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법] 가정폭력처벌법 제정 20년…실효성 ‘물음표’
가해자 5년새 18배 늘었지만
10명 중 9명은 기소조차 안돼
‘긴급 임시조치’ 현장선 유명무실
법1조 “가정 평화·안정” 목적 조항
피해자 목소리 못내는 환경 조장
연인 간 폭력도 증가 추세
문 대통령, 국정과제로 대책 추진
젠더폭력 포괄할 법 체계 마련해야
배우자나 데이트 상대에게 맞았다. ㄱ이란 국가는 ‘가정의 평화와 안정을 회복하고, 건강한 가정을 가꾸며’ 살라고 화해를 종용하고, ㄴ이란 국가는 폭력을 행사한 사람을 즉시 체포해 더 이상 피해가 없도록 나를 보호해준다. 당신은 어떤 사회에 살고 싶은가. <한겨레>가 가정폭력방지법과 처벌법 제정 20주년을 맞아 한국 사회와 미국 사회를 동시에 들여다봤다. 11월25일은 유엔이 정한 ‘세계 여성 폭력 추방의 날’이지만, 우리 주변엔 여전히 가정폭력, 성폭력, 데이트 폭력, 스토킹 등 다양한 젠더 폭력이 끊이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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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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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추석 연휴의 마지막날인 지난 9일 전남 담양에서 남편이 아내에게 흉기를 휘둘러 살해한 사건이 일어났다. 남편 ㄱ(65)씨는 아내 ㄴ(53)씨의 등을 칼로 찔렀고 심하게 다친 아내가 이웃집에 도움을 청한 뒤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결국 숨을 거뒀다. 불과 일주일 전 1일에도 충북 청주에서 추석 연휴를 앞두고 아내와 다툼을 벌이다 집에 불을 지른 ㄷ(48)씨가 경찰에 붙잡혔다. ㄷ씨는 경찰에서 “아내와 말다툼을 하다 홧김에 불을 냈다”고 말했다.
열흘 가까이 이어진 추석 연휴는 많은 이들에게 꿈같은 휴식 기간이었지만, 누군가에겐 생사를 오가는 고통이었다. 명절이 지나면 가정폭력 신고율도 함께 급증하는데, 수많은 폭력들은 ‘가정’이란 이름으로 쉽게 잊힌다. 경찰청 자료를 분석하면, 2014년 설부터 올해 설까지 명절 연휴 기간 경찰이 접수한 가정폭력 신고는 총 3만1157건으로, 연휴 기간 하루 평균 974건꼴이다.
가정폭력방지법 및 가정폭력범죄처벌법이 올해 제정 20주년을 맞았다. 1990년대 초 남편의 폭력에 시달리던 아내가 남편을 살해한 사건이 발생하자, 여성·시민사회는 ‘가정폭력방지법 추진을 위한 전국연대’를 꾸려 가정폭력을 엄벌할 수 있는 법을 만들 것을 요구했다. 1997년 국회가 가정폭력방지법과 처벌법을 마련하면서, 가정폭력을 범죄로 인식하지 않았던 한국 사회에서 그나마 작은 진전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2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폭력, 방화, 살인까지 이르는 강력 범죄들이 여전히 ‘부부싸움’, ‘집안일’, ‘말다툼’처럼 범죄의 중요성을 희석시키는 표현들로 장식되고 있는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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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월 8일을 ‘가정폭력 예방의 날’(보라데이)로 정한 여성가족부가 지난 2014년 8월10일 서울 청계광장에서 기념행사를 열자 시민들이 이를 둘러보는 모습. 빨래줄에 널린 색색의 티셔츠는 폭력에서 구해달라는 피해자의 메시지가 빨랫줄 위 티셔츠로 처음 세상에 알리진 것을 상징한다. 김태형 기자 xogud555@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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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력 범죄에도 가정 내 평화·안정 회복하자? “가정폭력 범죄로 파괴된 가정의 평화와 안정을 회복하고, 건강한 가정을 가꾸며 피해자와 가족구성원의 인권을 보호함을 목적으로 한다.” ‘가정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가정폭력처벌법) 제1조에 나오는 법의 목적이다. 하지만 이 법은 ‘가정폭력 범죄’에 대한 정의로 상해와 폭행, 사기와 공갈, 유기와 학대, 체포와 감금, 강간 및 살인 등을 예로 들고 있다. 쉽게 말해 가족 구성원 사이에 때리고, 학대하고, 살인이 일어났는데도, ‘가족’이기 때문에 평화와 안정을 회복하고 건강한 가정을 가꿔야 한다는 말이 된다.
가정폭력처벌법의 목적 조항은 형사처벌을 받아야 할 강력 범죄가 ‘가정’ 내에서 발생했다는 이유만으로 가정의 회복이 우선시되며, 이는 곧 가해자 처벌이 어렵도록 법이 제도화됐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조주은 국회입법조사처 보건복지여성팀 입법조사관은 “유교적 가족주의와 정상 가족 이데올로기가 강한 우리나라에서 ‘가정의 평화와 안정’이나 ‘건강한 가정’ 등을 법의 목적으로 강조할 경우, 가정 내 폭력을 은폐하고 피해자가 목소리를 낼 수 있는 환경을 더욱 어렵게 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현재 국회 여성가족위원회에서는 이 법의 목적 조항을 “가정폭력범죄의 피해자와 가정 구성원의 안전을 도모하고 인권을 보장함을 목적으로 한다”로 변경하는 개정안이 발의된 상태다. 고미경 한국여성의전화 대표는 “현행 가정폭력처벌법에는 형사처벌해야 할 강력 범죄를 ‘가정 내 경미한 다툼’으로 여기는 후진적 관점이 법을 작동하고 있다. 현행법 전반을 관통하는 패러다임이 ‘가정 보호’가 아닌 ‘인권 보호’가 돼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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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있으나 마나 한 법, 재판에 넘겨지는 경우 드물어 2013년 출범한 박근혜 정부는 가정폭력, 성폭력, 학교폭력, 불량식품을 ‘4대 사회악’으로 정의했다. 가정폭력과 성폭력 같은 젠더 간 권력관계로 발생하는 ‘젠더 폭력’을 사회 문제로 삼아 양성화한 것이다. 이로 인해 경찰에 입건된 가정폭력 가해자는 최근 몇 년간 꾸준히 늘었다.
법무부가 정춘숙(더불어민주당) 의원실에 제출한 자료를 보면, 경찰에 입건된 가정폭력 가해자는 2011년 2939명에서 2016년 5만4191명으로 5년 사이 18배가량 크게 늘었다. 하지만 이들 중 기소돼 재판에 넘겨진 인원은, 5년간 전체 가해자 14만8009명 중 1만5194명(10.4%)에 불과하다. 5년간 가정폭력으로 입건된 가해자의 절반 이상(52.9%)이 불기소 처분되거나, 가정보호사건(34.8%)으로 송치됐고, 실제 기소돼 재판에 넘겨지는 경우는 10명 중 1명(10.4%)에 그쳤다. 가해자 10명 중 9명은 기소조차 되지 않았다는 뜻이다. 가정폭력처벌법 기소율은 지난 5년 동안 18%(2011년)에서 8.5%(2016년)로 오히려 줄고 있다.
가정폭력 가해자가 늘고 있지만 정작 기소율은 낮다 보니, 가정폭력 현장에 출동하는 경찰도 어려움을 겪는다. 신고가 들어와 현장에 나가보면 이미 현장의 폭력 상황은 종료된 뒤이며 이웃 증언 같은 명백한 증거를 찾기 어렵다. 게다가 피해자가 처벌을 원치 않는 상황까지 겹치면 경찰이 가해자를 현행범으로 구속하거나 가정폭력처벌법에 따른 ‘긴급 임시조치’ 등 실질적인 조처를 취하기 어렵다. 김샛별 서울지방경찰청 홍보담당관실 경감은 “현행법에 가해자와 피해자를 분리하는 ‘긴급 임시조치’가 있지만 경찰이 신청하면 검찰을 거쳐 법원의 최종 결정에 이르기까지 과정이 복잡해 현장에서 쉽게 작동하기 어렵다. 경찰이 현장에서 ‘긴급 임시조치’를 취했을 때 가해자가 이를 거부하면 공무집행방해도 거의 인정되지 않는 것이 현실”이라고 말했다.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의 ‘가정폭력 사건에 대한 경찰 초기 대응강화 방안’ 보고서를 보면, 전국 경찰관 154명 중 ‘긴급 임시조치의 실효성 확보 수단이 미흡하다’는 문항에 72.1%가 ‘그렇다’고 응답했다.
신고 해도 해결되지 않을 것이라는 시민들의 무력감은 상당하다. 지난 3월 발표된 여성가족부의 ‘2016년도 전국 가정폭력 실태조사’(19살 이상 국민 6000명 대상)를 보면, 폭력이 발생한 이후 경찰에 도움을 요청하지 않은 이유는 ‘폭력이 심각하지 않다고 생각해서’(41.2%), ‘집안일이 알려지는 것이 창피해서’(29.6%), ‘신고해도 소용이 없을 것 같아서’(14.8%) 등의 차례였다. 경찰 신고 이후의 법 절차를 신뢰하지 못해 도움을 요청하지 않았다는 응답률이 3위였다.
■ 데이트 폭력 등 다양한 젠더폭력 막을 법 있어야 지난 11일 서울 고려대학교 교정에는 데이트 폭력을 고발하는 대자보가 붙어 주목받았다. 대자보의 글쓴이는 “그때는 몰랐지만, 이 모든 것은 명백한 폭력이었다. 사귄다는 이유로, 연인이라는 이유로 아무렇지 않게 나의 권리와 자유를 침해하고 속박했던 오빠의 행동이 하나하나가 모두 폭력이었다”며 “데이트 폭력인 줄 모를 수도 있고 알아도 이후의 보복과 가해가 두려워서, 내가 잘못한 것 같아서 제대로 된 신고조차 하지 못하고 있을 수 있다”고 썼다. 이 대자보는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많은 대학생들 사이에 공감을 얻었다.
가정폭력뿐만 아니라 연인 관계에서 빚어지는 각종 폭력은 꾸준히 증가하는 추세다. 경찰청의 ‘데이트 폭력 피의자 검거 현황’을 보면, 최근 3년간 6675명(2014년), 7692명(2015년), 8367명(2016년)으로 늘고 있다. 하지만 가정폭력처벌법만으로는 젠더 간 불평등으로 발생하는 다양한 폭력을 처벌하기 어렵다는 지적이다. 현행 가정폭력처벌법은 배우자 또는 과거 배우자, 법적으로 인정받은 사실혼 관계의 폭력만을 대상으로 한다. 동거 커플이나 동성 커플 가정에서는 폭력이 발생해도 가정폭력처벌법을 적용해 가해자를 처벌하거나 피해자를 보호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법 적용 대상이 좁다 보니, 연인 관계에서 발생하는 데이트 폭력, 스토킹 등은 일반적인 형사법을 적용해 처벌되고 있다.
외국은 다르다. 미국 미네소타주 가정폭력법은 법 적용을 받는 ‘가족이나 가구 구성원’의 정의가 폭넓게 규정돼 있다. 배우자뿐만 아니라 ‘현재 함께 거주 중이거나 과거에 함께 거주했던 사람’, ‘유의미한 연애 관계나 성관계에 관련된 사람’, ‘결혼이나 동거 여부를 불문하고 임신 중인 여성과 그 여성이 아이의 아버지라고 주장하는 남성’까지 포괄한다. 미국은 미네소타주뿐만 아니라 전체 50여개 주에 적용하는 연방법으로 1994년 ‘여성폭력방지법’을 제정해, 여성이 안전한 가정을 가질 권리, 여성의 민사상 권리 등을 명시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가해자와 피해자를 긴급히 분리할 수 있는 규정을 포함한 ‘젠더폭력방지법’이 만들어져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사회적으로 젠더 폭력을 엄벌해야 한다는 분위기가 일자, 지난 대선에서 문재인(더불어민주당), 안철수(국민의당), 심상정(정의당) 후보는 젠더폭력방지법을 공약으로 내걸었다. 문재인 대통령은 당선 이후 ‘젠더폭력 대책’을 국정과제로 정한 상태다. 현재 국회에는 가정폭력방지법과 가정폭력범죄처벌법 개정안 외에도, 데이트 폭력 및 스토킹 등 다양한 형태의 젠더 폭력을 처벌하는 ‘데이트폭력방지법’이 발의돼 있다.
하지만 가정폭력이나 데이트 폭력은 그 종류와 양상은 다양하지만 근본적 원인은 같으므로 가해자를 처벌하고 피해자를 지원하는 통합적 법 체계를 마련하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송란희 한국여성의전화 사무처장은 “가정 폭력, 데이트 폭력, 젠더 폭력이 개별적으로 논의되고 있는데 이는 모두 젠더 간 권력관계에서 발생한다는 공통점이 있기 때문에 개별 법이 아닌 통합적 법 체계가 마련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김미향 기자
arom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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