자는 안랩 출신인 송아무개씨가 대표로 있었던 회사이고, 다믈멀티미디어의 정아무개 대표는 안 전 대표가 서울대 교수이던 시절 동료로 함께 일했다. 안철수·문재인 전 대표 등과 관련된 테마주들도 주로 후보와 개인적 인연이 있다고 알려진 기업들이지만, 일부는 여전히 확인되지 않았다.

어떤 사람들은 정치를 게임이라며 폄하하기도 하지만, 불확실한 정보로 시장을 교란시키는 ‘동여의도’의 가벼움에 비하면 ‘서여의도’의 정치는 오히려 진지하다. 주식시장을 관리·감독하는 한국거래소는 올해 8월 보도자료를 내어 정치테마주 주의보를 내렸다. 김진 한국거래소 시장감시부 팀장은 “회사의 본질적인 가치와 관련없이 대선주자와 관련돼 있단 이유로 급등락하는 모습은 분명 문제가 있다. 게다가 대선주자와 별 관계가 없는 경우가 많고, 관계가 있다고 해도 개인적 인연 때문에 그 기업이 수혜를 입을 거란 기대도 비이성적이다”라고 밝혔다. 김 팀장은 “핵심 테마주들을 면밀하게 모니터링하고 있고, 시세조작 등 불공정거래 혐의가 포착되면 금감원·검찰과 공조해 신속하게 조치를 취할 것”이라고 말했다.

대선주자들은 누구나 ‘공정한 시장경제’를 강조한다. 테마주에 대한 기대와는 달리, 권력자와의 친소관계에 따라 기업이 혜택이나 불이익을 받지 않는 것이 공정한 시장경제의 기본이다. 물론 테마주는 대선주자와 직접적 관련없는 주식시장의 비이성적인 움직임이라고 치부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시장의 불확실성을 없애는 최고의 방법은 명확한 메시지다. 대선주자들이 테마주에 대해 뚜렷한 입장을 내놓을 순 없을까.

윤형중 기자 hjyo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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