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천신문> 제작국장 대통령을 욕한다 해서 ‘좌파’나 ‘진보’의 수사를 얻는다면 너무 쉽다. 삶에 대한 성찰이 더 나아가지 못하고 거기서 마무리된다면 슬픈 일이다. 모든 것이 ‘대통령 탓’으로 귀결되는 것도 비정상이지만, 그런 권력구조를 가진 나라도 서글프다. 최상위 권력 교체로 모든 것이 바뀔 수 있을 거라는 ‘환상’은 초인을 기다리게 하고 엉터리 대의민주주의를 공고히 한다. 그렇게 우리는 낙수를 기다렸다. ‘스타’와 ‘인물’에 열광해온 문제는 기실 국가가 끊임없이 조장한 것이다. 올림픽 금메달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못난 대통령 때문에 더 부각된 호세 무히카 우루과이 대통령이 소비되는 방식도 마찬가지다. 하승수 녹색당 공동운영위원장이 쓴 <삶을 위한 정치혁명>을 보면, 민이 끊임없이 요구해 만든 ‘연동형 비례대표제, 대통령 결선투표, 선거연합’의 정치시스템이 무히카가 나온 정치 토양이다. 미디어는 이를 정확히 보여주지 않고 우리는 제대로 알려 하지 않는다. 마치 그가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처럼 왜 우린 그런 대통령이 없는가 한탄하게 만든다. 끊임없이 초인을 기다리는 것, 그것만큼 수동적 자세를 고착화하고 패배의식을 가중시키는 건 없다. 역대 정부가 했던 ‘재벌기업을 잘 살려야 중소기업과 주민도 잘살 수 있다’는 그 저주스런 ‘낙수이론’에 근거한 정책들은 괴물을 키워왔다. 이는 가부장제와 맞물려 장남 하나만 밀어주고 나머지를 희생시키는 잔혹사를 만들어왔다. 부와 권력을 동시에 거머쥔 초엘리트를 키워서 그에 의존하는 방식은 ‘엘리트 전체주의’다. 그것은 우리의 주인 됨을 망각시키고 운동의 방향을 탈각시킨다. 잘 키운 국가대표의 금메달로 우리 삶이 금메달인 것마냥 환희에 부르르 떠는 것은 사실 ‘아편’이다. 다시 지역을 이야기한다. 그런 낙수이론은 사실 일상적으로 마주친다. 효율과 속도를 말하면서 서울을 더 키우자는, 충북 청주를 더 큰 도시로 만들어야 한다는 우리 안의 속물적 욕망은 곳곳에서 출몰한다. 옥천을 읍과 인접 면을 묶어 시로 만들자는 말도, 더 큰 대전에 편입하자는 말도 선거 때마다 꾼들의 단골 구호로 등장했다. 참 자존심 상하는 말들이다. 하지만 문제는 이런 구호가 먹힌다는 데 있다. 잘되는 것에 편승하고 꾀를 부려 무임승차하는 것을 두고 ‘세상은 저렇게 사는 것’이라는 자조가 어느새 상식이 되어버렸듯 삶은 점점 무력화되고 있다. 그러나 삶은 훨씬 복잡하고 다층적이어서 대통령이 바뀐다 해서 모든 것이 바뀌지는 않는다. 외려 대통령 때문에 어찌할 수 없는 우리 삶에 대해 근본적인 성찰이 필요하다. 서울시의 청년수당에, 성남시의 공공산후조리원 등에 대해 정부가 무작정 딴지 거는 것을 목도하지 않았는가? 그것이 정치명망가들의 힘겨루기가 아니라 ‘자치의 심각한 퇴보’라는 것을 인지해야 한다. 시스템이 근본적으로 바뀌어야 한다. 모든 삶의 정치가 ‘직업 정치인’으로 빨려드는 것을 경계한다. 더 많은 분권과 자치가 이뤄져야 한다. 삼한시대가 삼국시대로, 다시 통일신라, 고려, 조선으로 된 것을 역사의 진화라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은 다양성을 획일화로 만들었으며 주민들 스스로의 삶의 권리를 앗아간 폭력적인 국가 구조를 만들었다. 2천년 전 금강 언저리에 위치한 마한의 연맹으로 하나의 읍락국가였던 옥천을 꿈꾼다. 더 이상 낙수가 아닌, 유구히 흐르는 금강의 세례를 받거나 꿈틀거리는 지하수의 용틀임으로 모두의 목을 축였던 그런 세상을 꿈꾼다. 30년 동안 옥천의 지역 운동사가 그리했던 것처럼 “그들은 4년, 5년마다 바뀌지만 우리는 뼈를 묻고 살 사람들이다. 우리가 주인이다. 그들은 돈도 힘도 여전히 많아 웬만해선 망하지 않지만, 우리는 대밭의 대나무처럼 뿌리째 엉켜 웬만한 바람에도 쓰러지지 않는다”는 정신으로 살았으면 좋겠다. 위에서 떨어지는 낙수가 아닌 땅에서 솟구치는 지하수. 우리가 바로 주인이다.
칼럼 |
[지역이 중앙에게] ‘낙수’가 아닌 솟구치는 ‘지하수’로 / 황민호 |
<옥천신문> 제작국장 대통령을 욕한다 해서 ‘좌파’나 ‘진보’의 수사를 얻는다면 너무 쉽다. 삶에 대한 성찰이 더 나아가지 못하고 거기서 마무리된다면 슬픈 일이다. 모든 것이 ‘대통령 탓’으로 귀결되는 것도 비정상이지만, 그런 권력구조를 가진 나라도 서글프다. 최상위 권력 교체로 모든 것이 바뀔 수 있을 거라는 ‘환상’은 초인을 기다리게 하고 엉터리 대의민주주의를 공고히 한다. 그렇게 우리는 낙수를 기다렸다. ‘스타’와 ‘인물’에 열광해온 문제는 기실 국가가 끊임없이 조장한 것이다. 올림픽 금메달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못난 대통령 때문에 더 부각된 호세 무히카 우루과이 대통령이 소비되는 방식도 마찬가지다. 하승수 녹색당 공동운영위원장이 쓴 <삶을 위한 정치혁명>을 보면, 민이 끊임없이 요구해 만든 ‘연동형 비례대표제, 대통령 결선투표, 선거연합’의 정치시스템이 무히카가 나온 정치 토양이다. 미디어는 이를 정확히 보여주지 않고 우리는 제대로 알려 하지 않는다. 마치 그가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처럼 왜 우린 그런 대통령이 없는가 한탄하게 만든다. 끊임없이 초인을 기다리는 것, 그것만큼 수동적 자세를 고착화하고 패배의식을 가중시키는 건 없다. 역대 정부가 했던 ‘재벌기업을 잘 살려야 중소기업과 주민도 잘살 수 있다’는 그 저주스런 ‘낙수이론’에 근거한 정책들은 괴물을 키워왔다. 이는 가부장제와 맞물려 장남 하나만 밀어주고 나머지를 희생시키는 잔혹사를 만들어왔다. 부와 권력을 동시에 거머쥔 초엘리트를 키워서 그에 의존하는 방식은 ‘엘리트 전체주의’다. 그것은 우리의 주인 됨을 망각시키고 운동의 방향을 탈각시킨다. 잘 키운 국가대표의 금메달로 우리 삶이 금메달인 것마냥 환희에 부르르 떠는 것은 사실 ‘아편’이다. 다시 지역을 이야기한다. 그런 낙수이론은 사실 일상적으로 마주친다. 효율과 속도를 말하면서 서울을 더 키우자는, 충북 청주를 더 큰 도시로 만들어야 한다는 우리 안의 속물적 욕망은 곳곳에서 출몰한다. 옥천을 읍과 인접 면을 묶어 시로 만들자는 말도, 더 큰 대전에 편입하자는 말도 선거 때마다 꾼들의 단골 구호로 등장했다. 참 자존심 상하는 말들이다. 하지만 문제는 이런 구호가 먹힌다는 데 있다. 잘되는 것에 편승하고 꾀를 부려 무임승차하는 것을 두고 ‘세상은 저렇게 사는 것’이라는 자조가 어느새 상식이 되어버렸듯 삶은 점점 무력화되고 있다. 그러나 삶은 훨씬 복잡하고 다층적이어서 대통령이 바뀐다 해서 모든 것이 바뀌지는 않는다. 외려 대통령 때문에 어찌할 수 없는 우리 삶에 대해 근본적인 성찰이 필요하다. 서울시의 청년수당에, 성남시의 공공산후조리원 등에 대해 정부가 무작정 딴지 거는 것을 목도하지 않았는가? 그것이 정치명망가들의 힘겨루기가 아니라 ‘자치의 심각한 퇴보’라는 것을 인지해야 한다. 시스템이 근본적으로 바뀌어야 한다. 모든 삶의 정치가 ‘직업 정치인’으로 빨려드는 것을 경계한다. 더 많은 분권과 자치가 이뤄져야 한다. 삼한시대가 삼국시대로, 다시 통일신라, 고려, 조선으로 된 것을 역사의 진화라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은 다양성을 획일화로 만들었으며 주민들 스스로의 삶의 권리를 앗아간 폭력적인 국가 구조를 만들었다. 2천년 전 금강 언저리에 위치한 마한의 연맹으로 하나의 읍락국가였던 옥천을 꿈꾼다. 더 이상 낙수가 아닌, 유구히 흐르는 금강의 세례를 받거나 꿈틀거리는 지하수의 용틀임으로 모두의 목을 축였던 그런 세상을 꿈꾼다. 30년 동안 옥천의 지역 운동사가 그리했던 것처럼 “그들은 4년, 5년마다 바뀌지만 우리는 뼈를 묻고 살 사람들이다. 우리가 주인이다. 그들은 돈도 힘도 여전히 많아 웬만해선 망하지 않지만, 우리는 대밭의 대나무처럼 뿌리째 엉켜 웬만한 바람에도 쓰러지지 않는다”는 정신으로 살았으면 좋겠다. 위에서 떨어지는 낙수가 아닌 땅에서 솟구치는 지하수. 우리가 바로 주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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