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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첩 누명을 쓰고 17년 동안 옥살이를 하다가 재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은 박동운(72)씨가 지난 2012년 <한겨레21>과의 인터뷰에서 소회를 밝히며 착잡한 표정을 짓고 있다. 정용일 <한겨레21> 기자 viator@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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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첩조작 피해자 박동운씨 가족
끔찍한 고문·억울한 옥살이
28년만의 재심서 무죄 판결
국가 상대 손배소 1·2심 승소
배상금 중 절반 미리 받았지만…
대법 “재심 손배소 소멸시효 6개월”
다른 재판 판결에 박씨 소송 뒤집혀
고작 2개월 늦은 탓 ‘배상금 0원’
국가는 ’부당이득금 반환’ 소송도
박씨, 1심 패소해 이자까지 내야
헌법소원 냈지만 2년 넘게 무소식
“국가가 우릴 위해 해준 것 없어
헌재 결정까지 판결만은 미뤄주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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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첩 누명을 쓰고 17년 동안 옥살이를 하다가 재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은 박동운(72)씨가 지난 2012년 <한겨레21>과의 인터뷰에서 소회를 밝히며 착잡한 표정을 짓고 있다. 정용일 <한겨레21> 기자 viator@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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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운(72)씨는 지난 6월16일 생애 열번째 판결문을 받았다. ‘부당이득금’이라는 제목이 붙은 판결문이었다. ‘피고 박동운은 8억6753만7095원에 대하여 2012년 12월15일부터 2017년 6월16일까지는 연 5%의, 그 다음날부터 다 갚는 날까지는 연 15%의 비율로 계산한 돈을 지급하라.’
6월16일 기준으로 1억9537만원에 이르는 이자는 연 15% 비율로 지금도 늘어나고 있다. 자신에게 간첩 누명을 씌워 평생을 짓밟은 국가가 ‘배상’이라며 5년 전 박씨에게 준 돈은 약 8억6754만원. 하지만 국가는 이제 와 이 돈이 ‘부당이득’이라며 이자까지 더해 10억이 넘는 돈을 토해내라고 한다. 박씨는 14일 <한겨레>와 한 전화통화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법원이 잘못해 놓고, 손해배상금을 부당이득금이라며 내놓으라고 한다”며 분통을 터뜨렸다.
고문 흔적 보여줄 필요 없다던 법원
박씨는 서른여섯살 때 첫 판결문을 받았다. 서울형사지법 14부(재판장 김헌무)는 1981년 11월3일 “피고인 박동운을 사형에 처한다”고 선고했다. 농협 서기이자 세 아이의 아버지였던 박씨에게 붙은 죄명은 간첩. 국가보안법·반공법 위반이었다. 한국전쟁 때 행방불명된 아버지 박영준씨가 월북해 남파간첩이 됐는데, 아버지에게 포섭돼 평양에 가서 지령을 받고 주변 사람들의 불평불만을 유도했다는 게 박씨의 혐의였다.
판결문에는 작은아버지 박경준(당시 48살)씨, 어머니 이수례(당시 57살)씨, 공무원이었던 동생 박근홍(당시 34살)씨, 고모부 허현(당시 43살)씨의 이름도 적혀 있다. 재판부는 같은 날 박경준씨에게 징역 10년, 이수례·박근홍씨에게 징역 5년, 허현씨에게 징역 1년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했다. 진도에 터 잡아 살았던 박씨 일가는 하루아침에 ‘가족 간첩단’이 됐다. 다음해 3월6일, 서울고법 형사3부(재판장 이정락)는 박씨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하는 등 가족들의 형을 일부 줄여줬지만 혐의는 그대로 인정했다.
‘가족 간첩단’을 만든 건 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 현 국가정보원)의 고문이었다. 박씨는 어머니와 1981년 3월7일 불법 연행된 뒤 62일 동안 감금돼 고문을 받았다. 고문은 1982년 쓴 항소이유서에 생생하게 나온다. “빨갱이 교육을 받아서 말을 하지 않는다고 발에 수갑을 채우고 무릎 사이에 경찰 곤봉을 끼운 채 밟았습니다. 온몸을 포승줄로 꽁꽁 묶고 가격하다, 고통이 없다면서 담요로 말아 온몸을 가격해 기절하고 말았습니다. 정신 고문을 해야겠다면서 이북 갔다고 말하지 않으면 어머니를 데리고 너와 같이 옷을 벗기고 고문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또 고문이 시작되므로 도저히 견딜 수 없고 죽고 싶은 마음뿐이어서 이북에 갔다 왔다고 하니 수사관들이 이북에 갔다 온 것같이 만든 것입니다.”
간첩이 아니라는 진실을 밝히는 건 오로지 박씨와 가족들 몫이었다. 박씨는 검찰 조사에서 “조서 내용이 고문으로 조작됐다”고 했지만, 검사는 도리어 안기부 수사관 2명을 불렀다. 박씨에게 안기부는 곧 고문을 뜻했다. 검찰에서도 거짓 자백을 했다. 희망은 재판뿐이었다. 1981년 8월17일 첫 재판에서 박씨는 모든 공소사실을 부인하며 “안기부에서 모진 고문을 당했다”고 주장했지만, 법원도 검찰처럼 박씨를 외면했다.
박씨는 2006년 11월1일 대법원 국정감사에 증인으로 나와 “조작 사건에 누가 책임이 가장 크냐”는 국회의원에 질문에 “법원”이라고 답했다. “재판에서 우리 가족이 전부 다 부인하며 고문에 의해서 그랬다고 얘기하니, 판사 세 분이 딱 앉아서 하는 말이 ‘여태까지 한 것을 안기부에서 다 시인해놓고 여기에서 부인해?’ 하며 서류를 들어 탁자를 때리기도 하고, 어떤 때는 저희가 얘기하면 졸고, (고문으로 생긴) 상처의 흔적을 보여줘도 판사는 본 체도 안 했습니다.”
가족들의 투쟁으로 얻은 재심 무죄
대법원 3부(재판장 정태균)가 1982년 6월22일 무기징역을 확정했지만 박씨의 진실규명 의지를 꺾지는 못했다. 감옥에서도 대통령, 법무부 장관, 교도소장 등에게 “나는 간첩이 아니다. 고문으로 허위자백을 했다”는 청원서, 청구서, 탄원서를 썼다. 1994년에는 고문한 안기부 수사관들을 고소했지만, 검찰은 기소하지 않았다. 1988년 석방된 작은아버지 박경준씨가 10년 만에 간암으로 숨진 1998년, 마침내 박씨는 특별사면으로 석방됐다.
17년 만에 처음 본 아내, 세 아이와의 거리는 좀처럼 좁혀들지 않았다. 가족 빚을 떠안았고 ‘보안관찰’이란 이름으로 경찰의 감시를 받았다. 그럴수록 박씨는 더 진실규명에 몰두했다. “가족도 친지도 친구도 간첩이라는 딱지 때문에 사라져버렸고 번듯하게 다녔던 직장은 따가운 시선에 구경조차 갈 수 없었습니다. 내가 다시 돌아갈 곳이 있다면 그것은 진실이었습니다.”
2009년 11월13일, 서울고법 형사1부(재판장 조병현)는 재심 청구 2년 만에 박씨와 가족 4명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무죄가 확정되고 박씨와 가족 등 27명은 2011년 5월6일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다. 1·2심은 박씨에게 약 17억원 등 총 56억원과 그 이자를 지급하라고 선고했다. 피고인 국가는 대법원에 상고하며 끝까지 다투겠다고 했지만, 박씨는 재심 무죄 사건의 국가 책임을 인정하는 판결이 뒤집히리라고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날’은 예고 없이 찾아왔다. 2013년 12월12일 대법원 1부(주심 박병대 대법관)가 갑자기 재심 무죄 사건의 손해배상 소송 제기 소멸시효를 ‘형사보상 결정 확정일로부터 6개월’로 못 박는 판결을 내놓은 것이다. 이 판결이 난 지 1년 뒤인 2014년 12월24일 대법원 3부(주심 민일영 대법관)는 ‘박씨와 가족들이 형사보상 결정 확정일(2010년 9월10일)로부터 6개월 지나 소송을 제기(2011년 5월6일)했다’며 손해배상금을 ‘0원’이라고 판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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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송 두 달 늦었다고…56억 손해배상 0원 만든 법원
박동운씨와 같은 ‘국가폭력 피해자’는 평생을 국가뿐 아니라 시간과 싸워야 했다. 정부·수사기관·법원이 한몸이 되어 벌인 ‘조직범죄’인 만큼 가해자였던 독재정권이 끝나야 했고, 국가기관에 맞서 증거를 찾아줄 이도 없었다. 2000년대 들어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등 여러 과거사 위원회가 생겼지만, 그뿐이었다. 위원회가 따로 후속조처를 해주지 않아, 피해자들이 직접 법원에 재심 신청을 하고 몇 년씩 판결을 기다렸다. 재심 무죄 판결을 받고 국가 손해배상을 제기했더니, 이번엔 그 국가가 “왜 이제야 소송을 냈느냐”며 소멸시효를 내세웠다.
박씨의 손해배상 재판에서 국가 쪽 변호사는 “불법행위를 원인으로 한 국가에 대한 손해배상청구권은 피해자가 그 손해 및 가해자를 안 날로부터 3년이 지나거나, 불법행위를 한 날로부터 5년이 지나면 시효로 소멸한다”며 불법체포된 1981년 3월7일 또는 석방된 1998년 8월15일로부터 5년 안에 소송을 내야 했다는 논리를 폈다. 무기수로 감옥에 있었을 때, 또는 국가보안법 위반자라며 보안관찰을 당하고 있을 때 ‘간첩 박동운’이 국가에 손해배상을 내야 했다는 비현실적인 이야기다.
1·2심 법원은 다행히 이런 소멸시효 주장을 인정하지 않았다. 앞서 대법원이 2011년 1월 울릉도 간첩단 사건, 아람회, 민족일보, 납북어부 사건 피해자들이 낸 손해배상 소송에서 “국가가 소속 공무원들의 불법행위로 고통을 당한 원고들을 위로하지 않고 소멸시효 완성을 주장하는 것은 사법부를 통해 피해보상을 받을 수 있는 통로조차 봉쇄하는 결과여서 매우 부적절한 대응”이라고 판단한 바 있기 때문이다. 같은 해 6월 울산보도연맹 학살 사건에서도 “진상을 은폐한 국가가 이제 와서 유족들이 미리 소를 제기하지 못한 것을 탓하는 것은 현저히 부당하여 신의성실 원칙에 반한다”고 선언했다.
1심이 2012년 7월20일 56억원과 그 이자를 지급하라고 판결한 뒤, 박씨 등은 같은 해 12월부터 손해배상금의 절반을 미리 받았다. 정부는 항소, 상고했지만 박씨는 불안하지 않았다. 자신과 같은 조작간첩 사건 피해자들이 모두 대법원에서 1심대로 손해배상을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박근혜 정부 출범 첫해인 2013년부터 이상한 분위기가 감지됐다. 2013년 5월 대법원 전원합의체(주심 박병대 대법관)가 진도보도연맹 사건에서 “진실화해위 진실규명 결정일로부터 3년이 지나면 단기소멸시효가 완성된다”는 판단을 내렸다. 그동안 특별히 소멸시효를 두지 않았던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 사건에서 갑자기 ‘3년’이라는 시간제한을 만든 것이다. 그러다가 그해 12월 대법원 1부가 조작간첩 사건에서도 ‘형사보상 결정 확정일로부터 6개월’ 안에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해야 한다는 이상한 기준을 제시했다. 이 판결 전까지 피해자들은 민법에 따라 ‘재심 무죄 확정일로부터 3년’ 안에 소송을 내면 된다고 생각했고, 법원도 이를 인정해왔다. 박씨 등이 이의를 제기했지만 서울고법 민사28부(재판장 박정화)는 2015년 9월22일 예외 없이 ‘청구 기각’을 선고했다.
대한민국은 빠르게 움직였다. 2016년 6월13일 대한민국은 박씨 등을 상대로 부당이득금 반환 소송을 냈다. 서울중앙지법 민사27부(재판장 김광진)는 지난 6월16일 “헌법재판소 헌법소원 결정 때까지 선고를 미뤄달라”는 박씨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고 ‘부당이득금’이 된 손해배상금에 이자까지 더해 토해내라고 판결했다. 가지급을 받은 27명 중 돈을 돌려주지 못한 박씨 등 9명은 실제로 받은 17억원보다 더 많은 20억원 이상을 내야 할 처지가 됐다.
박동운씨는 며칠 전 부당이득금 소송 2심 첫 재판이 오는 10월26일에 열린다는 연락을 받았다. 2015년 2월 헌법재판소에 낸 헌법소원은 2년 넘게 소식이 없다. 첫 재판에서 선고일이 정해질 가능성이 큰데, 이 재판이 끝나면 헌재에서 위헌 결정이 나더라도 또다시 재심을 해야 할 처지다. 지금 그는 사형을 선고받은 37살 ‘간첩 박동운’으로서 썼던 항소이유서를, 72살 노인이 되어 또 쓰고 있다. “1981년부터 우리 가족은 죽을힘을 다해 싸워왔습니다. 무죄를 받을 때까지 국가가 우리를 위해 해준 것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 6개월 안에 손해배상을 청구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권리가 없다고 말할 자격이 있는 건가요? 한번 잘못된 판결을 바로잡는 일은 너무나 힘들고 어려우며 큰 상처를 남기게 됩니다. 최소한 헌재 결정이 나올 때까지 판결을 미뤄주실 것을 부탁드립니다.”
김민경 기자
salma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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