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6.09.25 20:03
수정 : 2006.09.29 1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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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시닝에서 달리던 칭짱철도 열차가 티베트 고원지역으로 들어서자 9월인데도 차창 밖엔 눈발이 쏟아졌다. 눈발 속에서 양떼들이 풀을 찾아 이동하고 있다. 라싸/김종수 기자 jongso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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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 수준 자치 요구에 중국 “수용 불가”
달라이라마 영향력 커 비폭력 노선 견지
[칭짱철도타고 티베트를 가다]④ 독립인가 동화인가
티베트 달력으로 새해 첫날은 지난 2월28일이었다. 올해의 경우 중국 설(1월29일)과 한달 정도 차이가 났다. 새해 첫 명절인 ‘전소법회’ 때 티베트인들은 가장 좋은 옷으로 차려입고 티베트 불교사원을 찾는다. 티베트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치장은 소매와 발목에 수달피를 대고 어깨에서 허리까지는 타잔처럼 표범 가죽을 맞모금으로 걸치는 차림이다. 그러나 올해 전소법회 때는 이렇게 동물 가죽으로 치장한 이들이 현저하게 줄었다. 티베트자치구 인민정부의 관계자도 16일 “올해는 동물 가죽 치장이 거의 눈에 띄지 않았다”고 인정할 정도였다. 왜 이런 갑작스런 변화가 생겼을까?
달라이라마를 위해 밥을 짓더라도=16일 라싸의 고찰 조캉사원(다자오쓰) 앞에서 만난 한 티베트인은 이런 변화가 “달라이라마의 호소”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1959년 이후 인도에 망명중인 달라이라마는 새해를 앞두고 연 집회에서 동물 가죽 옷을 입지 말라고 동포들에게 호소한 바 있다. 달라이라마는 “당신이 가죽옷을 한 벌 입으면 누군가는 동물 한 마리를 죽인다”고 말했다.
의문은 또 생긴다. 언론 통제가 삼엄한 중국 내 티베트인들이 달라이라마의 호소를 어떻게 알았을까? 이 티베트인은 지난해 말 중국 정부로부터 정식 비자를 받고 인도를 방문한 이들 가운데 4000여명이 달라이라마의 집회에 참석했으며, 몰래 국경을 넘은 이들도 4000여명에 이른다고 귀띔했다. 이들이 돌아온 뒤 달라이라마의 메시지를 친지들에게 전했다는 것이다. 망명지의 달라이라마는 여전히 티베트인들에게 정신적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셈이다. 그 영향력은 어느 정도나 될까?
16일 라무체사원 앞에서 만난 또 다른 티베트 청년은 12월에 인도 다람살라로 갈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어머니는 살아생전 달라이라마를 직접 한번 보는 게 소원이다. 그러나 너무 늙고 건강도 좋지 않아 인도에 직접 갈 형편이 못 된다. 그래서 내가 갈 생각이다.” 그럴 경우 그는 중국 땅을 다시 밟을 수 없게 될 수도 있다. 그럼에도 청년의 어머니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네가 달라이라마를 만난다면 다시는 나를 보러 오지 않아도 좋다. 그를 위해 밥을 짓거나 빨래를 하거나 청소를 한다면, 너는 세상에서 가장 좋은 일거리를 찾은 것이다. 그게 나를 보러 오는 것보다 더 소중하며, 박사 학위를 따는 것보다 더 소중하다.” 이 청년은 어머니의 말이 “티베트인의 일반적 관점”이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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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녁에서 걸어온 한 남매가 곧게 뻗은 도로가에서 낯선 이방인들을 만나자 걸음을 멈췄다. 남매는 부끄러운 듯 시선을 먼곳으로 돌렸으나, 엷은 미소를 지으면서 오랫동안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라싸/김종수 기자jongso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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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베트 미래의 전환점=1959년 이후 망명정부를 이끌어온 달라이라마는 중국과 엄청난 유혈투쟁을 대가로 치러야 할 ‘티베트 독립’보다는 ‘고도의 티베트 자치’를 요구하는 중도노선을 걸어왔다. ‘고도의 자치’란 ‘홍콩 수준의 자치’를 뜻하는 것으로 풀이된다. 그는 지난 2001년엔 망명 티베트인의 직접선거를 통해 삼동 린포체를 ‘정부 수석부장’(행정부 최고 수장)으로 선출함으로써 정치와 종교를 분리시키는 개혁을 완수했다. 그는 또 어린이들 가운데 ‘환생’을 찾아내는 전통 달라이라마 계승 방식 대신 가톨릭의 교황처럼 선출방식을 도입하는 종교개혁도 추진하고 있다.
그러나 티베트 망명정부와 중국 당국은 ‘티베트 문제’에 관해 줄곧 평행선을 그어왔다. 16일 라싸에서 만난 쑹빙린 티베트자치구 외사판공실 부주임은 “티베트는 이미 자치를 실시하고 있다”며 “달라이라마의 개인 자격 방중은 환영하지만 망명정부의 수반 자격으론 안 된다”고 못박았다.
1989년 라싸 소요사태 이후 티베트는 ‘안정’을 유지하고 있다. 티베트의 안정에는 중국 정부의 막대한 지원과 더불어 달라이라마의 비폭력·평화 노선도 적지 않은 기여를 했다. <아주주간> 최근호는 71살 고령의 달라이라마 이후엔 티베트 망명정부가 비폭력·평화 노선 대신 무장투쟁을 포함한 더욱 급진적인 수단을 채택할 가능성이 높다고 분석한다. 지금은 달라이라마의 권위에 가려 있지만, 젊은 망명 승려들이나 티베트청년회 등 급진 단체들은 기회 있을 때마다 “티베트 독립을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할 것”이라고 주장해 왔기 때문이다. 티베트청년회를 4년간 이끌어온 푼촉 청년회장은 달라이라마의 비폭력 노선에 이견을 숨기지 않으며, “청년회는 티베트를 위해서라면 어떤 수단도 동원할 것이며, 무장투쟁이 독립을 가져온다면 전면 지지할 것”이라고 말해 왔다. 이 때문에 티베트의 미래는 앞으로 몇 해가 전환점이 될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하다. <끝>
라싸/이상수 특파원
lees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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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8년, 1903년 영국 두 차례에 걸쳐 티베트 침략. 1903년 라싸 점령 뒤 13세 달라이라마 추방하고 <라싸 조약> 맺음.
△1907년 8월31일 영국·러시아 <영·러 동맹조약> 체결. 중국의 티베트에 대한 ‘영토 주권’을 부인하고 ‘종주권’을 가지고 있다고 기록.
△1942년 티베트 정부 ‘외교국’ 만들고 외무대신 임명.
△1947년 3월 인도 뉴델리에서 열린 ‘범아시아회의’에 티베트 대표 참가. 회의장의 아시아 지도에 티베트가 독립 국가로 표시되고 만국 국기에 티베트기가 걸림. 중국 대표단 항의로 수정.
△1949년 중국 인민해방군 티베트 침투 작전 개시. 마오쩌둥 주석 “티베트 자치” 약속. 미국 언론 “미국은 이미 티베트를 독립 자유 국가로 승인할 준비가 돼 있다”고 보도.
△1950년 10월7일 중국 인민해방군 티베트 진주. 티베트의 무장 저항 시작.
△1950년 11월 14대 달라이라마 텐진갸초, 티베트의 정치·종교 업무 정식 관장.
△1950년 11월1일 애치슨 미 국무장관, 공개적으로 “중국의 티베트 ‘해방’은 ‘침략’”이라고 공개 비난. 같은 달 미국, 유엔에 티베트 결의안 제출, 중국 반대로 통과 안 됨.
△1951년 5월23일 티베트를 중국에 병합하기 위한 ‘티베트 평화 해방 방법에 관한 중앙인민정부와 티베트지방정부의 협의’(17조 협의) 서명.
△1951년 10월26일 중국 인민해방군 라싸 입성.
△1952년 3~4월 티베트인 루캉와와 롭쌍타시가 이끄는 지하조직 ‘티베트 인민회의’ 라싸에서 봉기, ‘17조 협의’에 반대하고 인민해방군의 티베트 철수를 주장.
△1954년 중국 전국인민대표대회, 달라이라마를 전인대 상무위 부위원장으로 선출. 달라이라마, 베이징으로 가 마오쩌둥, 저우언라이, 덩샤오핑 등과 회담. 인도, 중국과 협정 통해 중국의 티베트 군사 점령을 문제 삼지 않기로 함.
△1955년 티베트인 칼룬쏘캉과 왕친거럭이 이끈 무장봉기 발생.
△1956년 티베트 무장 반란세력 라싸의 중국 인민해방군 포위 공격, 사상자 수백명 발생.
△1957년 1월 중국 저우언라이 총리 인도 방문 때 달라이라마와 판첸라마에게 마오쩌둥 주석의 편지 전달. 편지는 “제2차 5개년 계획(1958~1962년) 기간 동안은 티베트 개혁에 착수하지 않는다. 이 기간이 지난 뒤 티베트의 개혁에 착수할 것인지는 그 때 티베트의 상황과 조건에 따라 결정한다”는 내용.
△1957년 5월 티베트인 칼룬류사 툽텐타르바와 쥬메도르지의 주도로 지하 독립운동단체인 ‘추시강추(사수육강)’ 조직, 이어 ‘위교군(衛敎軍)’ 창설한 뒤 “티베트 독립” 주장하며 무장투쟁 벌임. 중국 인민해방군과 격렬한 교전. 티베트의 참도(중국명 창두), 딩친(딩칭), 낙추(헤어허), 로카(산난) 등 지역에서 중국인 관리 살해, 교통 시설 파괴, 인민해방군 공격.
△1959년 3월10일 라싸에서 티베트 위교군 전면 무장봉기. 달라이라마, 이날 오후 3시 티베트에 주둔 중이던 인민해방군 병영 강당에서 상연될 연극 관람 예정. 하루 전인 9일 저녁 모번 라싸 시장이 “인민해방군이 내일 달라이라마를 연극에 초대한 뒤 베이징으로 납치하려 한다”며 “노부링카(달라이라마가 기거하던 여름궁전)으로 가 달라이라마에게 인민해방군 병영에 가지 말 것 청원하자”고 주장. 10일 새벽부터 2000여명의 군중이 노부링카 앞에서 “티베트 독립” “한족 몰아내자” 등 구호 외치며 시위. “인민해방군이 달라이라마를 연극에 초대한 뒤 독살하려 한다”는 유언비어 퍼짐. 소요 사태 확산. 티베트인으로 인민해방군 부사령원(부사령관) 자리에 오른 쌍포 체왕런친 등 시위대에 구타당함. ‘티베트자치구’ 주비위원회 위원인 켄총팍발라 쏘남걀초, 시위대에 구타당해 사망. 시위 주도 세력, ‘인민대표회의’, ‘티베트 독립국 인민회의’를 개최하고 “티베트 독립” 선언. 무장 소요 확산. 인민해방군 진압 시작.
△1959년 3월17일 달라이라마, 어깨에 영국제 장총 한 자루를 멘 병사로 위장한 뒤 80여명의 호위단과 함께 포탈라궁을 빠져나옴.
△1959년 3월31일 히말라야를 넘어 인도로 망명, 이 즈음 10만 이상의 티베트인이 국경을 넘어 인도로 망명. 인도 북부 다람살라(Dharamsala)에 정착.
△1959년 중국공산당, 티베트에서 정·교분리, 전통 농업·목축업의 사회주의적 개조에 착수.
△1960년 9월2일 각 지역에서 선출한 13명의 티베트 대표 다람살라에 모여 달라이라마 앞에서 취임 선서. 정식으로 티베트 망명정부와 의회 세움.
△1963년 달라이라마 ‘티베트 민주 헌법’ 초안 발표.
△1965년 티베트자치구 출범.
△1966~1976년 중국 ‘문화대혁명’ 기간 동안 티베트에서 수천 곳의 사원과 수도원이 파괴 약탈당하고 승려들이 환속 당함. 티베트에 인도를 겨냥한 중국의 핵미사일 기지가 설치되고 티베트의 주요 강물이 오염되기 시작함.
△1985년 미국 하원 의원 91명 ‘티베트 지원 결의문’에 서명, 중국 전국인민대표대회 상임위원장에게 보냄.
△1987년 티베트 라싸에서 승려들이 주도한 소요 사태 발생.
△1987년 달라이라마, 워싱턴 미 국회 인권위원회에서 연설. 다섯 가지 평화 정책 제의. 티베트를 평화구역으로 만들 것, 중국은 식민정책을 포기할 것, 티베트의 민주·자유와 기본 인권을 보장할 것, 핵 관련 행위 중단하고 환경 복구와 보호에 힘쓸 것, 티베트 위상 정립을 위한 진지한 협상의 문을 열 것 등.
△1988년 달라이라마, 스트라스부르 유럽 의회에서 연설. 티베트를 무장해제지역으로 만들어 세계 최대의 자연 공원으로 만들 것 제안. 중국 당국, 티베트 망명정부와 대화 일방 중단.
△1989년 10대 판첸라마 입적.
△1989년 라싸를 중심으로 소요 사태 확산, 티베트에 계엄령 선포. 10월 달라이라마, 노벨평화상 수상.
△1992년 중국 당국, 티베트 망명정부와 접촉 재개.
△1994년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제3차 ‘중공중앙 티베트공작 좌담회’ 티베트 지원 위한 62개 항목 확정.
△1995년 중국 정부 주도로 11대 판첸라마 확정.
△1999년 중국 당국, 1989년에 선포했던 계엄령 해제.
△2000년 1월1일, 중국 당국에 의해 승인을 받았던 17대 카르마파 린포체, 인도의 다람살라로 망명.
△2001년 티베트 망명정부, 망명 티베트인의 직접 선거를 통해 쌍둔 린포체를 ‘정부 수석부장’(행정부의 최고 수장)으로 선출, 정치-종교 분리, 티베트 망명정부 민주주의 발전의 전환점 마련.
△2002년 6월30일 제4차 ‘중공중앙 티베트공작 좌담회’, 칭짱철도 건설 포함 티베트 지원 117개 항목 확정.
△2006년 7월1일 중국 칭하이성 거얼무와 티베트 라싸를 연결하는 ‘칭짱철도’ 개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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