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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7.08.28 20:59 수정 : 2017.08.28 21:13

[동네변호사가 간다]

1992년 연재가 시작된 일본 추리 만화 <소년탐정 김전일>은 모든 이야기가 누군가 죽으면서 시작된다. 그리고 꼭 이런 대사가 나온다. “범인은 이 안에 있어!” 범인이건 아니건 모두가 움찔 놀라게 마련. 소년 탐정은 놀라운 관찰력으로 수집한 증거를 조목조목 들이대어 범인으로부터 자백을 받아낸다. 실제 수사에서도 놀라운 관찰력으로 수집한 과학 증거로 자백을 받아내면 얼마나 좋을까만, 현실 피의자신문조서 작성 과정에서는 ‘증거 수집’보다는 ‘들이대기’가 더 많이 이루어지는 것 같다.

나의 의뢰인 ㅁ씨는 나이 어린 여성이다. 용돈이 부족했던 ㅁ씨는 핸드폰에 온 대출을 해준다는 문자를 보고 전화를 걸었다. 신용등급을 알아보기 위해서 체크카드를 달라는 말에 속아 그들이 보내온 퀵서비스 기사에게 체크카드를 건네주었다. 알고 보니 보이스피싱에 악용할 체크카드를 모으는 일당에게 카드를 빼앗긴 것이었다. 문제는 경찰 수사 과정. ㅁ씨는 자신의 체크카드를 남에게 대여했다는 전자금융거래법 위반 혐의로 조사를 받으러 나오라는 경찰의 통보를 받았다. 부모님께 차마 말을 하지 못하고 동네 언니와 같이 경찰서에 가 조사를 받게 되었는데 그 과정에서 수사경찰관은 ㅁ씨의 동네 언니는 가족이 아니라는 이유로 수사 과정에 옆에 앉지 못하게 하고 수사실 밖으로 내보냈다. ㅁ씨가 속아서 빼앗긴 것일 뿐 오히려 피해자라고 하소연하자, 수사경찰관은 “말이 되는 소리를 하라”며 책상을 쳤다. ㅁ씨는 겁에 질려 제대로 방어하지 못하고 “체크카드를 빌려주면 돈을 준다기에 카드를 빌려주었다”는 내용으로 허위자백을 하고 말았다. 변호인으로 선임된 뒤 피의자신문조서를 읽어보니, 경찰 조사관에게 ㅁ씨가 억울함을 하소연했던 부분은 아예 적혀 있지 않았고 문답 내용은 아주 간단하기까지 했다. 2017년 ○월○일에 전화로 체크카드를 빌려주면 돈 ○○만원을 준다는 말을 들었다는 것이지요? 네. 법 위반임을 알았나요? 네. 다 인정하고 반성하지요? 네. 전형적으로 강압적인 분위기에서 피의자가 자백하는 상태를 만들고 나서 앞부분 수사 과정은 피의자신문조서에 적지 않고 자백하는 부분부터 조서를 작성하기 시작하는 기법이다.

또 다른 나의 의뢰인 ㄱ씨는 경찰 조사를 받으러 갈 생각만 하면 소화가 되지 않고 밤에 잠도 잘 오지 않는다고 하소연했다. 이미 1차 조사를 받고 온 그는 경찰 조사 과정에서 받은 모욕을 견디기 어려워 2차 조사를 대비해 변호인을 선임했다. 무죄를 주장하며 계속해서 ㄱ씨가 혐의를 부인하자 담당 수사관이 아닌 뒷자리의 상급자가 가세해 “본인에게 진짜 유리한 게 뭔지 좀 생각해가며 말을 하라”고 윽박질렀다고 한다. 이어 담당 수사관은 “빨리빨리 하고 밥 먹으러 갑시다”라며 달래더라는 것. ㄱ씨가 계속 부인하자 담당 수사관 옆자리의 수사관까지 가세해 추궁을 했다. 여러 명의 수사관이 피의자의 주장이 말이 안 된다는 식으로 돌아가며 심리적 압박을 가하는 것도 전형적으로 자백을 받아내는 수사기관의 수사 기법이다.

수사기관의 강압 수사를 방지하기 위한 대책으로 일본에서는 피의자노트 제도를 시행하고 있다. 2003년 아키타 마사시라는 한 변호사의 제안으로 도입된 이 노트는 피의자가 경찰과 검찰 조사를 받기 전후 직접 수사 과정을 기록하는 것이다. 노트는 주요 수사 절차의 안내와 용어 설명, 부당하고 강압적인 수사가 있었는지를 묻는 문항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와 같이 피의자가 기록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수사기관이 이를 의식해서 강압 수사가 줄어드는 효과가 있었다고 한다. 피의자가 수사기관에서 자신을 지키는 외부와의 끈인 셈이다. 우리도 적극적으로 도입해야 한다. 소년 탐정처럼 놀라운 관찰력으로 수집한 증거를 조목조목 들이대어 자백을 받아내는 수사를 볼 수는 없는 것일까. 과학수사의 발전은 하루가 다르게 이루어지고 있는데 수사 대상이라는 이유로 인격적 모욕을 당하는 일이 언제까지 계속되어야 하는지 의문이다.

조수진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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